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응 1
“난 내 방식대로 하고 싶었어!” 이 말은 종종, 실패한 자리에서 터져 나온다. 무너진 순간, 자신을 위로하려는 듯, 혹은 스스로를 정당화하려는 듯 그렇게 중얼거린다. 하지만 정말 그게 ‘나의 방식’이었을까? 아니면 세상에 나를 맞추지 않겠다는, 미련한 고집이었을까?
28일, 토요일. 전라북도 고창에서 열린 ‘전민일보배 생활체육 탁구대회’ 경기에서 ‘또’ 졌다. 상대는 나보다 기술도 단조롭고, 서브도 특별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이겼고, 나는 졌다. 그가 가진 무기는 단 하나였다. ‘적응’이라는 기술.
그는 경기에 맞추었고, 나는 나를 고집했다. 그는 공을 넘기는 걸 우선시했고, 무리한 공격을 하지 않았다. 상황이 요구하는 것을 정확히 따르며 경기를 이기는 법, 살아남는 법에 집중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나보다 나았다. 나는, 내가 경기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게 내 방식대로 혹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경기를 끌고 갔다.
적응은 타협이 아니라 전략이다. 이 말을 이해하기까지, 나는 여러 번 무너졌다. 나의 원대한 이상(연재 6화. 폼생폼사 희망부, 참조)은 현실을 외면했고, 현실은 그 이상을 조롱했다. 결국 살아남은 건, 꿈꾸는 자가 아니라 상황을 읽고, 해석하고, 받아들인 자였다.
적응은 나를 지우는 일이 아니다. 세상에 억지로 나를 끼워 맞추는 것도 아니다. 적응이란 ‘나’와 ‘지금’을 조율하는 섬세한 기술이다. 이상을 꺽지 않되, 그에 이르기 위한 길을 다르게 짜는 일. 어떤 날은 이상이 현실을 끌고 가고, 어떤 날은 현실에 이상을 살짝 접어 넣어야 한다. 적응은 그 균형 위를 걷는 기술이다.
그날 나는 상대에 비해 실력이 모자란 것도, 욕심이 많았던 것도 아니다. 오로지 하나, 적응의 실패! 그것은 결국, ‘내가 추구하는 방식’을 고집한 채, ‘상황의 질서’를 무시한 결과다. 탁구의 기술과 게임의 기술을 혼동한 것이다. 나는 기술은 갖추었지만, 게임에는 준비되지 않았다. 공을 칠 줄은 알았지만, 흐름을 읽을 줄은 몰랐다. 나는 ‘어떻게’만 고민했고, 그는 ‘언제’를 알고 있었다.
그날 시합의 승자는 ‘공을 넘긴 자’였고, 패자는 ‘공을 다시 넘기지 못한 자’였다. 대부분의 사람은 지지 않으려고 게임의 룰과 시스템에 적응한다. 그들은 여기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은 좀처럼 승리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나의 방식으로 게임에 참여한다. 하지만 세상은 그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현실은, 우리 사회는 그리고 게임의 상황은 ‘내가 하고 싶은 플레이’보다 ‘상황에 필요한 플레이’를 요구한다. 먼저 이기고 살아남아야, 내 폼과 드라이브도 의미를 갖는 게 아닐까. 살아남은 후에야, 비로소 자기다움을 발휘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이게 승리의 룰이라면 제일 먼저 해야 할 행동은 적응하는 일이 아닌가. 무릎을 꿇고라도 살아남아, 다시 일어서는 법을 보여야 하지 않는가. 적응은 기회를 잡기 위해 잠시 웅크리는 일. 바로 그것이 살아가는 방식으로서의 적응 아닌가.
적응은 살아남기 위한 조절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을 통과하여,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아내기 위한 징검다리다. 생존에서 출발하여 자기실현으로 이동하는 훈련이다. 나를 잃지 않으면서, 끝내 나를 만들어 내는 실험이다. 단순히 살아남으려는 방법이 아니라, 나답게 살아내는 방식을 조율하는 기술, 그것이 적응이다.
내가 그토록 추구하는 폼생폼사의 탁구, 달달한 아이스크림 같은, 짜릿한 승리에 이르는 단계와 과정이 적응이다. 그러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 이곳의 경기장에서 살아남는 일, 곧 적응하는 일이다.
그런데 적응에 기댈수록 이런 물음이 따라온다. 지금의 승리가 내일도 유효할까? 현실에 맞추는 일이 기초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요령을 익히는 데 그치지는 않을까? 원인에서 결과를 빚기보다, 결과에 끼워 맞추느라 과정을 생략하는 것은 아닐까?
결국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간극 속에서, 정해진 길을 따르는 삶과 자기 길을 여는 삶 사이의 긴장이 생겨난다. 우리는 예측 가능한 경로가 주는 확실성과, 불확실하지만 가능성에 열려 있는 길 사이에 서게 된다. 이러한 고민을 <데미안>의 싱클레어가 들려준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싱클레어는 정해진 삶의 틀을 벗어나, 자기만의 길을 살아가려는 갈망을 드러낸다. 그는 안다. 자기 안에서 솟아오르는 것을 따르기 위해선, 외부의 기대와 규범을 거슬러야 한다는 것을. 익숙한 경로를 이탈해야 하고, 예측 가능한 안정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그것은 곧 적응의 문법을 버리는 일이며, 사회적 실격을 감수하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어떤 이는 “그건 그냥 철없는 고집이야”라 하고, 또 어떤 이는 “자기 현실을 외면하는 자의 핑계일 뿐”이라 말한다. 때론, 우리 안의 또 다른 내가 그렇게 속삭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많은 이들은 여전히 싱클레어처럼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을 따르고자 한다. 그것이 내면의 목소리든, 충동이든, 설명할 수 없는 소명이든 간에. 외롭고 불확실하더라도, 스스로를 배반하지 않기 위해 이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바로 이 지점에 ‘적응’이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나를 억누르는 족쇄인가, 아니면 나를 지켜주는 연막인가.
벗어나야 할 함정인가, 살아남기 위한 기술인가. 그 둘 사이,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적응에 대한 두 개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성공하는 적응과 실패하는 적응. 상반된 듯 보이지만, 이 둘은 늘 맞닿아 있다. 이번 글은 ‘적응에 실패하지 마라’, 즉 적응하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다음 연재는 그와 반대되는 듯한 물음을 던질 예정이다. ‘적응에 성공하지 마라’, 다시 말해 적응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모순처럼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이 두 메시지의 경계에서 비롯되는 틈, 그 틈을 따라 사유의 길을 열어보려는 것이 내 글쓰기의 목적이다.
사실 다음 글을 쓸까 말까 망설이는 중이다. 그 이야기는 단순한 삶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다소 불편하고, 길고, 위험스러울 수 있는 길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내가 쓸 수 있을지 고민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생각해 볼 가치는 충분하다고 여기지만... 고민은 잠시 미뤄두고, 오늘은 이 글부터 함께 읽어 주시면 고맙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