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최은영 작가의 <데비 챙>(월간 채널예스 2021.7)을 읽은 건 우연히도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있을 때였다. 두해 전 여름, 난 18박 20일 간 이탈리아를 여행했다. 북부 돌로미티부터 남부의 아말피까지, 40도를 넘나드는 폭염 속의 대장정이었다. 평균 나이 53.6세의 다섯 명이 선택한 일상탈출. 낡은 승합차를 렌트해 18일간 총 3,500km를 질주했다. 우리는 여행 중 모두 닉네임을 사용하기로 했고, 닉네임은 이탈리아의 도시 이름 중 앞이나 뒤쪽 두 글자를 따오기로 했다. 굳이 스위스의 ‘마테호른’이 좋다며 ‘마테’로 불린 누군가도 있긴 했다. 그렇게 우린 20일간 마테, 테리, 아말, 로마, 폴리로 살았다. 나는 폴리.
7월 중순, 오르비에토에서 하루 묵고 남부로 내려온 날 밤, 난 선물처럼 이 소설을 읽었다. 작은 호텔방 침대에 기대앉아 와이파이를 연결하고 습관처럼 내가 지나쳐 온, 혹은 곧 마주할 이탈리아 도시를 검색하다 만난 소설이었다. 첫 문장에서 ‘오르비에토’를 읽다니! 낯선 행성에서 아는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웠다. 바로 그 전날, 오르비에토 성당이 마주보이는 건너편, 그늘이 드리워진 낮은 돌의자에 기대앉아 한참 동안이나 성당과 사람 구경을 했기 때문이다.
날은 더웠고, 거리는 한산했다. 한가로운 오후에 듣는 성당의 종소리. 은은하면서도 폐부 깊이 박히는 그 소리는 영혼을 휘저은 듯 알 수 없는 향수에 빠지게 했다. 살아온 나날의 고단함과 살아갈 날들의 고독에 문득 아릿한 슬픔을 느끼다가도, 내가 서있는 그 시공간이 너무나도 평화로워 잠시 돌바닥에 누워 오수에 빠지고 싶은 충동이 일 정도였다.
휴대폰에서 그날 찍은 성당 사진을 들여다본다. 여행자 폴리의 ‘잠깐’ 추억이 존재하는 곳. 데비와 남희가 처음 만났던 곳. 순수한 사랑을 하는 데비와 “사랑이란 말이 꼭 흉기처럼 느껴져 마음 깊은 곳에서 떨었던 기억”이 있는 남희, 사진 속 성당 앞에서 선크림을 바르고 물티슈로 새똥을 닦으며 키득이는 스물세 살의 젊은 그들이 마치 현재진행형처럼 눈앞에 클로즈업된다.
<데비 챙>은 국적과 성별, 꿈마저 다른 두 남녀가 우연히 열흘간 이탈리아 여행에 동행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물론 이들은 나이가 같고, “둘 다 영화를 많이 좋아하고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고 그러면서도 충동적으로 이탈리아행 비행기표를 끊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둘의 만남은 짧았지만 곧 남희가 피렌체로 가는 기차를 잘못 타 나폴리에 내리면서 재회하게 된다. 이후 둘은 39세까지 연락을 주고받으며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살다 보면 그럴 때가 있다. 평소와 ‘나’와 다른 ‘나’가 튀어나와 내 일상을 교란하고 충동적으로 무언가를 앞서 결정할 때 말이다. 이탈리아 여행 역시 다분히 충동적으로 결정한 것임을 고백한다. 코로나 19가 아직 소거되지 않아 여행 자체가 불투명한 상태였고, 긴 여정과 비용 등 어느 것 하나 쉽게 결정할 수 없었지만, 마테가 제의를 해왔을 때 난 1초도 고민하지 않고 일단, ‘Yes!’를 외쳤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젊은 날엔 종종 이렇게 충동적이었던 것 같다. 스물 몇 살 때였을까. 4년 간이나 죽자사자 사랑했던 ‘그’에게 어느 날 문득 이별을 통보한 것, 울먹이는 ‘그’를 보며 뭔가 잘못된 것을 알았으면서도 이미 한 결정을 번복하기 싫어 차갑게 외면했던 어린 나, 그후로도 오랫동안 ‘그’에게 미안해하고 후회했으면서도 난 그 ‘충동’을 ‘충동적이지 않은 것’으로 치부하고 잊으려 했었다.
