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피아니스트, 2002' 쇼팽, 녹턴
제2차 세계대전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피아니스트 The Pianist, 2002]의 오프닝은 독일로부터 폭격받는 폴란드의 한 라디오 방송국에서부터 시작된다.
곧바로 흘러나오는 곡은 쇼팽의 녹턴을 좋아하는 이라면 모를 리가 없는 곡이다. 실존 인물 블라디슬라프 슈필만 Władysław Szpilman역의 애드리안 브로디가 실제로 직접 연주한 장면이 나오는데 템포는 다소 빠르다. 폭격상황에서의 급박함을 표현하기 위해 일부러 빠르게 연출한 것으로 보인다.
이 곡은 일반적으로 녹턴 20번으로 불리는데 정확하게는 'c# minor' 혹은 'lento con gran espressione'라고 불리기도 한다.
쇼팽이 1849년에 사망하고 한참 지난 1875년에 첫 출판되었는데, 20번이라고 굳이 붙인 건 쇼팽 생전에 출판된 곡들이 앞서 있었기 때문이다. 1번에서 18번까지 먼저 표기되었고, 이후 발견된 곡들은 19, 20, 21번으로 악보집에 실리게 되었다(모든 악보집이 아닌 평균적인 악보집에 의한 것입니다-글쓴이).
다만 이 작품은 20번이라는 순서와는 다르게 사실 쇼팽의 녹턴 들 중에서도 비교적 초기에 작곡된 작품이다.
그러면 왜 악보상으론 순서가 뒤거나 다르게 불릴까.
그 이유는 지난 슈베르트 즉흥곡을 예로 설명했듯 작곡가의 자필 악보가 온전하게 보관되어 시기에 맞게 출판되었느냐 마느냐에 따른 것이다.
근래에는 작곡가의 자필 악보들이 비교적 잘 보관되어 있어서 이런 문제가 거의 없지만 19세기까지만 해도 사정이 달랐다. 작곡가의 자필악보가 온전히 있다는 가정하에 원본을 필사하는 필사가의 악보, 그 악보를 가지고 인쇄하기 위해 조판공이 필사한 악보같이 출판에 따른 악보들도 다르기도 하였다.
만약 자필 악보가 존재하지 않고 작품 목록에만 존재가 있다면 상황은 더 나빠지는데, 악보의 유실로 작품이 아예 빛을 못 보거나 그나마 가까운 가족이나 지인이 보관하고 있다 해도 친필여부나 제삼자에 의한 편집에 의해 출판되기도 한다.
이 작품의 경우도 쇼팽의 온전한 자필 악보가 존재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쇼팽은 가족 혹은 지인에게 자필 악보의 필사본을 각각 헌정 혹은 선물로 보내기도 하였는데 이 악보들을 바탕으로 처음 출판한 악보, 그리고 그 악보를 바탕으로 수정한 악보나 악보를 베낀 필사가의 악보들이 다양하게 출판되었다.
그러다 이러한 무분별한 관행들이 20세기초 음악계에 원전작업이라는 새로운 사조가 등장하면서 뜨겁게 달아오르게 된다. 이는 금세 학자들에 의해 신성한 의무로 여겨지며 유행처럼 번지게 되었는데 너나 할 것 없이 하이든, 베토벤, 모차르트부터 비교적 근대 작곡가들을 중심으로 작곡가의 자필 악보가 100%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그 대상이었다. (그중에는 오스트리아 작곡가 안톤 브루크너 Josef Anton Bruckner의 교향곡들도 빠질 수가 없는데 이는 다음 편에 게재할 예정입니다-글쓴이)
연주를 배우는 입장에서는 이러한 과정에 의해 출판된 여러 악보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당연히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다. 스승에 의해, 혹은 당시 선호되는 출판사에 의해 악보를 결정하거나 지금처럼 TMI가 홍수처럼 밀려드는 시대엔 스스로 선택하기도 한다.
그러면 쇼팽 녹턴에 관한 대표적인 출판사들을 살펴보자.
(악보는 왼쪽부터 1, 2, 3, 4로 순서를 정했습니다-글쓴이)
1. 일명 파데레프스키 편집판으로 불리는 이 악보는 가장 오랫동안 전 세계적으로 쇼팽 악보에 관한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악보다. 피아니스트이자 쇼팽 연구가로 활동한 파데레프스키에 의해 원전작업이 이뤄졌는데, [폴란드 음악 출판사]를 통해 공식적으로 쇼팽의 작품들이 출판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후 몇몇 쇼팽 음악 학자들에 의해 오류를 수정하고 개정하면서 지금까지 가장 널리 보급, 사용되고 있는 악보로 우리나라에서는 [음악춘추사] 출판사에서 라이센스로 출판되고 있다.
