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의 〈자화상〉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하략)
― 〈자화상〉(1939)
애비는 종이었다
우리 문학사에 등재된 작품 중 이보다 더 강렬한 서두를 가진 작품이 있을까. 서정주의 〈자화상〉을 처음 읽던 날, 첫 행을 읽자마자 온몸에 흘렀던 전율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문학 작품 속 단 한 문장이 독자의 폐부에 박히며, 매혹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는 건 실로 놀라운 일이다.
태어나 보니 종의 자식. 운명에 순종하거나 체념하는 게 아니라 보란듯이, 마치 도전장처럼 자신의 신분을 첫문장에 까발리는 당돌함. 화자는 자신의 부모를 '애비', '에미'로 비하하며, 자신이 할아버지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비천한 종의 집안, 반골 자식임을 만천하에 공표한다. 불온하고 불길한 기운에 더해지는 독기.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살기 띤 눈빛과 꼭 다문 입. 화자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바람의 속성은 멈추지 않는 것. 흘러가는 것, 떠도는 것,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끊임없이 옮겨가는 것. 정주하지 않은 채 떠도는 방랑과 방황이 지금의 화자를 있게 했다. 가도가도 부끄러운 세상 속, 정작 자신은 아무런 수치도 두려움도 뉘우침도 하지 않는다. 때로는 세상에 공격적인 살기를 띠고, 때로는 바보천치처럼 세상을 외면하며 떠도는 것, 그것이 바로 화자의 삶이었다.
언젠가 문학 수업 시간에 이 시를 강의하며 학생들에게 '바람'을 대신할 자신만의 단어를 써넣으라는 과제를 내준 적이 있다.
나를 키운 건 팔할이 ( )이다.
돈, 여친, 술, 부모의 사랑, 욕망 등 학생들은 저마다 이런저런 단어들을 선택했지만, '바람'과 비슷한 속성을 쓰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를 있게 한 팔할은 무엇일까 자문해 본다. '....고독', 내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른 단어다. '결핍'도 있다. 언젠가 백석 시를 언급하며 썼던 '외롭고 높고 쓸쓸한', 소월의 시처럼 '저만치 혼자', 기형도의 '질투는 나의 힘'도 있다. 그런 것들이 모여 나를 키웠다. 난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하면서도 늘 반 보쯤 옆으로 비껴 서 있었던 것 같다. 그건 그들이 아니라 철저히 내 문제였다. 쉽게 어울려 한통속이 되지 못하고, 늘 문지방을 밟고 경계에 서 있는 것, 어쩌면 그게 내 속성일지도 모르겠다.
경계에 대한 생각은 요즘 더 심해졌다. 지금 내 상태는 '리미널리티(liminality)'. '리미널리티'는 '문지방'을 의미하는 라틴어 '리멘(limen)'에서 유래한 것으로, 문지방에 서 있는 것처럼 전 단계를 벗어났지만 다음 단계로 진입하지 못한 일종의 애매성의 시기와 영역을 의미한다.(Victor Turner) 더는 이전 방식으로 분류되지 않지만, 아직 새로운 분류 방식도 찾지 못한, 일반적인 분류 체계 밖에 존재하는 상태. 동시에 모든 것이 뒤죽박죽된, 전혀 양립할 수 없는 것이 합치되어 괴상한 통일을 이루는 때이기도 한다.
리미널리티,
이것도 저것도 아닌, 혹은 둘 다인 모호한 혼돈과 무정체성의 상태
이사하고 한 달이 다 되어가지만 난 여전히 이쪽도 저쪽도 아닌, 경계에 서 있는 느낌이다. 낯선 공간이라 쉽게 잠들지 못하고, 간신히 든 쪽잠에서 깰 때마다 여기가 어딘지 방향과 공간 감각을 상실하고 허둥댄다. 떠나온 곳을 잊지 못하고, 새로 이사한 곳에 닻을 내리지도 못한 어정쩡한 상태. 퇴근할 때마다 내비게이션의 '우리집'이 어디인지 잠시 멈칫하고, 온라인 주문을 할 때마다 새로 수정한 내 집 주소가 낯설어 몇 번이나 들여다보는 혼돈. 그래서인가, 지난주는 브런치 연재글을 쓰기도 어려울 만큼 내내 아팠다.
찬란히 틔어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트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난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인장처럼 확고하게 자화상을 써내려간 〈자화상〉 속 화자가 부럽다. '애비가 종'이면 어떠랴. 인생의 대부분을 '바람'처럼 떠돌며 살아왔어도 자신이 누구인지 똑똑히 안다는 건 중요한 일이다. 나 역시 시적 화자와 똑같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트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살아왔건만, 난 아직도 내가 누구인지 선언하기 어렵다. 내 자화상을 그리기는커녕, 지금 당장은 그저 이 지긋지긋한 리미널리티에서 벗어나 '바람'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가기만을 바랄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