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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답을 알려 달래?

by 빛날현


이사로 인해, 딸의 전학 처리를 하러 간 친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아후~ 정말 미쳐 버리겠다.”라는 언니의 첫 문장. 감지했다. 아 무슨 일이 있구나. 지천명을 넘긴 언니는 나보다 먼저 중간항로에 들어섰고 폐경기를 지나 갱년기로 고생 중이다.


그런 언니의 전화 목소리는 차분하다 못해 스산한 저음 톤이었다. 전학을 하는 학교에 딸과 첫 방문을 했는데 담당 선생님의 잘못된 안내와 무대응(무관심)으로 난감한 상황을 겪고 딸아이와의 작은 문제가 생겼다는 말을 하고,

“서아(가명) 한테 한바탕 쏟아냈어. 정말이지 미친 X처럼 쏟아냈어.” 언니의 얘기인 즉, 딸 서아의 어리숙한 태도를 혼냈는데, 혼내는 과정에서 아이가 엄마 속 터트리는 행동을 해서 언니가 참지 못하고 폭발한 것이다.


순간, 언니가 화 났을때 눈빛과 목소리 끝의 뾰족함을 내가 아는데.. 내 조카가 얼마나 아팠을까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나는 언니의 상황이 머릿속에서 그려지면서 얼른 조카 서아의 입장을 대변하기 시작했다.

“언니 서아가 생각하기에는 그게 중요하지 않았나 보지. 이제 초등학생 딱지 뗀 애가 뭘 알겠어? 그냥 학교 구경이 더 급했었나 보지. 그리고 그거 굉장히 건강한 거야. 상대방의 기분에 휩쓸리지 않는 게 어쩌면 서아의 장점일 수 있어. 그거 나쁜 거 아니야. 서아 감정 빨리 풀어줘. 우리 서아 잘못 받아들이면 어떡해?..”라는 나의 반응에 언니의 목소리 톤이 업이 되어 단박에 치고 들어왔다.


“나도 알아. 안다고!

누가 너한테 답을 알려 달래?

내가 답답해 미칠 것 같으니까 그냥 들어만 달라고!”

“띠……….”

“언니~ 그게 아니고~ 언니! 여보세요? 여보세요? ”

전화는 끊겨 있었다.


역시 우리 언니다.

나이가 들어도 사그라지지 않는 언니의 성질머리.

그렇지~ 이게 사그라들면 동생으로서 마음이 아플지도 모르지. 이거라도 살아있어야~라고 생각하기엔.. 힘. 들. 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그 화를 온전히 감당한 아이에게 미안해서, 그런 자기 자신이 창피하고 부끄러워서 전화한 것이었다. 이미 답은 스스로 알고 있었으며 그냥 대나무숲이 필요했던 것인데 전화를 끊고 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한 발 늦어 욕먹기 직전까지 가고 나서야 알게 된 것이다.


당했다. 보기 좋게~

훈수질 혹은 선생질에 익숙한 나에게 찬물 아니 얼음물 한 바가지를 쏟아부어 주었다.

이걸 그 누가 해주겠는가?

피가 섞여 있지 않으면 못할 짓이다.


생각해 보면 우린 어려서 서로의 정답을 서로에게 알려주느라 꽤나 아파했었다. 그러나 나이가 차고 넘치는 지금은 정답이 아닌 각자의 스타일도 존재함. 만. 을 얘기해 준다. 굳이 그 이상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눈치 빠른 두 자매는 알아듣는다.

‘아~ 그래. 내가 정답이 아니었지.’ 하고 돌아갈 줄 아는 여유가 생겼다.


내가 왜 그랬을까? 되짚어 생각해 보면 어쩌면 그 순간 나는 투사하고 있었다. 내가 엄마에게 받고 싶었던 가르침을 나의 가족인 언니에게. 또 언니는 엄마에게 받고 싶었던 인정과 공감을 딸에게 투사하고 있었다.


한 집에서 컸고 같은 부모 밑에서 자랐지만 우리는 서로 다른 성향으로 바라는 것이 달랐다. 나는 엄마의 가르침을 받고 싶었고 또 장녀인 언니는 엄마의 공감에 목말라 있었던 것이다.


