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막다른 길에 선다. 앞도 뒤도 막힌, 더 이상 나아갈 수도, 돌아설 수도 없는 지점. 느닷없이 마주하거나, 어쩔 수 없이 밀려가거나, 끝도 모르게 헤매다 다다른 그 자리. 그곳에 이르면, 우리는 비로소 멈춘다. 불안과 초조, 후회와 좌절이 뒤엉켜 한 걸음도 떼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길을 잃은 것이다.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렸을 뿐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런 일이 벌어진다. 막다른 길은 삶의 틈새에 숨어있다가, 가장 중요한 순간에 슬며시 정체를 드러내는 음흉한 불청객이다. 누구도 초대하지 않았건만, 그는 늘 우리의 절박함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있다. ‘좋은 직장’이란 좁은 입구 앞에 선 날, '행복한 부자'라는 꿈을 좇다가 길을 잃는 순간,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며 뛰어든 열정의 하루 속, 혹은 예고 없이 시작된 실직과 관계의 단절 앞에서, 우리는 문득 그를 마주하게 된다.
그 순간이 오면, 우리는 어김없이 되묻는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디로 가야 할까? 길을 잃은 사람들의 경험이 도움될까 싶어 귀 기울여 보지만, 위로와 응원 그 이상의 것을 얻기 어렵다. 그의 상황이 나와 맞지 않는 것이다. 그의 시행착오는 나의 답이 아니다. 그의 길이 나의 길이 되지 못한다. 거기에는 늘 알 수 없는 거리감, 석연찮음, 독해불가의 영역이 존재한다.
막다른 길 위에는 결국, 한 사람만이 남는다. 그곳에 다다른 사람. 그 자리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게 된 사람. 길의 끝에, 홀로 선 사람. 오직 그 사람만이 자기 앞에 놓인 묵직한 혼돈을 껴안고, 어느 하나 장담할 수 없는 미래를 향해 한 걸음, 또 한 걸음을 내딛는다. 길 끝에 선 그 사람만이, 자기의 길을 만들 수 있다.
다른 방법은 없다. 방황하고, 넘어지고, 주저앉더라도 다시 일어서야 한다.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기에, 결국 자기 발로 자기의 길 위에 올라서야 한다. 그 길은 이제껏 걸어온 길의 끝도, 마지막도 아니다. 그러니 너무 서두르지 말자. 막다른 길에서 정말 필요한 것은 그곳을 빠르게 빠져나오는 ‘방법’이 아니다. 오히려, 그 막힘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 조용히 들여다보는 일이다. 몽테뉴의 이야기가 도움될 것이다.
“내가 고양이와 놀 때,
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소일하는지
고양이가 날 데리고 소일하는지, 누가 아는가?”
막다른 길에서 고양이라니.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몽테뉴의 이 유명한 문장은, 우리가 얼마나 자주 삶의 통제권을 쥐고 있다고 믿는지, 그 확신의 허상을 조용히 흔든다.
막다른 길 앞에 멈춰 선 그 순간, ‘몽테뉴의 고양이’는 우리에게 말한다. 삶을 통제하고 있다는 환상에서 벗어나라. 우리는 막다른 길에 서면 삶의 통제권을 잃었다 생각하며 좌절에 빠지곤 한다. 마치 내가 이 길의 주인공이자, 모든 상황의 피해자인 것처럼 느낀다. 그러나 몽테뉴는 '누가 아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이를 가볍게 비튼다.
어쩌면 막다른 길은, 내가 잘못 들어선 길이 아니라 삶이 나를 데리고 노는 방식일 수도 있다. 내가 이 상황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이 나를 시험하고, 이끌고, 길들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길' 자체가 의도성이 있다는 생각 자체가 우습다. 그렇다면 겸손으로 생각하자. 내가 삶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겸손,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그 순간, 우리는 좌절에서 관조로, 공포에서 유연함으로 건너설 수 있다.
몽테뉴의 고양이는 내가 관계적 존재임을 말한다. 고양이와 나, 나와 세계 사이의 관계는 단선적이지 않다. 내가 고양이에게 장난을 건다고 믿지만, 사실은 그 반응이 나를 즐겁게 하고, 시간을 흘려보내게 만든다. 관계란 내가 영향을 주는 동시에, 영향을 받는 구조다. 고양이와의 상호작용처럼, 막힌 길도 어쩌면 나와 교감하며 무언가를 말 걸어오는 중인지 모른다.
내가 멈춘 것 같지만, 어쩌면 그 멈춤이 나를 어딘가로 데려가는 중일 수 있다. 삶은 내가 조종하는 대상이 아니라, 나와 함께 춤추는 상대이기도 하다. 그러니 관계 속에서 살아라. 삶은 혼자 주도하는 게임이 아니라, 서로를 따라하고, 되받고, 반응하며 함께 이어가는 놀이이다.
끝으로, 몽테뉴의 고양이는 ‘모른다’는 데서 시작하라 말한다. “누가 아는가?” 이 말은 냉소가 아니라, 삶 앞에 서는 한 사람의 겸손한 회의다. 막다른 길에서 가장 괴로운 건 ‘단정’이다. 이 길이 끝이야. 이건 실패야. 다시는 못 가. 그러나 몽테뉴는 말한다. '그렇게 확신할 수 있어?'
지금 끝이라 믿는 이 길이 훗날 다시 살아나는 출구일 수 있다. 낭비라 여긴 시간이, 실은 가장 조용하고도 절실한 회복의 시간이었을 수도 있다. 모른다는 걸 아는 순간, 삶은 새로운 가능성의 문을 연다. 단정 대신 질문을, 확신 대신 여백을. 그래야 막힘은, 다시 시작이 될 수 있다.
이야기를 정리하면 이렇다. 막다른 길이란 내가 만든 것도, 세상이 강요한 것도 아닐 수 있다. 어쩌면 그것은 삶이 나와 함께 짜낸 놀이의 한 장면일지 모른다. 그러니 그것이 실패인지, 혹은 새로운 시작인지 누가 아는가.
그럼에도 손에 잡히는 게 없어서 밋밋하고 허전하고 불안한가? 그렇다면 남은 것은 단 하나. 낯선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용기다. 길은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다. 때로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던 길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이미 길은 꽉 막히고 막바지에 이르지 않았는가. 그러니 바로 지금이, ‘누가 아는가’의 시즌 2를 시작할 시간이다. '누가 아는가'란 다름 아닌, 어찌될지 아무도 모르니 계속 걸어야 한다는 뜻이다. 작가 루쉰은 제자이자 연인인 쉬광핑에게 이런 편지를 건넸다.
“막다른 길에서는 갈림길에서처럼 성큼 걸어갈 것이고, 가시밭길이 가로막는다 해도 여전히 걸어갈 것이다. 다만 온통 가시밭뿐이어서 결코 갈 수 없는 길은 분명 한 번도 맞닥뜨려본 적이 없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 본래 막다른 궁지란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내가 다행히도 아직 그런 지경에 이르지 않았거나.”
우리 역시 그러하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에 묻은 흙을 툭툭 털고, 한 발씩 다시 걸어가면 된다. 더디고 아플지라도, 결코 멈추지 말 것.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몽테뉴의 글은 <에세> 2권 12장 '레몽 스봉을 위한 변호'를 참조했다.
*루쉰 글은 위화의 <인생>을 '해설'한 백원담 교수 번역을 참조했다.
*이 글은 '막다른 길'의 "멈춤(2화), 묻기(7화), 용기(13화)"와 관련 있을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