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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와강 May 10. 2024

인생엔 정답이 없다

영화 《엘리자베스타운》


누구나 실패한다


누구나 실패한다. 실패 한번 없이 인생을 사는 사람은 없다. 어릴적 우리는 수없이 넘어지고 또 넘어진 후 겨우 걸음마를 뗐다. 어른들은 우리가 넘어질 때마다 박수치며 격려해 주었다. 잘한다잘한다! 할 수 있어! 두 발로 서고 걷는다는 것, 이 일상적인 직립보행이야말로 사실 인류가 겪은 수많은 실패에 대한 보상이었다.     

 

대학원 다니던 시절, 난 정말 돋보이고 싶었던 교수님의 수업에서 실패한 경험이 있다. 내가 연구하려고 하는 세부전공 관련 권위자여서 다른 대학에 재직중인 그 교수님을 일부러 초빙해서 개설한 수업이었다. 그분의 수업을 듣고 싶었던 나는 내가 나서서(INFJ가 먼저 나서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학과 교수님들을 설득하고 그분을 찾아가 사정사정 부탁하여 아주 어렵게 열린 강의였다. 수업을 들으며 난 정말 행복했다. 교수님께 인정받고 싶어 내가 발표할 그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과제 준비를 위해 안 봐도 되는 자료까지 몽땅 찾아 수많은 자료를 읽고 또 읽은 후 리포트를 썼지만, 그 전날 밤을 꼴딱 새는 바람에 정작 발표할 때 난 몽롱한 가수면 상태였다. 눈꺼풀은 내려앉고 혀가 꼬이고 고개는 자꾸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며 발표를 마쳤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교수님이 뭘 질문하는지 웅웅거리는 소리만 맴돌 뿐 도통 알 수 없는 상태에서 폭망!     


그날밤 동기들과 폭음을 하며 난 이 수업을 드롭시킬 것인지 고민했다. 아예 공부를 때려치울까. 능력도 실력도 없는 내가 무슨 공부! 그러나 도망칠 곳이 없던 나는 그후 맨 뒷줄, 내 몸피를 최대한 줄여 구겨앉은 채 겨우 그 학기를 마쳤다.      


실패와 참패는 의미가 천지 차이다.     


《엘리자베스타운》(2005)는 내가 잊고 지낸 그때의 기억을 호출한 영화다. 카메론 크로우가 각본, 제작, 감독했고, 올랜드 블룸과 커스틴 던스트가 출연했다. 미국 최고의 명품기능화 연구원인 드루 베일리. 8년간 밤낮으로 신발에 매달려 모든 걸 바쳤지만, 자신이 개발한 신발이 출시하자마자 혹평과 함께 반품되자 해고당한다. 회사에 10억 달러의 천문학적 손해를 입힌, 그야말로 대실패, 참패.     


참패는 신화와 같은 거다.

듣는 사람에게 위안을 주는

타인의 패배스토리     


패배스토리의 주인공 드루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자살을 선택한다. 그러나 자살하기 직전 걸려온 전화 한 통. 아버지의 부음다. 신발에 올인하느라 집안 경조사는 물론 아버지와의 여행도 내년으로 미뤘는데 갑자기 돌아가신 거다.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하긴 누군들 내 스케줄을 배려하며 기다려주겠는가. 우리는 내일이 없는 인생을 살고 있지만, 매순간 그 사실을 잊는다.     

 

장남인 드루는 아버지의 본가가 있는 켄터키의 엘리자베스타운으로 향한다. 아버지가 그곳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유해라도 수습해 오고 그 이후에 자살해야겠다고 다짐. 영화는 오리건주에서 켄터키까지, 다시 켄터키에서 오리건으로 향하는 길 위에서 펼쳐지는, 일종의 로드무비다.      



엘리자베스타운으로 가는 비행기 안. 승객은 오직 드루 한 사람뿐이다. 여기서부터 영화의 장르는 판타지로 변한다. 승무원인 클레어는 "다정다감"이란 단어를 인간으로 구현한 비현실적 인물. 상심에 젖어 아버지와의 추억을 곱씹는 드루에게 끝없이 말을 붙인다. 엘리자베스타운은 길을 잃기 쉽다며 지도를 그려주는가 하면 숙소까지 정해준다.     


