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살 중학생 철부지 시절, 뉴스에서 어렴풋이 들려오는 소리 “300여 명의 학생이 배에 갇혀서 죽어가고 있다.” 상식적으로 너무 이해 안 됐다. ‘배가 침몰하고 있으면 빠져나오면 되는 거 아닌가? 소방관과 경찰은 뭐하고 있지? 너무 기울어져서 못 나온다고? 아니 그렇다고 정말 저렇게 죽도록 내버려둔다고?’ 애석하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시간 흐를수록 의문은 더 늘었다. ‘왜 이런 사고가 발생했지? 왜 초기 대응을 하지 않았지?’ 배가 침몰하는 과정을 다시 보아도 슬픔이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어떠한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물론 개개인의 서사를 듣거나 영정 사진을 보는 순간 눈가는 촉촉해졌다. 그러나 300명 개개인의 서사를 듣고 함께 애도할 정도로 15살의 감정 자본은 충분치 않았을뿐더러, 국가가 사라진 비현실적 현실을 마주한 충격은 감정 불감증을 유발했다. 세월호가 천천히 침몰하는 이미지는 영화 한 편의 엔딩처럼 아른거렸고 결국 응어리 씨앗을 남겼다. 그 꽃의 이름은 시간 흘러 ‘각자도생’으로 판명 난다.
발터 벤야민은 ‘사유이미지’라는 개념을 착안한다. 충격받은 경험이 마음속에 이미지로 남고, 그 이미지는 무의식적으로 어떠한 결론과 판단을 내리도록 이끈다. 그리고 정당화를 위해 사유를 촉진시킨다. 즉, 사람들은 이성적 논리적으로 사유한다고 믿지만 실제로 사유는 감각적으로 이루어진다. 이성은 정서적으로 이미 내려진 결정을 정당화시키는 장치이다.
세월호 사건과 배가 침몰하는 사유이미지는 현재 2030 세대가 각자도생 태도를 지니게 만들었다. ‘국가가 나를 지켜주지 못하니 나 혼자라도 잘 살아 남기 위해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 한국 사회가 불특정 타인에 대한 신뢰도가 OECD 국가 중 최하위권이라는 사실, 총기 소지가 합법인 미국보다도 낮은 순위라는 사실이 납득되는 이유다. 더군다나 1029 이태원 참사 골목을 바라보며 “압사? 뭐 그냥 뇌진탕 이런 거겠지”라고 중얼거리던, 수해 복구 현장에서 신림동 반지하 창문을 쪼그려 앉아 내려다보는 대통령. 또다시 국가가 사라진, 도무지 견딜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무력감은 커지고 각자도생 경향은 더 짙어진다.
인간은 사유 이미지를 가슴 한구석에 품고 살아간다. 그 이미지를 의식적으로 명확하게 떠올리거나 언어로 표현은 못 한다. 그러나 사유 이미지는 강력한 힘을 응축하고 있기에 때가 되면 반드시 폭발한다. 깊은 상처와 분노는 가면을 쓸 뿐 사라지지 않는다. 응축된 깊은 상처와 분노의 일부가 이번 총선에서 폭발되었다.
이번 총선 당선자는 이런 시대의 흐름을 이해하기를 바란다. “젊은이들이 망친 나라 노인이 구한다.” 이런 터무니 없는 주장을 굳이 반박하고 싶지 않다. “노인들의 망침 때문에 나라 없는 젊은이가 되었다”는 사실부터 인지하기를 바란다. 몇 차례 국가 상실 사태를 겪어 정치를 냉소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2030세대의 서사를 이해해 주고 각자도생 태도를 완화해 주길 바란다. 교실 안 혼자서 무기력하게 앉아 있는 학생들은 교실 밖 벌을 서며 쿡쿡대는 아이들을 보며 스스로를 자랑스럽고 뿌듯하게 여기지는 않는다. 그리고 교실 밖 웃음을 피우는 학생들은 교실 안 고독한 학생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철학이 언어를 빼앗긴 존재의 언어가 되어 주면서 진리를 좇는 것처럼, 정치는 언어를 빼앗긴 존재의 신음을 듣고 받아쓰기의 태도로 정의를 좇아야 한다. 진정한 정치인은 처음부터 글쓰기 하는 자가 아니다. 스스로를 자만하여 귀 닫고 글쓰기 하려는 자는 반드시 도태된다. 민심을 듣고 정확하게 받아쓰는 것이 그들의 첫 번째 책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