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친구를 만나러 시내에 나갔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다 지친 우리는 다리도 쉬고 차도 마실 겸 카페에 들어가기로 했다. 마침 작고 이쁜 카페가 있어 들어가려다, 흠칫! 난 출입문에 붙여놓은 무언가를 보았다. 바로 “노키즈존”이라는 문구였다. 일행 중에 아이가 없으니 못 들어갈 이유는 없었으나, 왠지 난 그곳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특정 그룹을 배제한다는 것, 그게 어떤 이유에서였든 달갑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오죽 했으면 저런 문구를 붙여놨을까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다.
분명 이유는 있을 게다. 그러나 난 좀 불편했다. 사실 요즘 ‘노키즈존’은 물론 ‘노시니어존’도 많다고 들었다. 시니어도 업장마다 40세, 49세, 60세 이상 등 다양하단다. 지방 어디에는 ’노프로페서존‘까지 있었다니, 도대체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박범신이 쓴 소설 《은교》에 이런 대목이 있다. “네 젊음이 네 노력의 보상이 아니듯, 나의 늙음도 나의 과오에 의한 것이 아니다.”
차별과 배제
늙었다는 것이 혹은 너무 어린 것이 차별 혹은 배제의 이유가 될 수 있나. 만약 이걸 용인한다면 우리 사회는 더 많은 각종의 이유로 무수한 차별과 구획이 생겨날 것이다. 나와 다르거나,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모두 주홍글씨로 낙인을 찍어 차별하거나 배제하겠다, 처음부터 배제하여 불화의 싹을 잘라내겠다, 이런 마음인 것 같다. 찾아보니 ’노커플존‘, ’노래퍼존‘까지 별별 ’No’들이 다 있다. 이러다 보면 결국 마음 맞는 사람끼리만 선을 긋고 그 안에서 살게 될 터. 그렇게 선을 긋고 또 그으면 궁극에는 나 혼자 달랑 그 선 안에 들어 있게 되지는 않을까...
우리가 장애를 보는 시각도 마찬가지다. 몸이 불편한 이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불편하다. 눈총이라는 말이 있다. 독기가 오른 채 쏘아보는 눈빛이란 뜻이다. 얼마나 싫으면 눈으로 총을 쏘는지, 무섭기 짝이 없다. 왜 가뜩이나 몸이 불편해 힘든 사람들이 타인의 눈치까지 봐야 하는지, 다르다는 것이 왜 차별과 배제의 이유가 되는지 참 알 수 없다.
영화 《내 사랑》
오늘 소개할 영화는 장애를 가진 한 화가의 스토리다. 영화 《내 사랑》(원제는 Maudie, 2016)은 애슐링 월시가 감독하고 샐린 호킨스와 에단 호크가 주연을 맡았다. 캐나다 국민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는 화가 ‘모드 루이스 Maud Kathleen Lewis’의 실화를 기반으로 했다. 《해피 고 럭키》에서 깜찍발랄, 명랑쾌활한 모습을 보였던 샐리 호킨스는 이 작품에서 전혀 다른 매력을 뽐내며 명연기를 펼쳤다. 《비포 선라이즈》, 《가타카》에서 우리를 매혹시켰던 에단 호크는 말해 뭐해. 에단 호크는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읽고, 이제까지 읽은 시나리오 중 가장 아름다운 러브 스토리였다고 말했다고 한다. (스포일러 주의!)
모드는 관절염으로 다리가 불편하다. 다리가 뒤틀려 잘 걷지 못하고, 나중에는 손과 어깨까지 구부정하게 된다. 부모가 죽자 오빠는 숙모에게 모드를 맡긴 채 유산인 집을 팔아 챙긴 후 나 몰라라 한다. 숙모 역시 모드를 달가워하는 편은 아니다.
“특이하다는 이유로 싫어하는 사람도 있더라구요.”