우여곡절 끝에 엘리자베스타운에 접어드니, 삭막했던 도시는 푸른 나무와 예쁜 집들로 가득하다. 모든 사람들이 집밖에 나와 드루를 향해 아버지의 본가 방향을 가리킨다. 마치 《트루먼쇼》의 엑스트라들 같다. 아버지의 본가는 이미 추도식 준비로 한창. 우리의 장례문화와 비슷한 듯 다르다. 아이들은 소리지르고 뛰고, 주방은 음식을 만드느라 분주하고,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은 웃고 떠들고 싸운다. 우리 집안에서 제일 성공한, 가문의 자랑이 왔다며 모두들 드루를 반겨주는데.     

 


웬 사람들이 이리 많은지, 가깝고 먼 친척은 물론 아버지의 첫사랑, 아버지의 육사 동기, 아버지에게 사기친 사람까지 엉켜 정신이 없을 정도로 난리굿이다. 슬퍼할 겨를도 없이 사람들에게 시달리다 클레어가 알려준 호텔에 가니, 그곳은 한 커플의 결혼식 하객들로 꽉 차 있다. 마시고 떠들고 웃고 여기도 난리부르스. 결혼식과 장례식. 인간이 살아가면서 행하는 각종의 의식들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이 결혼과 죽음을 대하는 방식이 묘하게 동일하다. 국적에 상관없이 인간이란 자고로 기쁨과 슬픔을 같이 나눠야 하는 모양이다.      


호텔방에 홀로 있던 드루는 헛헛한 마음에 클레어와 밤새 통화한다. 밤샘 통화로도 부족해 새벽에 일출을 보기 위해 만나기까지 했으니 급속도로 가까워질 수밖에. 영화는 어찌어찌 아버지의 추도식을 마친다. 본가와 사이가 좋지 않던 어머니까지 와서 추도식에서 탭댄스를 추는 기이한 풍경을 연출하고, 친척들은 그녀를 따뜻하게 받아들인다. 이렇게 죽음은 산 자들을 화해시켰다.


아버지의 유골함을 안고 집으로 향하는 드루는 클레어가 그려준 지도와 클레어가 골라준 음악을 들으며 42시간 10분간의 긴 운전을 한다. 군데군데 아버지의 뼛가루를 뿌리며 아버지와 같이하는 이별여행이다. 집으로 가기 전, 드루는 클레어가 그려준 보물찾기 같은 지도의 마지막을 따라가다 드디어 빨간 모자를 쓴 클레어를 만나며 영화는 끝난다.      



클레어는 깊은 절망에 빠진 드루에게 두 번이나 지도를 건네준, 드루의 구원자다. 클레어는 자신의 실패와 아버지의 죽음으로 상심한 드루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드루가 나아갈 길을 일러준 인물이다. 맞다. 길은 많다. 우리가 아직 가지 않았을 뿐이지. 다소 판타지적 인물이지만 살면서 날 위로하고 일으켜세우는 사람은 이렇게 단 한 사람으로 족하지 않을까 싶다. 영화에는 산만할 정도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고 그 사람들만큼 에피소드들도 많았지만, 결론은 하나.      


“인생엔 정답이 없다.”      


드루 아버지가 즐겨 하시던 말이다. 참패로 인해 죽음을 생각하던 드루에게 아버지는 자신의 죽음으로 아들의 생명을 구했다. 자신을 대신해 클레어를 드루에게 보낸 건지도 모르겠다. 결국 엘리자베스타운에 다녀오면서 드루는 클레어라는 인생의 이정표를 만났다. 사랑이야말로 살아 있다는, 살고 싶다는 가장 큰 욕망이 아닐까. 어차피 인생에 정답이 없으니 드루는 이제 자기만의 새로운 생을 살아갈 것이다.


아, 그 수업 이후 내 삶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한가? 그후 난 와신상담했다. 정말 죽도록 열심히 공부했다. 1년 후 그 교수님의 수업을 한번 더 청해 들었고, 안정적으로 발표하여 교수님께 인정받았다. 몇 년 후 난 그분을 내 **학위논문의 심사위원으로 모셨고, 결국 심사에 통과하여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실패는 쓰다. 그러나 실패해야 성공한다. 관건은 실패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다. 우리 모두 알고 있지만, 우리는 매순간 잊는다. 오죽하면 한 대학에 <실패연구소>가 있겠는가. 그 연구소에서 작년에 “망한 과제 자랑대회”가 열렸다는데, 내 인생에도 그 대회에 출품할 실패가 수두룩 빡빡이다. 아마 내 것만으로도 그 전시회장을 다 채우고 남을 것이다. 그 많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난 여전히, 이렇게 쌩쌩하게 잘살고 있다. 어차피 인생엔 정답이 없고, 아직 가지 않은 길이 이렇게도 많으니 살아갈 수밖에! ♣     



* 사진 : Daum 영화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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