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세의 〈옛사랑〉
남들도 모르게
서성이다 울었지
지나온 일들이 가슴에 사무쳐
텅빈 하늘 밑 불빛들 켜져가면
옛사랑 그 이름 아껴 불러 보네(중략)
이젠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내 맘에 둘 거야
그대 생각이 나면
생각난 대로 내버려 두듯이
― 이문세의 옛사랑
이문세의 〈옛사랑〉은 1991년 "이문세 7집 VII" 수록곡으로, 이영훈이 작사작곡을 했다. 이문세 특유의 중저음으로 "남들도 모르게~" 하고, 읊조리듯 시작할 때마다 가슴 한구석에서 뭔가 쿵~!하고 떨어져 내리는 느낌을 주는 곡이다.
누구에게나 지나간 옛사랑 하나쯤은 있다. 더러는 잊고 몇몇은 기억하는 아련한 것들. 그러나 아주 잊었다 싶다가도 어느 순간 뇌관 하나만 슬쩍 건드리면 여지없이 다시 튀어나오는 불사의 기억들. 가장 좋은 건 노랫말처럼 그리우면 그리워하고, 생각나면 생각난 대로 그저 내버려두는 일일 것이다.
내일 난 30년간 살던 이 집을 떠난다. 오랜만의 이사. 나는 아직 이 집과 이별할 결심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별은 기정사실. 이별하지 않았는데 난 벌써부터 그리움에 몸을 떨고 있다. 떠나는 순간부터 난 내내 이곳을 그리워하고 반추할 것이다.
난 원래 익숙한 것을 선호하는 사람이다. 편한 사람들만 만나고, 가던 곳만 줄창 간다. 마음의 개폐가 쉽지 않다. 이런 나를 30여 년간 따뜻하게 품어준 이곳은 내게 토포필리아(Topophilia)다. 토포필리아는 특정한 장소에 정서적 유대감이나 사랑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그곳에만 가면 행복하고 그것을 떠올리기만 해도 편안한 느낌이 드는 곳. 보통사람들에겐 고향일 테지만, 난 바로 이곳이다.
30년을 살면서 나는 매일 이곳을 사랑했다. 봄여름가을겨울, 이곳에서 함께 한 모든 계절이 좋았다. 모든 계절의 풍경이 아름다웠고, 그 풍경을 사랑했다. 퇴근길, 저 멀리 관악산이 보이는 순간 온몸의 긴장이 풀린다. 일터에서 벗어나 일상으로 돌아온 느낌. 우리 마을의 이정표 역할을 하는 성당 첨탑이 보이면, 난 그 어떤 것보다 이곳에 깊은 유대를 느낀다. 내 공간으로 돌아왔어. 나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사람들 곁에 선 것만큼이나 공간에 큰 위로를 받는다. 안도한다.
김정운은 《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2019) 프롤로그에서 '슈필라움 Spielraum'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슈필라움'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율의 공간'을 뜻한다. '물리적 공간'은 물론 '심리적 여유'까지 포함하는 단어이다. 아마도 내게 이곳은 나의 슈필라움이었던 것 같다.
난 이곳에서 청춘을 살았다. 이곳에서 난 비로소 어른이 되었다. 공부하고 일하고 아이 키우고 돈을 벌었다.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사랑했고 이별했다. 감히 내 인생의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이번 이사는 자의가 아니다. 너무 오래 되어 언제 붕괴될지 모르는 낡은 아파트는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져야 한단다. 오후에 마지막으로 주변을 산책했다. 아파트 산책로에 서있는 나무들은 내가 이곳에 오기 전부터 있었고, 그 이후로도 나와 함께 30년을 더 자랐다. 나무들과 나는 이곳에 뿌리를 내린 채 서로의 성장을 지켜보았다. 나와 희노애락을 함께 한 저 나무들은 이제 어디로 갈까.
이문세의 〈옛사랑〉을 들으며 이별의 슬픔을 예감한다. 이제 7시간이 지나면 긴 사다리차를 앞세운 이삿짐 트럭이 요란하게 아파트 주차장으로 들이닥칠 게다. 집만큼이나 낡고 오래되어 누추한 나의 이삿짐들은 네모난 플라스틱 박스에 담겨 어디론가 배달될 것이다. 그곳에서 난 낯가림을 하며 한참을 숨죽여 살게 될 터. 살면서 내내 이곳을 그리워할 게 분명하다.
그리우면... 그리운 대로 내 맘에 둘 거고, 생각나면... 생각난 대로 내버려둘 거다.
나의 토포필리아, 나의 슈필라움이었던 과천, 고마웠어. 안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