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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반 Oct 18. 2024

마음의 성장이 멈춘다는 것은

내면 아이

“넌 이제 어른이 됐잖아. 엄마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너를 갉아먹는다면 그 노력은 그만두는 게 좋아. 때로는 나도 네가 이해 안 될 때가 많아. 감정을 움켜쥐지 말고 차라리 엄마한테 말로 네 생각을 말해. 하.”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지겹다는 말끝의 탄식과 무엇보다 이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간의 속사정을 공유해 온 막역한 지인의 입에서 나온 이해할 수 없다는 참담한 말이 내 마음을 할퀴었다.


   그래, 오랜 시간 푸념하듯 풀어놓는 말들을 들어주기가 쉽진 않았겠지. 나라도 지겨웠을 거야.

   그렇지만 누구보다 내 사정을 아는 사람인데 나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을 굳이 할 필요가 있어?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틀린 말은 아니잖아. 어쩌면 나를 위한 말이지.

   하지만 그렇게 한숨을 쉬면서 별일 아닌 걸로 치부하는 건, 속상하고 기분 나빠.     


 어쩌면 별 의미 없이 건넨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상대와의 오랜 인연과 그에게 나의 속내를 가감 없이 드러내 왔던 마음의 크기가 기본값이었던 나는 큰 의미를 부여한 듯했다. 지나가는 말에 베이고 구겨진 나의 마음은 여러 가지 감정들이 한데 뒤섞여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상대의 말을 객관적으로 생각하려는 자아와 주관적으로 해석하려 드는 자아가 서로의 생각을 늘어놓는 가운데 내 안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내면 아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육체적으로는 흰 머리칼이 듬성듬성 보이는 어른의 모습을 한 나의 내면에 웅크리고 있던 아동기의 어린아이가 지인의 말에 울고 있었다. 어릴 때는 어린데 뭘 아느냐고, 커서는 좀 배웠다고 유세하느냐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될 일을 그렇게 생각하는 네가 옳지 않은 거라는 엄마의 말들로 얼룩진 상처를 가진 아이였다. 나의 생각이나 감정을 그대로 수용 받아 본 적 없는 아이였다. 그래서 오랜 지인의 ‘너를 이해할 수 없어’라는 말에 생채기가 났던 모양이다. 몸은 자랐지만, 자라지 못한 어린 마음이 나의 내면을 휘젓고 다니는 것이다. 특히 타인의 감정을 예민하고 민감하게 읽어내는 나의 기질적 특성이 알 수 없는 여러 감정을 뒤섞어 불을 붙이는데 기름을 부었다. 나는 그 내면 아이를 차분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마음을 쓰다듬으며 그대로 받아주었다.     


  그래, 서운하고 기분 나쁠 수 있지. 내 상황과 감정을 모두 공유하고 오랜 시간 관계를 유지해 오며 의지했던 마음이 한 번에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을 거야. 넌 어른이지만 너의 어리고 연약한 내면의 아이도 그 말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서운하고 기분이 상했던 거야.     


 또 다른 내가 나의 작고 연약한 아이의 상처를 다독였다. 그리고 그 아이의 울음이 잦아들 때쯤 나는 비로소 어른으로서 객관적으로 상황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누구나 어릴 적 마음의 상처쯤은 하나씩 가지고 살아간다. 그게 자신의 인생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 정도로 미비하다면야 문제 될 게 없지만, 대다수는 그렇지 못하다. 그 마음의 상처를 품고 마음 한편의 작고 좁은 방에 내면 아이가 살고 있다. 그렇게 나는 어른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의 내면 아이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래서 여러 감정이 뒤섞이는 감정 사슬에 마음이 탁, 걸리면 아이처럼 울었다. 껍데기만 어른인 채로, 달래 줄 누군가를 그렇게 기다리며.

 감정 기복이 심하고 자존감이 낮으며 인간관계에 어려움이 생기는 등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했을 때 드러나는 증상은 말로 다할 수 없이 다양하다. HSP의 경우에는 삶의 뿌리가 흔들릴 정도로 그 과정이 힘겹다. 충격적인 말로 들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한 사람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부모와의 관계에서 파생되는 모든 경험이 90%라고 생각한다. 인간사회에서 생기는 불협화음들은 모두 ‘관계’에서 비롯된다. 사회 구성원이 될 아이가 태어나 처음 맺는 관계는 ‘부모’다. 그리고 그 아이가 사회로 나와 구성원의 역할을 하기까지 일련의 과정에 부모의 영향이 절대적이다. 부모가 세상을 바라보는 사고관이나 타인을 대하는 자세, 은연중에 입으로 뱉어내는 말 하나까지도 아이는 영향을 받는다. 그것이 옳은 건지 그른 건지 판단할 수 없는 상태에서 새겨진 상처까지도 필터 없이 그대로 수용한다. 요즘이야 아이의 감정이나 기질을 잘 다루고 살피는 어른들이 많아진 시대지만, 이전에는 그저 어른인 부모의 말과 행동이 틀림없이 옳은 게 당연했다. 하지만 어른이라고 해서 모두 바른 생각을 가지고 옳은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세 살 아이에게도 배울 점이 있으면 어른이라도 배워야 한다고 했다. 부모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었고, 그 아이가 부모를 한 인간으로서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도 커졌다는 것을. 자식들에게 키워줘서 감사하다는 말을 듣는 부모는 다수일 수 있으나 존경한다는 말을 듣는 부모가 흔하지 않은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 역시 환경이 어떠했건 어려움 속에서 나를 키워낸 부모에게 감사하다. 하지만 존경스럽다는 말은, 물음표로 남는다.


 마음의 성장이 멈춘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마음에 상처받은 내면 아이들이 많다는 얘기다. 기억도 나지 않을 상처들이 나의 무의식 속에서 체화된 상태로 얼마나 많은 내면 아이로 웅크리고 있었을까. 그런 상태로 몸만 자라 어른이 되었고 그런 내게 부모도 세상도 이제 어른의 책임을 지라고 한다. 지나간 시간은 다시 설정할 수 없다.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지만, 환경 탓, 부모 탓 하기보다 과거의 상처가 지금 나에게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주는지 관찰하는데 에너지를 쓰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 현명하다. 일상에서 불쑥 존재를 드러내는 나의 내면 아이에게 또 다른 내가 따뜻하게 품어내는 내면 돌봄의 과정을 수없이 반복해야 한다. 그래야 진짜 어른이 될 수 있다. 나는 나의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읽어내느라 내 감정은 눌러두는 나의 성향이 답답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었을 테지. 오랜 시간 내 마음을 들어줘서 고맙다는 말을 전하자. 그리고 앞으로는 남보다는 내가 나에게 기댈 수 있도록 마음을 건강하게 키워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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