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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십자가' 해설과 감상

- 게쎄마니 동산의 고뇌와 결단

by 느티나무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 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속죄양 모티프

원래 속죄양이란 고대 유대지역에서 속죄일에 많은 사람의 죄를 씌워 황야로 내쫓던 양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후로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지는 사람이나 그러한 행위를 비유해서 쓰는 용어로 사회, 문학 전반에 걸쳐 사용되고 있다. 보다 넓은 의미로는 희생양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중략) 문학 작품에 등장하는 속죄양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떠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자신을 희생하여 보다 큰 공동체의 미래를 열어주는 자기희생의 과정으로 이해되곤 한다. 희생양이 되는 존재는 그 스스로 속죄양으로의 길을 선택한 것이며 이는 사회적 원한, 적개심의 표출이 아니라 공동체에 대한 사랑과 자비에 기반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한림학사, '통합논술 개념어 사전' -


나는 이 시를 읽을 때마다 다음 성경 구절이 떠오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게쎄마니라는 곳에 가셨다. 거기에서 제자들에게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하는 동안 너희는 여기 앉아 있어라." 하시고

베드로와 제베대오의 두 아들만을 따로 데리고 가셨다.

예수께서 근심과 번민에 싸여 그들에게 "지금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니 너희는 여기 남아서 나와 같이 깨어 있어라." 하시고는

조금 더 나아가 땅에 엎드려 기도하셨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하시고자만 하시면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마태오 26:36-39)


인류의 모든 죄를 안고 대신 죽음으로써 인류를 죄에서 구원해야 하는 예수, 그러나 신이며 사람인 그는 수난과 죽음을 앞에 두고 엄청난 괴로움과 두려움에 싸여 하느님께 마지막 청원을 올립니다. 이 죽음을 피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하지만 그는 곧 결단을 내립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 나는 이 작품을 성경과 비교하면서 해설하지만, 그것은 이 시의 화자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한 방법일 뿐 결코 신학적 등치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화자는 신앙적 양심과 이상, 소명(햇빛)을 따라(쫓아오던) 살아 왔습니다. 그러나 현실(지금) 속에서 그 햇빛은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려 진행을 멈추었습니다. 시대가 자신에게 고난과 희생(십자가)을 요구하고 있다는 내면적 자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어려움이 '교회당 꼭대기'라는 물리적 고도로 가시화되고 있습니다.

* 예수는 자신의 소명이 단순한 복음 선포에만 있지 않고, 속죄양이 되는 데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십자가는 예수가 스스로 결단한 고난으로 악에 대한 궁극의 승리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젊고 약한 이 화자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부름이요 사명입니다. 그런 인식과 실천 사이의 괴리 사이에서 화자의 무력감과 주저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 게쎄마니 동산의 예수가 근심과 번민에 싸입니다.



종소리도 들려 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종소리는 계시의 부름입니다. 그런데 화자는 종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늘이 침묵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계시가 없으니 그 외롭고 두려운 일이 자기의 소명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화자는 교회당을 떠나지 못합니다(서성거리다가). 자신의 생각이 진실이 아니라 두려움에서 나오는 변명이라는 것을 스스로 의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휘파람을 부는 것은, 이런 부끄러움을 위장하기 위한 허세일 것입니다.

* 예수가 기도합니다.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에 대한 해석은 다양합니다. '결단을 하기 전 지연되는 시간'이라는 해석도 그 중 하나입니다. 다음 행의 '휘파람이나 불며'와의 연결이 문제인 듯합니다.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괴로웠던 사나이'는 근심과 번민에 싸여 있던 예수이지만, 윤동주의 시 '자화상' 속의 그 '사나이'이기도 하니 여기서는 화자가 동일시하는 대상일 것입니다. 그러니 '괴로웠던'은 화자 자신의 현재 상태이기도 합니다. ‘행복한’은 실체의 표현은 아닐 것입니다. ‘괴로웠던’과 의도적으로 나란히 두어, 예수 그리스도처럼 소명을 이룬 자에 대한 화자의 부러움이 담긴 인간적 평가일 텐데, 이 '행복한'을 위해 화자가 결단에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화자는 예수와의 사이에 겸허한 거리를 둡니다. '허락된다면'에서 예수와는 달리 수동적인 수용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고, '처럼'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에 직접 붙이지 않고 행을 바꿔 표기함으로써 자신은 그저 비슷한 정도의 지향점을 가지고 있는 정도라는 느낌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결국 화자는 ‘허락된다면’이라는 유보, 겸손한 기다림 속에 기꺼이 희생을 준비하겠다는 결단을 내립니다. 하지만 그 희생은 예수처럼 장엄하고 성스러운 것이 아니라, 암담한 시대 배경(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속의 작은 인간적 헌신(모가지)의 약속입니다(흘리겠습니다). 그리고 그가 허락된 고난을 기꺼이 받아들여 조용히 흘린 피가, 누군가에게는 꽃처럼 의미와 희망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높고 먼 이상 앞에서 흔들리던 화자는 예수를 생각하면서, 그처럼 완전한 성인이 될 수는 없겠지만 '허락된다면' 내게 주어지는 희생의 고통을 조용히 감당하겠다고 결심합니다. 요란한 승리가 아니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서도 피가 꽃처럼 의미로 바뀌길 바라는 소박한 한 청년의 소망에서 비롯된 결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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