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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나 Aug 27. 2024

상상을 잘하는 어른이 되었다


'목적'이라는 말을 마주하면 나는 정말로 막막한 과제 앞에 서 있는 어린아이의 심정이 된다. 언제나 꿈이 많고 열정적이었던 것에 비하면 목표를 세우고 성취해 본 경험은 많지 않아서일지도 모르겠다. 존 듀이가 말하는 목적이란 목표와는 다소 다른 면이 있지만, 그래도 달성한다는 차원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두 가지 조건이 과연 양립할 수 있는 것인가? 나는 꿈이 많고 열정적이다. 그러나 목표를 세우고 성취해 본 경험이 많지 않다. 나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꾸준하고 신중하다는 평가를 많이 받는다. 한번 좋아한 것에 대해서는 쉽게 포기하지 않고, 미약하게나마 지속하는 모습을 보여와서일 것이다. 이렇다 할 성과가 나지 않는데도 몇 년 이상씩은 꼭 좋아하는 것을 보면 그런 평가가 영 틀린 것은 아닐테다. 하지만 가끔씩 찾아오는 무력함과 허탈함을 빼놓고 이야기를 이어갈 수는 없다. 


그것은 아주 먼 시절 경험에 의해 생겨난 감정이다. 언젠가 어린아이였을 때 겪은 무력함과 허탈함. 막막함을 맞이한 순간 내가 가지고 있었던 충동이란 무엇이었을지 돌이켜보았다. 나는 상상력이 풍부하고 생각보다는 행동이 먼저 나오는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 살던 곳은 큰 도로가 없는 대규모의 아파트 단지이면서도 은밀한 산골과도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었는데, 대도시였던 것에 비해 자연과 어우러졌다. 그래서 나는 호기심을 펼치는 일 중에서도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동물과 식물을 만나는 것을 좋아했다. 새로운 것을 만나는 것은 설레는 일이었으나, 너무 자극적이거나 이질적인 것에는 보수적인 태도를 보이곤 했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우리집에서 유치원까지 가는 길로 A코스가 있다고 하자. 그 길은 차도와 인도가 있는 작은 도로이고, 어른들도 알고 있는 공식적인 길이다. 아이들만 아는 B코스도 있다. 토끼풀이 잔뜩 피어있는 동산을 가로 질러 가는 길인데, 그 길로 가려면 풀을 다 밟아야 한다. 풀을 밟지 않으면서도 걸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그 길은 어른들 발크기 보다는 작았다.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B코스로 다니기가 미안해졌다. 그래서 동산 옆에 높은 담벼락 위로 올라가 C코스를 만들었다. 그것은 윗동네 아파트와 동산 사이에 울타리를 만들기 위한 요량으로 지어진 거대한 시멘트 덩어리였는데, 높이가 꽤 높았고 양옆에 안전한 가림막이 없었다. 하지만 그 윗면은 평평하고 넓어서 중심만 잘 잡는다면 동산으로 굴러떨어질 일은 없었다. 물론 떨어지는 경우 팔다리가 부러질 것 같은 높이였다. 하지만 새로운 길은 멋졌다. 온동네가 한눈에 들어왔고, 단지를 넘어선 다른 아파트도 보였다. 어른들이 위험하다고 가지 말라고 할 때까지, 나는 그 길을 동네아이들에게 전파하며 신나게 오고갔다. 


