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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암만 밝아도 쳐다볼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김소월의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by 바다와강


봄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울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달아 암만 밝아도 쳐다볼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제금 저 달이 설움인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개벽》 1923.5


시인 김소월.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모를 수 없는 이름이다. 〈진달래꽃〉, 〈산유화〉, 〈초혼〉,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개여울〉 등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줄줄 나오는 그의 시 목록들이 시인으로서의 그의 위상을 말해 준다. 그러나 1902년 출생해서 1934년, 만 32세로 사망할 때까지, 그의 삶은 그다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일제 강점기에 시인으로 산다는 것은, 미치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소월은 3살 때 아버지가 일본인에게 맞아 정신이상자가 되자 집안은 쪼들리기 시작하였다. 할아버지의 후원으로 오산중학교, 배재고보에서 수학했지만 집안은 점점 쇠락해 갔다. 처가의 도움으로 일본 유학을 떠나기도 했지만 학자금 문제로 인해 결국 유학을 떠났던 바로 그해인 1923년 귀국하고 만다. 할아버지 광산사업을 돕다 그것마저 망하자 신문지국을 운영했지만, 그 역시 여의치 않아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다고 한다.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 대로 한 세상 지내시구려
사노라면 잊힐 날 있으리다 (중략)
―〈못 잊어〉, 《개벽》 1923.5


1925년, 1920년부터 쓰기 시작한 시들을 하나둘 모아 시집 출간을 꿈꾼 소월. 그러나 소월의 첫번째 시집이자 생전 유일한 시집인 《진달래꽃》(1925)은 출간 의뢰한 출판사들이 모두 거절하는 바람에 자비출판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소월은 술과 아편에 의지해 살다가 1934년 뇌일혈과 아편 중독으로 사망했다. 아편 중독 때문에 몇몇 자료에는 그의 죽음을 음독자살로 기록하기도 했다.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중략)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개여울〉, 《개벽》 1922.7


그의 생을 알고 나면 그의 시가 더욱 쓸쓸해진다. 그의 대표작들은 주로 20대 초반에 쓰여졌다. 소월은 시를 통해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과 상실을 노래했겠지만, 내가 그의 시를 읽으며 느끼는 정서는 안타까운 '시인 김소월'에 관한 연민이다. 유년시절부터 그가 본 정신이상의 아버지는 그에게 부재보다 더 큰 존재의 비극과 상처를 주었을 것이다. 게다가 나라를 잃고 아비를 잃은 소월이 무엇인가 해보려 할 때마다 발목을 잡은 끔찍한 가난. 이도저도 못하면서 그의 시는 '무엇'을 향한 그리움과 한으로 가득차 올랐을 것이다.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는 꽃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적은 새요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산유화〉, 《진달래꽃》(1925) pp.202-203 수록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천재 시인 김소월. 이상하게 그의 시를 읽고 있으면 단조의 구슬픈 리듬이 입안에 맴돈다. 그래서인가 〈진달래꽃〉을 비롯 20여 편이 넘는 그의 시들이 가곡과 대중가요로 재해석되어 노래가 되었다.


올해는 《진달래꽃》이 출간된 지 꼭 100주년이 되는 해다. 문학평론가 정과리는 "한국의 현대시는 1925년에 출현하였다"라고 선언했을 정도로 《진달래꽃》은 문학사적으로 의미있는 시집이다. 김소월은 한국시인협회가 선정한 한국 현대시 10대 시인 중 1위로 뽑혔고(2007), 《진달래꽃》은 시 전문 계간지 《시인세계》가 평론가 75명의 설문을 받아 선정한 한국 대표 시집 중 역시 1위를 차지했다(2012). 《진달래꽃》은 2011년 현대 문학 서적 가운데에서는 처음으로 등록문화재(제470호)에 오르기도 했다.


먼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민족시인이다, 전통시인이다, 국대시인이다, 사실 이런 수식이 다 무슨 소용이랴. 살아 생전 많은 독자들이 그의 시를 알아보고 그를 추앙했더라면 좀더 오래 우리 곁에 있지 않았을까. 우리 곁에서 우리의 고통과 슬픔을 읽고, 우릴 대신해 노래하거나 위로해 줄 수 있었을 텐데... 먹먹한 생각이 든다.


마음 둘 곳 없이 방황하던 식민지 지식청년 김소월. 100년 전 자신의 첫 시집을 받아들고 감격했을 시인 김소월. 조곤조곤 속삭이고, 쿨하게 이별을 수긍하는가 싶다가도, 때로는 사무치는 슬픔을 어쩌지 못해 차갑게 돌아앉는 그의 시들. 처연하게 아름다운 시들. 그러나 소월에게 '시'는 당대를 살아내기 위한, 자신을 지키기 위한 치열한 생존의 현장이었을 것이다.


지천이 꽃이다. 꽃에 문외한인 나는 철쭉과 진달래를 구별하지 못한다. 붉은 꽃은 그냥 다 '진달래'다. '진달래꽃'은 내게는 '김소월'과 동의어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오늘 아침 출근길, 연구실이 있는 건물 입구에 가득 피어 있는, 붉은빛 꽃들을 보았다. 난 문득 아, 올해도 소월이 진달래로, 꽃으로 내 곁에 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나 역시 이렇게 화창한 봄날, 말없이 그를 보내드리지 못하고, 봄마다 소월을 호명하고 그를 그리워할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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