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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

유병록의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

by 바다와강


우리
이번 봄에는 비장해지지 않기로 해요
처음도 아니잖아요

아무 다짐도 하지 말아요
서랍을 열면
거기 얼마나 많은 다짐이 들어 있겠어요

목표를 세우지 않기로 해요
앞날에 대해 침묵해요
작은 약속도 하지 말아요(하략)

―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


유병록의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는 같은 제목의 시집(2020)에 실린 시다. 이번 봄에는 아무런 다짐도 약속도 하지 말고, 침묵하며 그저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삶은 계획의 연속, 바닷가에 쌓은 모래성처럼 무언가를 쌓았다 부쉈다 하는 게 인생이다. 바둥거리고 안간힘쓰며 살아도 늘 제자리지만. 그래도 아침이면 또 똑같은 꿈을 꾸고 어제의 일을 반복한다. 그런데 시인은, 이번 봄에는 다짐도 목표도 약속도 하지 말자고 한다.


난 출근하면 그날의 'To do list'를 적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 1번부터 차근차근 적다보면 어떤 날은 작은 메모지를 훌쩍 넘길 때도 있다. 일의 선후와 경중을 따져 순번을 매기기도 한다. 할일은 아주 자질구레한 것들도 모두 적는다. 그래야 완결된 일을 붉은 펜으로 체크할 때 보람을 느끼기 때문이다.


오늘은 7번까지 적었다. 이 일은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커피를 마시며 최대한 천천히 한다. 아침의 이 시간이 나에게 집중할 수 있고, 고요한 기쁨을 만끽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기획한다는 건 기분좋은 일이다. 하물며 내 일상을 기획하고 편집하는 일인데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가만.... 이렇게 쓰다 보니, 할일들을 쭈욱 나열하고 순번을 매기고 그걸 해나가는 게 그렇게도 기분좋을 일일까...하는 생각이 든다. 툭하면 어제 하지 못한 일이 하나둘씩 오늘로 이월되고, 오늘 할일은 그것대로 쌓이는데... 할일들이 쌓이면 마음이 바쁘고 머릿속이 시끄러워진다. 놀 때도 잠잘 때도 마음 한켠엔 늘 불안과 걱정이 떨쳐지지 않는다.


유병록 시인은 이번 봄에는 '비장'해지지 말자고 한다. 아무 '다짐'도, '목표'도 세우지 말고, 작은 '약속'도 하지 말자고 한다. 사실 하루 일과도 내 맘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은데, 인생이 어디 내 맘대로 되겠는가. 모든 일이 계획대로 되지 않고, 다짐도 장담도 무용해질 때가 있다.


다짐은 허망하더라
너를 잊지 않겠다 장담하였는데

세월 가더라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이면 퇴근하고
휴가도 가더라 (중략)

사랑은 숨이 끊어질 때가 아니라
기억에서 사라질 때 비로소 죽는 거라는 말
자꾸 새겨도

너를 기억하지 않고 지나는 하루도 있더라 (중략)

장담은 허망하더라
허망조차 허망하더라

― 〈장담은 허망하더라〉중에서


봄이에요
내가 그저 당신을 바라보는 봄
금방 흘러가고 말 봄


당신이 그저 나를 바라보는 봄
짧디짧은 봄

우리 그저 바라보기로 해요

그뿐이라면
이번 봄이 나쁘지는 않을 거예요


체크리스트를 쓰느라 동동거리지 않고, 목표한 일을 해내느라 쫒기지 않고, 그저 느긋하게 사랑하는 사람만 바라보며 이 봄을 즐길 수만 있다면 그 얼마나 행복하랴. 당신의 머리 위에 사뿐 내려앉은 벚꽃잎과, 당신의 눈동자에 가득 찬 내 얼굴을 번갈아 보는 일, 그것처럼 기분좋은 일이 있을까.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그저 잠시 쉬는 것뿐이고, 조금 천천히 가는 것뿐인데...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애써 다짐하지 않아도 꽃은 피고지고, 굳이 약속하지 않아도 연둣빛 잎사귀들은 뽀사시하게 제 몸피를 키워나간다. 그 느릿하고도 정직한 시간의 흐름을 바라본다. 나도 그 흐름을 타고 하염없이 미끄러지고 싶다.


자연처럼,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봄은 야속하게도 너무 찰나적이라 그 봄스러운 자태를 미처 다 감상하기도 전에 사라지려 한다. 4월의 한복판. 봄도, 인생도 너무 짧다. 나도 자연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대로 살고 싶다. 하여 이번 주말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주 무료하고 권태롭게 보내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앗, 또 다짐... 정녕 난 다짐쟁이인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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