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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날현 Apr 05. 2024

(2) 새벽에 혼자 119를 타고..


세 살 된 딸과 이제 세상에 나온 지 두 달 된 둘째 딸~

인생의 목표인 딸딸이 엄마로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을 때쯤 2016년.

첫째로 인해 산후조리원을 가는 대신 두 달간의 주거 산후도우미를 선택했고, 금수저가 아닌 나는 대부분이 그렇듯 두 달의 호강스러운 생활을 접어야 했다.


산후도우미가 가고 나의 생활은 힘들었다. 뱃골이 작은 둘째가 젖을 자주 먹었기 때문이다. 나는 첫째 때에도 젖몸살을 앓을 정도로 젖이 많이 돌았으며  또 참 젖이어서 아이의 건강을 이유로 모유수유를 포기할 수 없었다. 다행히 첫째가 어린이집을 갔지만 이상하게 피로는 누적되고 몸 컨디션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루는 밥을 안 먹었는데 배도 고프지 않고 너무 힘들어서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너무 힘드니까 빨리 와 달라고..

웬만큼 아파선 아프다고 하지 않는 나인 터라 다행히 남편은 일찍 와주었다.

남편이 와서 일찍 쉬고 싶었지만 어린 두 딸 때문에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저녁까지 아무것도 안 먹고 있었는데 화장실이 가고 싶었다.

화장실을 갔는데 혈변을 봤다.

조금 묻어 있는 정도가 아니라 피가 너무 많이 나왔다.

난 너무 놀라 남편을 불렀고, 남편 역시 내일 아침에 바로 병원에 가 보라고 했다.

그리고 모유수유를 하고 잠이 들었다.


새벽이었다.

어디가 딱히 아픈 것도 아닌데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몸을 비틀대고 있었다.

잠도 안 오고 이상해서 화장실을 갔다.

또 혈변을 봤다. 이 새벽에… 많은 양의 혈변.. 아니 물에 가까운 혈변.. 얼른 뒷마무리를 하고 눕고 싶었다.

화장실을 나와 안방으로 가는 그 몇 발자국 사이에 난 어지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정신이 없는 상황에서도 난 나의 위급함이 느껴졌다. 정말 있는 힘을 다해 남편을 불렀다.

정적만이 감도는 새벽에..

내 목소리를 듣고 깬 건 둘째였다.

백일도 안 된 둘째가 울기 시작했고 둘째를 데리고 나온 남편이 나를 발견했다.

남편에게 119를 불러달라고 하고, 나는 몸을 피가 없는 쪽으로 굴려서 둘째의 모유수유를 시작했다.

119가 도착했다.

하지만 난 몇 분만 더 기다려 달라고 하고 모유수유를 마친 뒤 들것에 실려 119를 타고 혼자 병원으로 갔다. (이때가 둘째의 마지막 모유수유가 될지 나는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간호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4개 다 달았아요. 안 올라가요.” 누군가에게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하고는 나에게 바로 왔다.

“임지현씨! 상황이 안 좋아요. 바로 보호자 부르셔야 해요.” 친절하지 않은 다급한 목소리로 서너 번은 얘기했다. 빨리 보호자 부르라고.

이미 내 입에서는 피가 오고 가는 호수가 꼽혀 있었고 코에도, 양팔에도, 양 발에도 모든 장치가 달려 있는 상태였다.

난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서 간호사가 대어 주는 핸드폰으로, 어눌한 목소리로 남편에게 전화했다.


그리고…

새벽 4시가 넘어…

희미하게 보이는 의사와 남편…

출혈이 많아 마취를 못한다고…

위(stomach)에 구멍이 나서

출혈이 멈추지 않는다고…

일단 위에 구멍을 지져야 한다고…


이건 꿈일 거야~

난 이때의 기억을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만신창이란 단어를 체험으로 하는 순간이었다.


눈을 떴을 때는

난 응급실이 아니었다.

중환자실이었다.

중환자실에서 간호사가 내 불은 가슴에서

젖을 짜내고 있었다.

내가 깼을 때 간호사는 내 이름을 부르며 정신이 드냐고.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이며 이게 몇 개냐고 물었다. 그렇게 난 누워 있는 상태에서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곳의 모든 환자들은 누워서 똥오줌을 해결했다.

만 이틀째,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옆에 환자는 흰 천으로 덮여져 있었다.


그리고 하루가 더 지나고 난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그제야 들을 수 있었다. 피가 모자라서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위에 구멍이 나서 봉합처리를 했고 용종이 있어 그건 제거했다고.

……

며칠 더 있기를 권유했지만 어린 두 딸이 있어서 난 하루 더 휴식한 다음 바로 퇴원을 했다.

퇴원하며 진리를 깨달은 기분이었다.

건강이 최고라는 그 쉬운 말을

이런 직접체험을 하고야 깨닫다니…


아 이렇게 사람이 죽을 수도 있구나 하는 몽환적인 경험을 하고서야 나 자신의 소중함을 안 것 같았다.

퇴원하며 일주일 후에 조직검사 결과에 대한 진료예약과 함께 퇴원을 했다.

당시 카카오스토리에 올린 글


이기적으로 살아야 하는 필요성을 느끼며

이제 나 자신을 내가 제일 위하며 살겠다고

내 건강은 내가 지키겠노라고

수없이 다짐했던 일주일이었다.


다시 119타는.. 응급실을 가는.. 상황을

두 번 다시 만들지 않을 것이라는

그런 다짐이었으리라~


세상의 모든 일이

나의 다짐과는 별개로 흐른다는 걸

일주일 뒤~

실감.. 아니 절망하는 일이 벌어질 줄도 모르고..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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