내가 어딘가에 썼듯, 나는 성인이 된 이후에 사립초등학교의 존재를 알았으며 유학 가는 친구들부터 학군지의 열혈맘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았다. 어쩌면 그 전부터였던 것 같다. 내 부모가 나의 삶의 방향성을 제시해 주시지 못한 다는 것을. 내가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https://brunch.co.kr/@052005602ea6480/32


어려서 삼 형제를 키우시느라 다사다난하며 여유치 않은 살림에서 부모의 본보기나 방향 제시를 받아보지 못했다. 엄마가 해주는 따듯한 삼시 세끼를 먹으며 다복하게 자랐지만 주변에 본보기가 될 만한 사람은 없었다. 그냥 다복하고 평범하게 자랐다고 생각했다. 그런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엄마의 메아리가 있다. 어린 시절 내가 검사가 되고 싶다고 말했을 때 엄마는 나에게 단호히 말했었다.

‘그런 건 태어나기를 잘 태어난 사람들이나 하는 거라고. 넌 꿈도 꾸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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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였을까? 난 항상 인생의 방향 결정을 스스로 하는, 더 나은 선택을 하는, 인생의 정답을 찾는 프로세스가 스스로 발달했다. 자생하여 그 과정에 방황하다가 알게 되었다. 이미 애초에 인생의 정답이 없었는데 그걸 찾느라 꽤 긴 기간 방황했다는 것을. 아마 그 덕분에 선생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사람은 살아온 데로 답습하듯 세습하듯 살아야 하는 걸까?

나의 투사는 없어질 수 있을까?

아니 멈출 수는 있을까?

많은 전문 서적이나 베스트셀러를 찾아봐도 없어지는 사례를 본 적은 없다. 오히려 사람은 바뀌지 않으며 태어난 성향대로 사는 것이 인생이라고, 그것이 문제 되지 않는다고, 아니면 동전의 양면처럼 다른 좋은 점이 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나 참~

억울해서 살겠는가? 평생을 그리 살아야 한다니. 그래서 더 열심히 찾아봤다. 다행히 훈련으로 좋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식과 의지로 나아질 수는 있지만 없어지지는 않는다고 한다. 그래도 이 투사를 나도 모르게 하는 무의식의 짓에서 한 발만 빼면 멈출 수 있고 나아질 수 있다니.


방법은 간단하다.

내가 그것을 자주 깨달으면 된다.


일단 그러기 위해 가장 먼저 할 일이 있다. 내가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주위를 보거나 SNS만 보더라도 완벽에 가까운 일상과 행복으로 가득한 사람들이 넘쳐나는 듯하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 누구든지 사람이면 결여된 인생을 산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은 혹은 재벌은 완벽할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경제적인 상황을 떠나 아버지의 결벽증이든 어머니의 완벽주의 경향이든 혹은 부모 중 적어도 한 사람의 폭력, 외도, 독재, 무능, 불통 등의 부족으로 인해 자녀가 영향을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단지 그 종류와 정도가 다를 뿐 우리 모두가 받는 부모 콤플렉스인 것이다.


우리의 부모가 완벽하지 않았듯 우리 또한 완벽한 부모가 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나의 부족함을 타인에게 공표하거나 알리고 인정할 필요도 없다. 단지 스스로가 알고 있으면 될 뿐이다. 자신의 자각은 그 어떤 치료보다 우선이다.

‘아~ 내가 지금 투사하고 있구나. 내 부족함을 갈구하고 있구나.’ 이걸 느끼기만 하면 된다. 그 순간 아마 머리에서 마음에서 ‘멈추고 싶다’라는 신호를 보낼 것이다. 이것이 여러 번 쌓이면 무의식으로 나가기 전에 의식이 한 번 더 검열을 하지 않을까?


타인의 피드백은 필요 없다.

이미 답은 내가 알고 있다.

인생의 구루(guru) 같은 건 없다.

정답은 내가 ‘나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인생은 ‘나’를 알아가기 위한 과정인 것이다.




사진: 핀터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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