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74번 버스를 타고 런던을 산책합니다.

by 효유

"리젠트 파크에 가려면 74번... 트라팔가 스퀘어는 19번,,"


자동차 없이 런던에서 생활하는 건 생각보다 크게 불편하지는 않다. 다행스럽게도 집 앞에는 런던 시내까지 갈 수 있는 버스 정거장과 튜브역이 모두 있었는데, 나는 주로 버스를 이용하는 편이었다. 물론 런던에서는, 목적지가 어디든 관계없이 튜브로 이동하는 편이 시간&정신건강 면에서는 훨씬 더 유리하지만, 빠른 이동시간을 취하는 대신.. 창 밖으로 감상할 수 있는 런던 특유의 경관을 포기해야 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시간 엄수가 가장 중요한 용건이 아닌 이상 나는 가능한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걸 선호했다.


IMG_6015.jpg


'더블 데커(Double Decker)'라고도 불리는 런던의 2층 버스. 런던 하면 떠올려지는 이미지 중에 빅벤이나 런던 아이만큼이나 유명한 아이콘이 아닐까 한다. 관광객으로 왔던 런던에서는 도로 위의 2층 버스들도 일견 관광 상품에 포함된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이국적인 인상이었지만, 막상 런던에 살아보니 2층 버스는 그저 우리를 이곳에서 저곳으로 데려다 놓는 대중교통수단 중 하나였다. 하지만, 런던 시내로 가기 위해 2층 버스를 타는 날, 타이밍만 잘 맞춘다면 아무도 없는 2층 맨 앞자리에 앉을 수 있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이걸 왜 호사라고 표현하냐면, 이때만큼은, 런던 투어를 위해 비싼 비용을 지불하며 타야 하는 일명 '빅버스(런던 시티 투어 버스)'도 부럽지 않은 순간이 되기 때문이다. 1파운드 남짓한 비용으로 런던 시내의 여러 유명한 장소들을 2층버스 1열에서 감상할 수 있는 셈. 굳이 맨 앞자리가 아니더라도 크게 실망할 필요는 없다. 윗 층 어딘가에 앉아 잠시라도 런던 시내의 아름다운 건축물과 풍요로운 자연과 같은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1시간도 후딱 사라지는 마법을 경험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IMG_6288.jpg
IMG_6289.jpg
프림로즈힐로 가는 길, 리젠트 공원에서/ Daunt 서점


우리 동네에서 런던 시내로 가기 위해 타야 하는 버스 노선은 몇 개가 있었지만, 그중에 내가 유독 좋아하던 노선은 바로 74번이었다. 이 버스를 타면 우리 동네를 지나 아름다운 V&A 박물관(런던에서 아름다운 박물관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장소, 나의 최애 박물관)과 헤러즈 백화점, 하이드 파크, 마블 아치를 지나 옥스퍼드 스트리트까지 갈 수 있고, 여기서 버스를 한 번 더 갈아타면 우리에겐 프림로즈 힐로 유명한 리젠트 파크까지도 갈 수 있다. 버스에 한 번 오르기만 하면 런던의 아름답고 웅장한 건축물들과 한 없이 푸르고 풍성한 런던 공원들, 그리고 런더너들이 사는 주택가까지 감상할 수 있는 것이다. 리젠트 파크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퀸메리장미공원(Queen Mary's Rose Gardens)이라는 곳이다. 장미 시즌에 방문하면, 개인적으로도 장미를 매우 좋아하기는 하지만, 장미의 종류가 이렇게 다양했나 싶을 정도로 수없이 다양한 장미들을 정말 마음껏 감상할 수 있었다. 적당히 선선한 날씨에는 프림로즈 힐에 올라 잠시라도 앉아있으면 며칠 동안 마음속에 묵혀있던 고민들도 아이스크림이 녹듯 사르르 사라지는 느낌을 받곤 했다. 여름이면 여름이 주는 상큼함으로, 가을이 되면 멋스러운 브라운 코트로 옷을 갈아입은 듯한 우아한 따스함으로.. 또 봄이 되면 팝콘이 튀듯 형형색색 생생한 색상들로 뒤덮인 이곳의 분위기는 마치 오래 알고 지낸 것 같지만 만날 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받게 하는 친구의 모습 같기도 했다. 공원을 나와서 시내 쪽으로 조금만 걸으면, 내겐 또 다른 힐링공간인 Daunt Books 서점에 들러 오래된 사진집부터 최신 베스트셀러들을 뒤적여본다. 굳이 책 한 권을 읽지 않으면 또 어떤가.. 내가 좋아하는 서점, 특히 서점이 머금고 있는 그 특유의 공기, 냄새 심지어 살짝 가라앉아 있는 먼지들까지도...^^ 서점에 머무르는 이 잠깐의 순간만큼은 중고등학생 어린 시절, 책방에 서서 좋아하는 책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읽고 있던 그때로 돌아가 있는 느낌이었다.




한 번은 이런 경험도 있었다. 이 날은 유난히 날씨가 좋았던 날. 처리해야 할 일도, 약속도 특별히 없던 나는 이 좋은 날씨를 허비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밖으로 나가 또 74번 버스를 탔다. 버스에 타자마자 2층으로 올라간 건 너무도 당연한 일. 마침 맨 앞 줄에 한 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 옆에 앉아 있던 여성분께, 내가 옆자리에 앉아도 될지 양해를 구하고 있는데.. 그 여자분의 반응은 매우 친절하면서도 적극적인 편이었다. 그분은 내가 런던에 여행 온 관광객이라고 생각하셨는지, 버스가 유명 관광지를 지날 때마다 나에게 하나하나 알려주기 시작했다.


"여기는 헤러즈 백화점이에요.. 여기는 하이드파크라는 유명한 공원이죠.."


그렇게 버스에서 우연히 만난 분과 예상치 못했던 스몰토크가 이어졌는데, 알고 보니 이 분은 런던에 회의 참석차 방문한 다른 유럽국가 대학의 교수님이셨고, 이 분의 전공과목은 심지어 우리 아이가 최근에 매우 관심이 높아진 과목이었다. 자연스럽게 우리 아이가 그 과목에 흥미가 있다는 이야기까지 연결되었고, 교수님은 궁금한 점이 있으면 언제든지 문의하라며 메일 주소가 적혀있는 자신의 명함까지 흔쾌히 꺼내주셨다.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내가 내려야 하는 목적지에 도착하게 되었고, 우리는 짧은 인사를 나눈 채 헤어지게 되었다. 정류장에 내린 나는 잠깐이지만 발길을 떼지 못했다. 정류장을 출발해서, 점점 작아져 보이는 버스와 손에 쥐어진 교수님의 명함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한국이었다면, 내 성격으로는, 버스에서 만난 전혀 모르는 사람과 대화를 나눈다는 건 상상하기 일이었을 텐데... 런던에 온 이후로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요?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곳은 나를 참 많이도 바꿔놓는 도시임이 틀림없는 듯하다.


IMG_6016.jpg


keyword
이전 12화크리스마스 바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