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기억하오 난 추억하오

고성현의 〈시간에 기대어〉

저 언덕 넘어 어딘가
그대가 살고 있을까
계절이 수놓은 시간이란 덤 위에
너와 난 나약한 사람

바람이 닿는 여기 어딘가
우리는 남아있을까
연습이 없는 세월의 무게만큼 더
너와 난 외로운 사람

― 고성현의 〈시간에 기대어〉

꽃이 진 자리에 푸르른 나뭇잎들이 돋아나고 있다. 정직한 시간의 흐름 앞에 무참히 봄이 떨어지고 있다. 나뭇잎들은 아기주먹처럼 웅크렸다가 점점 손바닥을 펼친 모양으로 자신의 영역을 넓혀가는 중이다. 연두에서 초록으로 시간이 물들어간다. 꽃이 져도 우리는 그 꽃의 흔적을 기억한다. 꽃샘추위 속에서 그 꽃이 얼마나 힘차게 꽃봉오리를 터뜨렸는지, 한때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모두 기억하고 추억한다.

난 기억하오 난 추억하오
소원해져버린 우리의 관계도
사랑하오 변해버린 그대 모습
그리워하고 또 잊어야하는
그 시간에 기댄 우리

〈시간에 기대어〉(최진 작사 작곡, 2016)는 세계적인 바리톤 고성현의 노래다. 오늘같이 비오는 아침에 그의 노래는 커피만큼 날 깨우고, 또 채워준다. 깊고 웅숭스런 목소리가 폐부 깊숙이 박힌다. 내 마음속에 저인망 그물을 내린 듯, 그의 목소리는 가늠할 수조차 없는 깊이로 내려가 내 마음을 한바탕 헤집어 놓는다.

유음을 계속해서 발음하듯, 미끄러지듯 온몸을 휘감아 흐르는 그의 바리톤은 가히 하늘이 준 선물 같다. 노래를 듣는 동안, 나는 그 목소리를 타고 과거에서 더 먼 과거까지 순식간에 이동한다. 힘을 잃은 육체는 그저 넋놓고 시간에 기대어 있을 수밖에 없다. 내 영혼마저 잠시 길을 잃는 시간여행이다.

고성현은 유튜브 '전과자' 성악 수업 중 스피커를 터뜨릴 만큼 폭발적인 성량을 보유한 오페라 가수다. 세계 유명 극장에서 500회 이상 오페라의 주연을 맡은 바 있는 가수, 사람들은 그를 '드라마틱 바리톤', '대포 바리톤'이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그의 노래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가 〈시간에 기대어〉와 〈인생이란〉(2015)이다. 이 두 곡의 노랫말에는 한때 사랑하고 이별하고 그리워하고 추억하는, 인간관계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그래서인가 봄여름가을겨울 없이 어느 계절에 들어도 좋다. 감미로운 쓸쓸함.

사랑하오 세상이 하얗게 져도
덤으로 사는 반복된 하루가
난 기억하오 난 추억하오

기억과 추억은 어떻게 다를까. 기억이 단순히 잊지 않고 보존해 두는 거라면, 추억은 지난 일을 다시 생각해 보고 곱씹어 보는 행위다. 물론 기억이나 추억 모두 시간이 개입한다. 둘 다 혼용해서 쓰이기도 한다. 단지 기억보다 추억에 감성이 한 스푼 더 얹혀진 것 같은 느낌이다. 기억이 머리에 쌓아두는 것이라면, 추억은 마음에 담아두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떤 일들은, 혹은 어떤 장면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도 기억 속에 박제된 것처럼 환하게 떠오르곤 한다. 짧지 않은 인생에 몇몇 그런 국면들이 있었다. 대개는 '가장'이라는 최상급이 붙는 일들이 그렇다. 가장 아름답거나, 가장 고통스럽던 기억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가공되고 윤색되는 것들, 그 시간에 기대어 나이테를 더해 가는 추억들.

기억을 지우면 인간에게 대체 뭐가 남을까. 내가 당신을 기억하지 못하면, 우린 이 지구별에서 얼마나 외롭고 힘들까.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기억하지 못한다면 나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까. 우린 누군가를 만나 높은 성을 쌓고, 부수고, 또 쌓으며 살아왔다. 우리 앞에 놓였던 매 순간에 충실했고, 때로는 순간들을 연결하고 그 연결의 시간을 기억했다. 기억이 없다면 추억도 없고, 그러면 사랑도 증오도 없을 것이다.

인생이란
이런 건가 봐요
영원이란 것은 없는 것
헤어지고 시간 흘러
다시 사랑하다가 또 헤어짐

― 고성현의 〈인생이란〉

"연습이 없는 세월의 무게"를 견뎌온 우리는 나약하고 외로운 사람이다. 만나고 헤어지고, 때로는 그리워하고 때로는 잊으려 하는, 그 평범한 하루하루의 시간들이 우리를 지금 여기까지 데리고 왔다. 인생이란 이런 건가 보다. 노력해도 애써도 사랑해도 헤어져도 기억해도 잊어도, 결국 영원이란 없는 것, 그렇다면 그저 시간에 기대어 사는 수밖에. ♣

https://youtu.be/XGapfkyfz94?si=xkXg6lu-hLa1v5I5

https://youtu.be/AB-Bo4PUNk8?si=WsGig0nW3fX7mQq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