C코스를 신나게 오고가는 초등학생 나에게 그 모험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반드시 막막해질 것이다. 기억에는 없지만, 아마 누군가 나에게 비슷한 맥락의 질문을 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어른들이 그 길을 몰랐으면 했다. 어른들은 이 길을 개척한 것이 얼마나 값지고 멋있는 일인지도 모를 뿐더러, 본인들이 이해하고 싶은 언어로 나의 행동을 규정하려 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렇게 멋들어지게 저항하지는 못했겠지만, 반드시 반발하는 마음을 가졌을 것이다. 나는 그 시절의 나를 상상하며 '빨간 머리 앤'을 자주 떠올린다. 예술적이고 즉흥적인 성향이 그를 둘러싼 사회에는 문제시 되는데, 그럴때마다 억울하고 서운했을 앤의 마음이 백번이고 이해되는 것이다. 불과 몇년 전인 이십대 초반까지도 그랬다. 어른들과 사회는 마냥 타협적인 것이라 여겼고, 나는 절대로 그 세계에 귀속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런데 빨간 머리 앤의 이야기를 계속 따라가다보면 다른 것이 보이기도 한다는 것을, 최근에서야 알게 되었다. 


앤이 청소년기로 접어들 무렵 애번리 학교에 새로 부임해 온 스테이시 선생님은 존 듀이가 설명하는 이상적인 교사에 부합하는 인물처럼 느껴진다. 앤의 적극적이고 솔직한 면모를 알아보면서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꺼낼 때 신중해야 하며 상대에게 무례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가르친다. 사건에 대한 통찰력과 추진력을 인정하면서도, 독선적이어서는 안되고 연대해야함을 알려준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앤은 점차 더 넓은 사회로 나아가고, 그러면서도 더 이상 미움을 받지 않는 것이다. 만약 C코스를 발견하는 나에게 스테이시와 같은 교사가 있었다면, 어쩔 줄 모르는 충동과 호기심의 표현을 어떻게 건설적인 목적으로 정리해 줄 수 있었을까? 상상력을 잃지 않고도 성숙해지는 법을 어떻게 알려줄까? 


다행스럽게도, 나는 여전히 상상력이 좋다. 아주 성숙해졌다고는 못하겠으나, 상상을 잘하는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 되었으므로 더 이상 하늘을 날거나 인어공주가 되는 상상을 할 수는 없다. 대신에 교사가 되는 상상을 한다. 아, 그것도 충분히 짜릿한 일이다. 우선은 교사가 되어 십오년 전의 나를 만난다고 상상해본다. 어른들에게는 비밀로 하고 동네 아이들을 몰고가서 새로운 길을 공개하는 들뜬 나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 때의 내가 어른이 된 나에게 비밀을 들켜 곤란해하는 것을 눈치챈다. 그 아이에게 다가가는 상상을 한다. 그리고 모험을 응원한다. 대신 날이 밝을 때에만 모험하기로 약속한다. 다치는 경우에는 꼭 알려준다는 내용도 같이. 너무 오랜시간 바깥에 있지는 않기로 한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걱정한다는 것도 알려준다. 모험을 한 뒤에는 일기장에 기록을 남겨보자고 제안한다. 일기를 쓰는 것은 새롭고 멋진 일이라는 사실도 알려준다. 그것이 나중에 너에게 아주 큰 선물이 될 것이라고도 말한다. 그리움이라는 감정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그게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다고 하면, 어쩔 수 없지만 설명하기를 포기한다. 


아이들을 만날 때는, 과연 이들이 내면에 충동이란 걸 가지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종종 들었다. 학교에서 요구하는 봉사시간을 채우기 위해,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거나 또는 부모님의 차를 얻어타고 이동하기 위해 시설에 방문하는 아이들을 만났으니까. 가끔은 새침한 얼굴을 하고, 또는 묻는 말에 대답을 하지 않고 멀뚱히 있는 아이들을 보며 답답하기도 했다. 아주 자발적이고 적극적이지는 않더라도 최소한은 해 줄 수 있는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것은 모르는 일이다. 그들의 시선에 나는 어른일테고, 그들은 그 나름의 비밀을 가졌을 것이다. 그리고 들키지 않기 위해, 자신의 소중한 것을 규정당하거나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나를 마주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조금 더 거리를 두게 된다. 아이들의 충동이 훼손되지 않고 좀 더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면서, 그러나 그러는 동안 다치거나 아프지는 않기를 바라면서. 아이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일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런 상상을 하다보면 내 안에도 멋진 충동들이 가득차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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