어쩌면 그때 난 그와의 ‘사랑’이 언젠가는 변하고 바래고 흩어져 내 곁을 떠날까 겁이 났던 건 아니었을까. 그 불안 때문에 벌벌 떨며 내가 ‘그’에게 먼저 상처주는 방식으로 날 괴롭히며 그 불안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데비’처럼 순수하게 사랑을 믿은 죄밖에 없던 ‘그’는 난데없는 이별로 그 젊은 날에 얼마나 힘들었을까.
소설의 앞부분은 오르비에토를 시작으로 나폴리, 폼페이, 카프리를 거쳐 팔레르모의 버스 정류장에서 이별할 때까지 이들의 23세 시절을 스케치한다. 카프리섬에서 데비는 남희에게 자기에겐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며 그 사람과 결혼해서 이곳으로 신혼여행을 올 거라고 ‘선언’한다. 카프리섬! 난 이 소설을 읽은 후 그곳에 갔다.
카프리섬은 사랑을 고백하거나 신혼여행 오기 딱 좋은 곳이었다. 붉고 보랏빛을 띤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 섬 전체가 향기로웠다. 푸른 바다 위엔 흰 배들이 포말을 일으키며 오가고, 세계 각국에서 온 연인들은 각자의 모국어로 사랑의 밀어와 찬사를 늘어놓는다. 지상 낙원, 살아서 천국을 경험하는 게 이런 것일까. 23세의 데비는 사랑하는 이와 다시 이곳으로 올 거라는 생각만으로도 얼마나 떨리고 충만했을까.
자신의 사랑에 충실한, 순수한 데비의 사랑을 ‘순진하고 촌스럽게’ 보던 남희는 이후 데비가 진정으로 그녀를 ‘한 사람의 인간으로 존중하고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아이 둘을 데리고 바닷가에 놀러 온 젊은 부부를 보며 데비는 내게 말했다. 자기도 저런 가정을 꾸리고 싶다고. 살면서 꿈이 하나 있다면 자신만의 가족을 가져보는 것이라면서 아내와 아이들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고 싶다고 했다. 너도 자라면서 외로움을 많이 느꼈니. 그렇게 따로 묻지 않았던 건, 외롭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사랑이 넘치는 가족이란 꿈처럼 대단한 목표가 아니라 공기나 물처럼 당연히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중략)
그 순간 나는 데비와 같은 꿈조차 꿔보지 못한 나를 발견했다. 안정적인 직장을 잡고 누구에게도 아쉬운 소리 하지 않고 노후까지 돈 걱정 없이 사는 것이 내 유일한 목표였기 때문이었다. 가족이니, 자식 같은 건 내게 너무 사치스러운 생각이었다. 사는 게 팍팍하니까 그런 말랑말랑한 꿈꿀 시간 없어, 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그렇게 살 자신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런 삶을 원하나, 원하지 않나,라는 질문에 나는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자신만의 가족을 가져보는 것’이 꿈인 데비나 ‘가족이니, 자식 같은 건 내게 너무 사치스러운 생각’이라고 치부하는 남희는 아마도 둘 다 외롭게 성장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남희 말대로 가족을 갖는 게 꿈일 수 없었을 테니까. 자라면서 외로웠던 데비는 ‘가족’에 대한 꿈을 꾸고, 자라면서 외롭고 힘들었던 남희는 그런 꿈조차 꾸지 못하는 어른이 되어 버렸다.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소설 속 그들의 외로웠던 유년이 이상하게 가슴아팠다. 그 이유는 내 유년 또한 그들만큼 외로웠기 때문이었을 게다.
이후 27세의 그들. 남희가 왕복 4시간의 통근시간을 참으며 입사 2년차의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 데비는 남희에게 청첩장을 보냈다. 남희는 “꿈을 이룬 것을 축하해, 데비”라고 시작하는 편지를 쓴다. 그 뒤에 남희가 쓴 글은 다음과 같다. 자신은 “한없이 날카로운 사람”이 되어가는데, 데비는 더 이상 깡마른 모습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표정에서 여유가 묻어” 나는 사람이 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데비, 나는 다시 잘못된 기차에 탔어."