2. 빈 원전판
이 출판사의 편집자는 얀 에키에르 Jan Ekier이며 현재 공식적으로 가장 저명한 쇼팽 내셔널 에디션 Chopin National Edtion의 같은 편집자로 아래 4.에서 다시 설명한다.
3. 헨레 원전판
대부분의 악보들은 이곡을 'Lento con gran espressione' 혹은 'c# minor'라고 표기하고 별도의 작품 번호는 표기하고 있지 않고 있다. (혹은 작곡가가 사망하고 출판하였다고 해서 '작품 번호 없음'이라는 뜻의 op. posth가 적혀있다-글쓴이) 하지만 헨레 악보에는 KK.IVa/16 이라고 적혀있는데, 이것은 폴란드의 쇼팽 음악학자 크리스티나 코빌란스카 Krystyna Kobylańska(1925-2009)의 쇼팽 작품 연구에 대한 결과물에 따른 번호다. 헨레 출판사는 어쩌면 코빌라스카의 연구 결과물에 더 힘을 실어준다고 볼 수 있는데, 앞서 출판된 파데레프스키 편집판에서 간과한 고증과 오류를 더욱 심도 있게 분석하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이전의 출판사들은 쇼팽의 작품에 필요 이상으로 첨부한 페달링 기호나, 해석과 무관한 슬러나 타이 같은 이음줄, 운지법을 결과물에 포함시켰지만 헨레의 출판물은 과감하게 이를 배제시켰다. 이는 이후 출판되는 쇼팽 작품의 원전작업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4. 에키에르 편집판이라고 불리는 Chopin National Edtion 1)으로 빈 원전판과 같은 편집자인 얀 에키에르가 1967년부터 2009년까지 연구한 쇼팽의 모든 작품들을 [폴란드 음악 출판사]를 통해 출판하였다. 세계적으로 가장 권위 있는 쇼팽 콩쿨인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의 공식 악보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미 같은 편집자가 출판사가 다른 곳에서 각각 다른 결과물을 내놓은 것은 아이러니할 뿐만 아니라 결국 원전연구에 대한 100% 신뢰할 수 있는 결과물은 없다로 귀결된다.
그렇다면 어쨌든 실제 악보상 차이점은 무엇일까?
헨레 원전판과 파데레프스키 편집판을 간단히 비교해 보자면 일단 다른 부수적인 것들-슬러, 페달링, 셈여림 등-은 제외하고 음으로써 쉽게 구분할 수 있는 곳은 첫 페이지에서만 크게 세 곳으로 볼 수 있다. 악보상 같이 연주되는 곳은 같은 번호를 표기해 두었으니 바로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2) 특별히 1, 2의 경우는 파데레프스키 편집판을 제외한 헨레, 에키에르 편집판, 빈 원전판은 모두 같다.
여기까지 쇼팽의 녹턴 한 곡으로 제법 쉽고 간략히? 설명을 하였지만 학자들에 의한 이런 연구는 사실상 끝이 없다고 볼 수 있다. 가령 어느 날 쇼팽의 친필 악보가 떡 하니 발견된다면 공식 출판사를 자청하는 곳 외에도 모든 출판사들에게 혼란을 가져다주는 것은 안 봐도 뻔할 것이니까.
이는 학술적인 관점에서는 영원한 먹잇감이지만 심미적인 관점에서는 불필요한 나쁜 관습일 수도 있지 않을까. 3)
끝으로 아래의 동영상은 영화 속 실제 주인공이었던 블라디슬라프 슈필만이 직접 연주한 녹턴이다.
1) 이 출판사에서 출간한 쇼팽 결과물은 총 37권이며 쇼팽이 생전에 출판한 작품들은 크림 베이지 색상의 표지를, 사후에 출판된 작품들은 흰색으로 구분을 짓고 있으며 작품 번호는 op가 아닌 wn(National Editon의 폴란드어 약자-글쓴이)으로 표기한다. 새 작품 번호를 표기한 것은 헨레에서 쓰는 코빌란스카 작품 번호가 공식 연주회나 방송에서 쓰이는 것을 폴란드 출판사 입장에서는 꽤 찝찝하고 껄끄럽게 봤을 것이다.
3) 귀로 크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아무래도 표기한 1의 c#음의 tie 유무로 인한 구분과 다음에 오는 왼손 넷잇단음표 중 첫음이다. 3의 꾸밈음은 연주자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그리고 그 외에도 여러 차이점이 있으나 여기서는 악보의 첫 페이지만 예로 한다.
3) 비교적 근래에 와서는 음악 학자 외에 현직 예술가(피아니스트를 비롯한 연주가)에 의한 원전 연구까지 그 결과물은 정말 끝이 없을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