아이들은 절름발이 모드에게 돌을 던진다. 모드는 우연히 마트에서 가정부를 구한다는 애버렛의 말을 듣고 그 집을 찾아간다. 자립하고 싶어서였다. 애버렛의 집은 들판 가운데에 홀로 오똑하니 서있는 아주 작고작은 집. 애버렛은 너무 바빠 집안일해 줄 사람을 찾았는데, 말라깽이에다 절름발이가 오자 불편하고 싫은 기색을 팍팍 낸다. 애버렛의 동료 역시 집을 지키려면 개나 총을 사는 게 더 낫지 않냐는 충고를 한다. 애버렛은 모드에게 손찌검까지 하며 이 집의 서열을 분명히 말해 준다.
나, 개, 닭, 그 다음이 당신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모가 있는 집에 가기 싫었던 모드는 그 콩알만한 집에서 버티기로 한다. 모드를 위로하는 건 그림뿐. 그녀는 창, 벽, 판자에다 끝도 없이 그림을 그린다. 그림 그릴 때만큼은 온세상이 모드의 것이다. 늘 환하게 웃는 모드. 자신을 내치지 않는, 이 무뚝뚝한 애버렛에게 모드의 마음이 서서히 기울고, 모드는 애버렛에게 청혼한다.
난 당신 좋아해요.
당신은 내가 필요해요.
숙모와 오빠가 하객의 전부인 조촐한 결혼식을 치르고, 애버렛은 생선수레에 모드를 싣고 긴 제방길을 걷는다. 행복해 보이는 모드. 그날 밤, 모드는 애버렛의 구두 위에 까치발로 올라선 채 함께 춤을 춘다. 작은 집 다락방, 호롱불이 밝혀져 있고 나지막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내일은 다시 평소와 똑같을 거야.
그래, 알아.
낡은 양말 한 쌍처럼.
그렇게 모드는 그림 그리고, 애버렛은 생선을 파는 한가로운 일상이 계속된다. 처음엔 '장애'만 보였는데, 나중엔 '사랑'만 보인다. 편견을 걷어내면 사람이 보이고,사람이 보이면 비로소 사랑하게 된다.
뉴욕에서 온 눈밝은 사람이 모드의 그림을 알아보고, 방송국에서 취재까지 나오자 모드의 그림은 유명해진다. 중간에 부부 간의 갈등과 이런저런 에피소드는 스킵. 어느날 관절염이 심해지고 폐기종까지 앓게 된 모드는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개를 몇 마리 더 키워 봐.
개 필요없어. 난 당신이 있잖아.
개를 더 키워.
결국 죽음을 앞둔 모드는 임종 직전 애버렛에게 말한다.
“I was loved.”
모드의 집 창밖으로 보이는 캐나다의 작은 시골 마을 풍경이 천국처럼 아름답다. 모드가 가장 사랑한 풍경. 이제 모드도 그 풍경의 일부가 되었다. 너무 작아 한 손으로 달랑 들어올릴 수 있을 것 같은, 아주 작은 집. 그 집엔 ‘혼자’로 살아오던 두 사람이 ‘함께’ 일군 동화 같은 사랑이야기가 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내 머릿속엔 진은영의 시 〈사랑의 전문가〉가 맴돌았다.
나는 엉망이야 그렇지만 너는 사랑의 마법을 사랑했지. 나는 돌멩이의 일종이었는데 네가 건드리자 가장 연한 싹이 돋아났어. (중략) 나는 바다의 일종, 네가 흰 발가락을 담그자 기름처럼 타올랐어.
돌멩이에서 연한 싹이 돋아나게 하는 마법, 그게 사랑이다. 바다라고 생각했는데, “네가 흰 발가락을 담그자 기름처럼” 확 불타오르는 마법, 그것이 사랑이다. 내 안에 있는지조차 몰랐던 말랑말랑한, 몽글몽글한 어떤 것을 확인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나는 요즘 돌멩이로 살아가고 있다. 해야 할 일 리스트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점점 더 딱딱해지고 있다. 돌멩이에서 연한 싹이 돋아나는 마법을, 나도 이번 생에 경험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애버렛의 생선수레를 타고 덜컹거려도 내내 행복하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