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증발된 사람들'
Johatsu – Into Thin AirJohatsu – Into Thin Air
첫 장면. 중년의 여성이 차 안에서 누군가를 기다린다. 잠시 후 차 안으로 숨어 들어오는 남자. 여성이 쐐기를 박는다. '이제 못 돌아가요.' 지금 남자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나선 참이다. 이유가 의외다. 여자친구의 질투를 견디지 못해서다.
다큐의 주인공들은 자발적 실종자. 즉 사라질 것을 결심한 사람들이다. 일본 말로는 '조하츠 じょうはつ', 한자 표기는 '증발蒸發'. 일반적인 증발 현상을 뜻하는데 일본에서는 '스스로 종적을 감춘 사람'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고 한다. 보통 '인간증발'로 번역된다.
다큐를 보면서 놀라웠던 건 일본에는 아예 이 실종자를 다루는 산업이 형성돼 있다는 것. 일종의 야반도주 서비스다. 이들은 누군가 신청을 하면 신청자의 거주지에서 원하는 물건을 신속하게 빼낸다. 그리곤 신청자를 잠적시킨다. 감쪽같이 해치워야 하는 일이다. 뭔가 범죄의 영역일 것 같은데 실제 보이는 모습은 전혀 그렇지 않다. 영화 속에 나오는 야반도주 서비스 업체의 사장은 여성이다. 가정폭력 생존자로 본인이 자발적 실종자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영역이 있을까? 나는 아직 들어본 적이 없다.
사실 우리가 아는 '실종자' 개념 속의 실종자는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남아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경우가 많다. 남은 사람들이 실종자를 말하고 남은 사람들이 실종자의 삶을 구성한다. 실종자를 다루는 이야기의 패턴은 그래서 늘 도달하지 못한 목적지를 맴돌며 추측과 귀환의 가능성을 점쳐보는 일이다. 실종자 자신을 직접 만난다는 건 애초부터 쉬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사라짐을 당했거나 사라질 것을 결정한 사람들. 강제성을 띄는 경우야 말할 것도 없고 자발적 실종자라 해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겐 감춰야 할 사연이 많고 그들이 카메라 앞에 설 가능성은 낮다. 일단 이 영화는 그들을 찾아내 카메라 앞에 세웠다는 데 공이 있다.
모자이크 처리되지 않은 실종자가 꽤 나온다. 실종의 이유는 충분히 예상 가능한 범위 안에 있다. 경제적 실패, 관계의 파탄, 가정 폭력 등. 이색적인 사례도 있다. 스토킹을 피하려는 경우, 아내의 정신적 폭력을 견디지 못한 경우다. 삶에서 사라질 것을 결정해 버린 사람에게 절박하지 않은 이유란 없다.
다큐멘터리는 서두에 일본에서 해마다 8만여 건 정도의 실종신고가 일어난다고 말한다. 이것이 매우 높은 수치고 일본만의 독특한 현상인가 하고 자료를 찾아보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우리나라 역시 실종자 발생 건수 7만 명, 6만 명 수준으로 나온다. 다른 나라도 얼추 비슷한 수준. 숫자 자체만으로 큰 차별성을 갖는 건 발견하지 못했다. 경제 위기를 겪는 특정 시기에 실종자가 증폭하는 건 모든 나라의 공통점.
정작 일본만의 특별함은 따로 있다. 일본의 '인간증발'에 대한 관심은 유구하다. 이마무라 쇼헤이의 <인간증발>이 나온 게 1967년. 이 영화는 실종자라는 소재를 통해 남아있는 사람들의 기억과 진실의 관계를 다룬다. 가깝게는 히라노 게이치로의 <한 남자>도 있다.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도 결국은 사라진 사람, 혹은 다른 인생을 사는 사람을 다룬다. 심지어 <야반도주 사무소>라는 텔레비전 드라마까지 만들어졌다. 왜 일본은 이 현상에 각별하게 반응할까? 정작 궁금한 것은 거기에 있지만 이 다큐와는 다른 영역의 문제일 터.
콘텐츠 제작자에게 실종은 언제나 매력적이다. 한 사람의 실종은 그 사람이 속한 관계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주변인의 삶이 요동친다. 거기에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 요소까지. 사라진 이유가 명확하면 실종이 아니다. 알 수 없기 때문에 실종이고 이유를 알 수 없을 때 이야기는 더 증폭된다.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책 <인간증발>을 먼저 봤다. 프랑스의 두 저널리스트가 일본의 조하츠들을 취재한 책인데 실종자 사례도 훨씬 많이 다루고 있고 실종에 이르는 과정도 다양하게 나온다. 실종자들의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취재도 폭넓다. 책은 얼굴 공개의 부담이 없기 때문에 취재의 범위가 훨씬 더 넓을 수밖에 없다. 책을 보고 난 후에 발견한 다큐라 동일한 콘텐츠의 영상 버전인가 하고 봤는데 전혀 아니었다. 책 <인간증발>에 대한 포스팅은 언제고 따로 해보자. 이마무라 쇼헤이의 <인간증발>도 다시 보자 싶지만. 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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