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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와강 May 24. 2024

지중해로 떠난 여자

영화 《파어웨이 Faraway》


나의 출근길은 37km. 대략 1시간쯤 걸린다. 그 사이에 두 개의 고속도로를 지난다. 수도권 제1순환도로와 영동고속도로. 귀갓길은 역순. 아침에는 제발 길이 막히지 마라 막히지 마, 하는 심정으로 커피를 들이부으며 가기 바쁘지만, 올 때는 사뭇 다르다. 퇴근길, 영동고속도로에서 안산분기점쯤 오면 세 갈래 길이 나온다. 직진은 원주, 오른쪽은 목포, 가운데 길로 접어들어 빙그르르 돌면 다시 조남분기점이다. 집으로 가는 길은 가운뎃길.


하지만 난 늘 안산분기점을 앞두고 갈등한다. 피곤한 날일수록 더 그렇다. 집은 무슨! 확 오른쪽으로 빠져서 목포로 가? 아냐, 직진해서 동해로 갈까? 그러나 결론은 늘 가운뎃길. 집으로 돌아온다. 몸이 기억하는 방향.  P턴하며 난 늘 나의 새가슴을 비웃는다. 쫄보! 쫄보! 넌 쫄보야. 넌 꽉 막힌 네모!     



비단 나뿐만은 아니리라.(그렇게 믿고 싶다.) 일상이란 그런 것. 쳇바퀴처럼 도는 게 지긋지긋하면서도 그 굴레를 쉽게 벗어나기 어렵다. 가족이 있고 할 일이 있다. 내가 아니면 지구가 멈추기라도 하듯, 내 일상은 레일 위를 달리는 기차처럼 똑같이 반복된다. 나이 드니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범한 하루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알지만, 가끔은 모든 것을 일시정지하고 일상 밖으로 쓩~ 날아오르고 싶어질 때가 있다.      


나 대신 그걸 해낸 사람이 있다. 바로 영화 《파어웨이 Faraway》의 주인공 제이네프. 바네사 요프가 감독하고, 나오미 크라우스(제이네프 역)와 고란 보그단(요시프 역)이 주연을 맡았다. 2023년 3월 넷플릭스에서 개봉한 독일 영화다.      


영화의 시작은 어느 가족의 아침 풍경이다. 아침부터 아버지는 빨래를 아무데나 던지며 깐죽대고 독설을 내뱉고, 남편은 장인 목조르는 장난을 치고, 딸은 연신 투덜거린다. 여느때라면 그러려니 한다 쳐도, 이날은 바로 제이네프의 어머니 장례식 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밥 차리고 준비하는 49세의 제이네프. 그 한 장면이 주인공 제이네프의 삶의 이력을 요약해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여자의 삶이라고 일반화시키고 싶진 않지만, 답답한 건 어쩔 수 없다.      


어머니의 장례식에 가는 길, 위층에 사는 변호사는 어머니가 생전에 맡겨두었다며 제이네프에게 서류 봉투를 하나 내민다. 열어보니 크로아티아의 집문서와 일기. 어머니가 크로아티아 출신인 걸 알았지만 그곳에 집을 사두었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 상태여서 그녀는 몹시 놀란다.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하기로 한 남편은 오지 않았다. 식이 끝나자마자 남편이 운영하는 식당에 가보니 새로 온 어린 여성셰프와 히히덕거리고 있다. 결국 폭발한 제이네프는 그 길로 차를 몰아 크로아티아로 향한다. 독일에서 크로아티아까지 자동차, 배, 버스를 갈아타고 다시 걸어걸어서 faraway 어머니의 집이 있는 곳에 도착했을 땐 이미 깜깜한 밤. 어머니의 유산이 된 집은 지중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높은 언덕에 있다. 아침에 일어나니 그녀 곁에 낯선 사내가 있다. 알고 보니 어머니가 그 집에서 살게 허락해 준 남자.     



여기서부터는 여느 로맨틱 코미디와 똑같은 클리셰가 펼쳐진다. 제이네프와 그 남자 요시프가 티격태격 싸우고 삐치다 정든다는 스토리. 이 집을 리모델링해 에어비앤비를 운영할까 팔까 고민하던 제이네프는 결국 그곳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로 한다. 일상을 떠나 낯선 어머니의 고향에서 제이네프는 어머니의 삶을 이해하고, 그곳으로 자신을 찾아온 딸의 고민과 속내를 들으며 딸과도 화해한다. 여성 3대의 아름다운 끈. 그 연결이 아름답다.


이 영화에 액센트를 준 건 봐도봐도 또 보고 싶은 크로아티아의 풍경, 지중해의 아름다움이다. 나도 꼭 가보고 싶은 나라 중 하나인데 아직도 가지 못해 기대가 점점 커지고 있다. 매년, 올해는 꼭 가리라 다짐하는데 언제 가볼까나...


하나 더 꼽자면 제이네프 역을 맡은 나오미 크라우스의 존재감이다. 아파트 집집마다 달린 문을 열어젖히면 금방이라도 수많은 제이네프가 튀어나올 것만 같을 정도로 현실적인 중년 여성 캐릭터를 잘 소화해 냈다. 그러나 집을 벗어난 그녀는 영화 전체가 1인극이라고 봐도 될 만큼 스토리와 화면의 중심을 차지한다. 크로아티아에 있는 동안 그녀는 점점 더 젊고 예뻐 보인다. 감정에 솔직하고 잘 웃는, 빨간 원피스가 잘 어울리는 사람, 제이네프.

   


뻔한 스토리인데 영화를 보고 나면 이상하게 기분이 좋다. 눈가에 남는 잔상도 아름답다. 나 대신 누군가가 일상을 박차고 떠나는 것을 지켜보며 대리만족을 느끼기도 한다. 그녀의 일탈을 응원하며, 그녀가 떠났다면 나도 언젠가 떠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가져본다. 갑자기 오래된 노래 한 구절이...


떠나자 지중해로

잠든 너의 꿈을 모두 깨워봐

나와 함께 가는 거야 늦지는 않았어

가보자 지중해로

늦었으면 어때 내 손을 잡아봐

후회 없이 우리 다시 사는 거야(박상민의 〈지중해〉1999)


내일 아침 일찍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슬며시 물어봐야겠다.

“엄마, 혹시 서해나 남해 쪽에 작은 섬 하나 사둔 거 없수? 무인도라도 괜찮아. 아냐아냐, 뭐 손바닥만한 집이라도 좋지. 잘 생각해 보셔~.”  ♣            



* 지도 그림 출처 : 카카오맵

  사진 출처 : Daum 영화 정보, https://lalagongjoo.tistory.com/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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