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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 not bend

장류진의 〈탐페레 공항〉

by 바다와강

장류진은 〈일의 기쁨과 슬픔〉(2018)으로 잘 알려진 작가다. 〈일의 기쁨과 슬픔〉은 창비 웹에 올렸을 때부터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더니 무료공개 2주 만에 15만 명, 총 40만명이 이 소설을 읽는 바람에 창비 홈페이지 서버를 다운시킨 문제작이었다. 작가는 2019년, 이 소설을 포함 8편의 단편을 묶어 작품집 《일의 기쁨과 슬픔》을 출간했다. 이 소설들은 작가의 판교 IT회사 근무 경험을 바탕으로, 웃픈 직장인들의 현실을 디테일하게 묘사했다. 워라밸, 소확행, 욜로, 덕질을 중시하는 2,30대 여성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 그의 소설들은, 일의 '기쁨'은 잃어버리고 일의 '슬픔'만 만연한 한국사회의 직장문화를 하이퍼 리얼리즘으로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일의 기쁨과 슬픔》 맨끝에 실린 작품이 바로 〈탐페레 공항〉이다. 다른 소설들에 비해 존재감이 별로 없는, 왠지 작품집 한켠에 숨어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소설이다. 그래서인가 〈탐페레 공항〉은 그의 작품집 전체 톤과는 다른 주제를 담고 있다. 원래 장류진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감각이자 기준은 바로 '돈'이다. 사람의 가치도 돈으로 환산한다. 그러나 〈탐페레 공항〉은 사람에게는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무엇'의 가치가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 예외적이다.


소설 속 '나'는 스펙, 학교, 학점 모든 것이 평범한, 가난한 여대생이다. 중학교 시절부터 다큐 PD를 꿈꿨으나 현실은 녹록하지 않다. 남들 다 간다는 해외연수는 꿈도 꾸지 못한 채 워킹 홀리데이를 가기로 결정했지만, 비행기 값을 마련하는 데에만 한 학기가 걸렸다.


나에겐 고심 끝의 결정이자 엄청난 도전이고 인생의 특별한 이벤트였는데, 다 준비하고 나서 보니 결국 남들이 한 번씩 해보는 걸 나도 똑같이 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는 게, 유행의 일부일 뿐이라는 게, 그저 준비운동을 마친 것일 뿐이라는 게, 조금은 씁쓸하게 느껴졌다.


소설은 아일랜드에 워킹 홀리데이를 하러 가는 길, 가장 싼 저가항공을 예매한 탓에 5시간 가량 핀란드 탐페레 공항에서 경유하게 되는데, 그때 만난 '얀' 할아버지와의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다. 얀은 전직 사진기자 출신으로 90세가 넘은 지금도 사진작가를 하고 있다. 나는 얀에게 다큐 PD가 되고 싶다는 꿈을 얘기하고, 얀은 이를 적극 지지한다. 나중에 오로라 찍으러 꼭 핀란드에 오라며, 자신의 카메라로 직접 내 사진까지 찍어준다. 얀은 내가 알려준 주소로 오로라가 그려진 엽서와 함께 내 사진을 보내주었었다.


나는 워킹 홀리데이를 마치고 돌아온 후, 그 엽서를 책상 앞에 붙여놓고 다큐 PD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쓰러지고 어머니가 생계를 꾸리게 되자, 결국 난 꿈을 포기하고 일반회사에 취직하고 만다. 책상 앞에 붙여놓은 오로라 엽서를 볼 때마다 포기한 꿈이 생각나 결국 뜯어버리지만, 엽서를 뜯은 자리에 남은 테이프 자국들이 마치 오래된 상처인 양 내 마음을 계속 할퀸다.


나는 알고 있었다.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후회하는 몇 가지 중 하나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애써 다 털어버렸다고 생각했지만 내 안 어딘가에 끈질기게 들러붙어 있고, 떼어내도 끈적이며 남아 있는, 날 불편하게 만드는 그것. 내가 그것을 다시 꺼내는 데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고 꺼내서 마주하게 되더라도 차마 똑바로 바라보기는 힘들 거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 야근하다 저녁을 먹기 위해 들른 식당에서 저녁 뉴스 화면 아래로 지나가는 신입 PD 채용 공고자막을 본 나는 회사에 돌아오자마자 홀린듯 이력서와 자소서를 쓰게 된다. 모든 걸 포기하고 그냥 안정된 생활에 만족하며 지내면 될 것을, 잊고 접으면 될 것을, 무엇이 나를 또다시 들뜨게 하는 건지. 자소서를 쓰다 말고 귀가한 나는 6년 전 얀이 보낸 봉투를 찾아낸다. 그 봉투에 쓰여 있는 글.


Do not bend


(Photo inside). 얀이 쓴, 사진이 들어 있으니 구부리지 말라는 부탁의 글이다. 타국으로 멀리 가는 사진이 행여 구겨질까 시리얼 상자를 사진 뒤에 덧대기까지 했다. Do not bend. 나는 그 문장을 보자마자 울음을 터트린다. "심장이 물에 뜬 듯" 출렁이는 것 같을 정도로 힘들다. Do not bend의 표면적 의미는 사진을 구부리지 말라는 얘기겠지만, 그 말이 내게는 "지금 너,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너의 꿈을 구부리지 마. 포기하지 마."로 들렸을 게다.


우리는 종종 돈이나 시간, 또는 상황을 핑계로 정작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거나 접는다. 그리곤 합리화한다. "그땐 어쩔 수 없었어." "누구라도 아마 그랬을걸." "난 괜찮아." "다 지난 일인걸..."


누구에게나 이루지 못한 꿈이 있을 게다. 그걸 잊고도 아무렇지 않게 잘 살아갈 수 있다면, 그럼 그렇게 살아가면 된다. 그러나 저녁을 먹다가 우연히 본 뉴스 자막의 채용공고처럼, 벽에 붙여놓은 오래된 테이프 자국처럼, 가끔씩 무언가가 예고없이 불쑥 튀어나와 내 심장을, 내 영혼을 교란시킨다면, 그건 쉽게 포기하거나 잊을 수 없다는 거다.


어차피 짧은 인생, 해보고 싶은 꿈이 있다면 해봐야 하지 않을까. 손톱 밑의 거스러미처럼 날 불편하게 하고, 신경쓰이게 하고, 사라지지 않는 게 있다면, 어.떻.게.든. 하.는. 게. 맞.다. 하.고. 싶.은. 건. 하.며. 살.자. 그래야 후회가 없다. ♣



※ 장류진이 최근에 출간한 산문집 《우리가 반짝이는 계절》(2025)에는 작가가 2008년 교환학생으로 핀란드에 머물던 시절의 이야기가 나온다. 소설 〈탐페레 공항〉 뒷얘기도, 이 소설에 대한 작가의 애정도 아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관심있는 분은 읽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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