데비는 자기 인생에서 무엇을 정확히 원하는지 알고 있었고, 그것을 이뤄낼 수 있다는 낙관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이 데비와 나의 결정적인 차이였다. 사람은 자기보다 조금 더 가진 사람을 질투하지 자기보다 훨씬 더 많이 가진 사람을 질투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데비를 질투할 수조차 없었다.
그런가. 나보다 훨씬 더 많이 가진 사람은 질투조차 할 수 없나. 질투는 고만고만한 사람에게만 느끼는 감정인가. 남희가 느낀 절망의 깊이를 헤아릴 수 있는 구절. 그 순간 남희는 꿈도 없이, 꿈꿀 여유조차 없이 살아온 자신의 비루한 인생을 ‘비관’했나. 자신은 또다시 잘못된 기차를 탔는데, 데비는 자신의 꿈을 이루며 착착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보며 남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러나 그들이 다시 만난 건 남희가 ‘잘못된 기차’에 탔기 때문이었다. 남희가 북부의 피렌체가 아니라 남부 나폴리행 기차를 탄 건 순전한 ‘우연’이었고, 계획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여행중이라면 피렌체든 나폴리든, 사실 어딜 가도 상관없는 게 아닐까. 살다 보면 기차를 잘못 탈 수도 있는 법이다. 잘못 탄 것인 줄도 모르는 경우도 있고, 잘못인 줄 알면서도 내릴 수 없는 때도 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어떤 선택을 하든 그때는 그것이 최선이었다는 것. 게다가 분명한 건 그렇게 잠시 무모하거나 충동적으로, 혹은 실수로 선택한 오솔길에서 내 인생의 많은 스토리가 쓰여졌다는 것이다.
2년 후 그들의 나이 29세. 끊임없이 이직을 꿈꾸면서도 “불안정한 가능성보다는 불행 속에서 익숙해지고 체념하는 편”을 택한 남희와,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과 이별을 겪는 데비의 모습을 기차의 레일처럼 나란히 내보인다.
소설을 다 읽고 나니 뭔지 모를 허무함으로 머릿속이 아득해진다. 사랑을 의심하지 않고, 꿈을 간직한 채 그것을 이뤄낼 ‘낙관’까지 갖춘 데비가 아내의 죽음을 맞는 장면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난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사랑을 믿고, 꿈을 향해 직진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행복해야 한다고. 그들이 경험하는 죽음과 이별은 납득할 수 없을뿐더러 용납하기도 어렵다. 하루하루 충만하게 살아온 선한 자들이 자신의 운명을, 신을 탓하게 하는 일만은 막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데비는 이마저도 자신에게 허락된,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며 그대로 마주하고 받아들인다. “운이 좋았지. 그녀와 만나고 사랑할 수 있었잖아.” 불행과 슬픔에 빠진 데비를 앞에 두고 흘리는 남희의 눈물은 그래서 더 가슴아프다. 소설은 38세의 데비가 재혼하고 39세에 첫아이를 낳고, 36세의 남희는 홍콩에 출장 가서 어릴적부터 사랑했던 배우 ‘장만옥’을 우연히 마주치는 장면으로 끝난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독자인 나는 이 소설을 읽고 무슨 생각을 했나. 살고 싶은 도시 ‘오르비에토’에 혹하여 읽은 소설이었지만, 읽고 나니 가슴 한쪽에 흐릿한 상처 하나가 피어오르는 것 같다. 이미 건너온 지 오래 되었건만 아직도 ‘멍’으로 남아 있는 나날들. 이정표 없이 방황하던 내 청춘의 초상을 ‘남희’에게서 본 탓일까.
남희는 데비와의 이탈리아 여행을 떠올리면 늘 양가감정이 들었다고 했다. 나의 이탈리아 여행은 아직 그리움으로 가득하다. “그 하늘이며 바다며 골목이며 노을이며” 길가에 서 있는 나무마저 아름답게 보이던 그곳에서 나 역시 남희처럼 “차가운 마음이 녹아내리던 순간”들이 있었다. 해바라기, 올리브나무, 레몬나무, 사이프러스가 가득한 아름다운 나라. 너무 아름다워 센티멘털해지는 요상한 양가감정을 느꼈던 순간들. 그 오렌지꽃 향기를 잊지 못해 난 ‘기어이’, ‘마침내’, ‘또다시’ 그곳으로 찾아갈 것만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