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5월 14일, 수요일의 하루
아이들을 만나러 서울에 간다. 버스로 2시간 반분쯤 걸리니 아침에 출발해서 저녁에 돌아오는 일정이 가능하다. 사실 군산과 서울은 그리 멀지 않다. 그래서 지인들이 자주 올라오라 권하지만, 정작 내게는 늘 큰 맘을 먹어야만 움직일 수 있는 거리다. 하지만 아이들 일이면 언제나 모든 것에 우선된다. 대부분의 부모 마음이 그렇듯, 나도 이제 그런 마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나이가 되었다.
얼마 전, 식당 현관 앞에서 라일락 꽃을 보았다. 나는 그러려니 하고 스쳐 지나쳤지만, 뒤따르던 일행은 걸음을 멈췄다. 향기를 맡고, 사진을 찍고, 한참을 들여다보며 좋아라했다. 그래서 그랬던 걸까. 오늘 버스 안에서 들은 노래들 중, 유독 ‘가로수 그늘아래 서면’이 가슴에 콕 박혔다. 임재범의 목소리로 흐르는 이 노래는 ‘라일락 꽃향기 맡으면’으로 시작한다. 감정을 꾹꾹 눌러가며 부르는 그의 음성은 ‘사랑의 이별’을 말하는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꽃말처럼 ‘젊은 날의 추억’을 이야기하는 듯도 하다. 젊은 날의 서울, 그리고 그 시절의 사람들.
서울은 언제 봐도 팽팽하다. 꽉 들어찬 사무실과 상가, 빼곡한 집들, 예측 가능한 이동을 보장하려는 듯한 지하철의 촘촘한 노선, 도시의 속도에 발맞추려는 사람들의 빡빡한 일정과 총총한 발걸음, 파란 불이 켜지기까지 남은 시간을 숫자로 띄우는 신호등의 깜빡임까지─어느 것 하나 느슨하지 않다. 지하철 객실에서 흘러나오는 “다음 내리실 역은~ “이라는 방송마저 어쩐지 ‘다음을 준비하라’는 긴장처럼 들려온다. 착착 맞아 떨어지는 이 모든 효율 덕분에, 나는 아무리 술에 취해도 무사히 집에 도착했고 다음 날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서울은 늘 반짝반짝 빛나는 도시였다. 나는 이 도시와,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을 사랑했다. 양천구청이 주최한 한 백일장에서 ‘이 곳이 제2의 고향’이라는 주제로 은상을 받은 적이 있다. 아무런 준비 없이 대회 현장에서 써 내려간 글이었지만, 그래서 오히려 이 도시에 대한 나의 마음이 얼마나 각별하고 솔직했는지를 보여주는 결과였다.
그 도시에 뿌리내리고 자란 아이들이 청년이 되었다. 마트에서, 극장에서, 학교에서, 병원에서, 혹은 도시를 벗어나려는 듯 주말마다 찾았던 캠핑장에서 아빠 손을 놓지 않던 아이들이었다. 지금은 일과 여행을 준비하며 미리 여권을 만들고, 구청에서 다이소로 나를 이끌며 자신에게 필요한 사무용품을 결제한다. 가끔은 밥값이나 커피값을 자기가 내겠다고 앞서기도 한다. 이제는 나와 보조를 맞추지 않고, 저만큼 앞에서 당당히 걸어간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들끼리 나누는 대화가 더 쉽고, 더 편해 보인다.
아이들이 어느새 다 자랐다. 하고 싶은 것보다 해야 하는 일을 받아들이는 나이가 되었다. 아직은 곁을 주고 있지만, 그 거리는 차츰, 그리고 점점 멀어질 것이다. 결국엔 완전히 독립하도록, 나도 곁에서 물러서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시간이 앞으로 얼마나 더 남아 있을까.
하필 오늘, 클라우드까지 마음을 비집고 들어왔다. 몇 년 전 5월 14일*. 그날 하루가 수십 장의 사진으로 천천히 재생되었다. 아이들은 계곡에서 정신없이 물놀이를 하고, 훈련받는 군인처럼 고무 보트를 머리에 이고 깔깔댔고, 야전침대 위에서는 온몸이 녹아내리듯 깊이 잠들어 있었다. 밤사이 천둥번개가 치고 폭우가 쏟아졌고, 계곡물은 어느새 새까만 흙탕물로 변했다. 우리는 가까스로 그곳을 벗어났다.
그땐 그저, 일상의 한 장면이라 여겼다. 당연하게 주어진 시간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야 비로소 안다. 아이들이 자라고 난 지금에야, 그 시간이 얼마나 크고도 조용한 아름다움이었는지를.
나에게 젊은 날의 추억이란 이것저것으로 많겠으나, 이제 그것은 오로지 아이들과 함께 보낸 시간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니 그렇게 아름다웠던 세상을, 비로소 깨닫는 소중함을, 이미 지나버린 행복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잊지 않으리. 내가 사랑한 이야기를.
*글을 쓰며 확인해 보니, 클라우드가 7월 12일 찍은 사진을 5월 14일자로 '잘못' 보여줬다.
하지만, 클라우드가 보여준 사진이 내 '기억의 댐'을 무너뜨리는 버튼이었으므로 그대로 실는다.
마침 이 글을 올리는 오늘, 밖에 비가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