법의 이면

지배와 정의 사이에서

by 최정임

19세기 서구는 왕권이 붕괴되고 야경국가로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이 시기에는 국회가 제정한 성문법에 따라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판단하고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는 법실증주의가 등장했다. 법실증주의는 법에 부합하는 것은 곧 정의롭다는 인식을 확산시켰다. 즉, 법은 정의와 동일시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법을 매개로 한 새로운 지배 질서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고대 철학자 트라시마코스의 말처럼, 법은 특정한 지배 계층의 이익을 위해 변질되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면서, 법은 더 이상 권력의 도구가 아니라 권력을 통제하는 이성의 산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법이 권력에 굴복하는 것인지, 혹은 정의를 수호하는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렇다면, 법은 권력의 지배자일까? 정의의 수호자일까?


법은 실행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에 권력과 필연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법의 권력이 곧 지배계층의 힘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국민들은 법을 선택하고, 개정하고, 폐지하는 과정에 참여함으로써 법의 실행에 참여한다. 따라서 법의 권력은 모든 국민의 의무와 권리로부터 나오며, 지배계층마저도 법을 지키게 만드는 것이다.


법이 권력과 동일시되는 시각은 법이 절대적이며, 인간은 그 법에 종속되어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법은 절대적이지 않으며, 인간의 일상에 큰 우위를 차지하지도 않는다. 예를 들어, 법은 이슬람국가에서 벌어지는 명예살인과 같은 상황에는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 이는 법이 한 사회의 문화보다 더 낮은 위치에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법의 권력은 사회 속에서 법이 실행될 수 있도록 하는 법 자체의 실행능력을 의미하며, 우리를 지배하지도 않고, 지배계층의 힘과도 연관이 없다.


더 나아가, 법은 정의보다 이익을 수호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법을 사용한다. 자신의 권리가 무시당했거나, 소유권이 침해받았을 때가 대표적인 예이다. 이는 법이 개인의 이익추구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그 이익이 정의롭지 않더라도, 법의 절차에 따라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살인자나 성범죄자는 심신 미약 상태, 즉 병이나 술에 취한 상태에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하여 법의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 있다. 그 결과, 형량 감형이라는 이익을 취하게 된다. 법이 정의를 수호한다면, 이러한 사례는 정당하다고 볼 수 있을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답할 것이다.


앞선 사례에서 보듯이, 법은 정의를 수호하는 사람보다는 정의롭지 못하더라도 법을 잘 사용하는 사람의 손을 들어주는 경우가 많다. 법은 단지 자신이 당한 불이익을 상대방에게 똑같이 돌려주는 절차적 도구일 뿐이다. 그것은 정의라고 볼 수 없으며, 오히려 개인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한 것으로 간주된다.


결국, 법은 권력이나 정의와는 독립적인 별개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법은 인간이 불안한 세계 속에서 '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해답이며, 불확실하고 우연적인 환경에 적응하고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도구이다.


법은 정의를 추구하기보다는, 어떤 법이 어떤 상황에서 유용하냐에 따라 움직인다. 법은 마치 양날의 검과 같아서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다른 기능을 수행한다. 지금까지 법은 지배계층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 왔고, 그로 인해 강자의 이익이라는 오명을 가지게 되었다. 또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 수호자라는 과분한 기대를 받았다. 지금 우리는 어떠한 법을 만들어가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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