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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라니 Jan 22. 2024

Φαέθων / Phaethon

빛나는 추락

 유투브가 너무나 대중화된 요즘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어린이 필독서 거의 0순위에 달하는 책이 있었으니 바로 <그리스 로마 신화>입니다. 학교 도서관에 전권이 구비되어 있지 않은 곳이 없었네요. (이젠 저작권 문제로 옛날의 그림체를 볼 순 없게 되었지만)  


 만화책 읽히면 자식 농사 망하는 줄 아는 엄마들 사이에서 '먼 나라 이웃나라'와 함께 유일하게 합법적으로 읽어도 되는 만화책이어서 편안하고 즐겁게 읽은 책이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진짜 이런 걸 애들한테 읽혔나 싶은 수위와 내용의 이야기들이 많았지만 그때는 그런 줄도 모르고 재미있게 읽었네요.


(<카드캡터 체리>에서 도진,청명이 사귀는 사이었단걸 어른이 되어 아는 것과 비슷한 느낌입니다... 초딩때는 친구인 줄만 알았는데.)


 아마 그런 텍스트를 받아들이는 감각에 대한 괴리를 처음으로 느꼈던 게 조지 오웰에<동물농장>이고 가장 강렬하게 느꼈던 게 다자이 오사무의<인간실격>아니었나 싶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단지... 인간들 못됐어... 정도로 생각하던 것에. 이렇게 분노에 가득 찬 악질적 화자가 담겨 있는지 25살이 되어서야 알았고.

 20살엔 폭풍 같았던 감정으로 받아들이던 게 25살엔 차분한 고요로 받을 수 있게 되기도 했네요. 물론 후자가 훨씬 더 뜨겁지만. 요조 삶을 부정할 필요가 없어진 순간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것도 삶이라 생각하게 되었네요.


 원래 읽은 책은 잘 안 읽는 편이었는데 요즘은 다시 읽어볼까 하는 생각이 드는 책들이 많이 있습니다.(물론 쉽진 않네요... 아직도 안 읽은 책이 도서관에 너무 많아...)


 문득 그런 새로운 시각을 통감할 때가 있는데 가장 최근엔 '파에톤'을 보며 그런 감각을 느꼈습니다.


 태양을 아버지로둔 사생아 '파에톤'입니다.


(파에톤 신화를 아신다면 스킵)

태양신의 아들 파에톤은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른 채로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아들이 사춘기가 되자 아버지에 대해서 말해 주었다. 파에톤은 이 사실을 친구 에파포스에게 말했다가 거짓말쟁이라고 놀림을 당하고는 직접 아버지를 찾아가 자신이 태양신의 아들임을 증명하고자 한다.

오랜 여행 끝에 해가 떠오르는 동방의 헬리오스 궁전에 도착한 파에톤은 드디어 아버지 헬리오스를 만나 자신이 태양신의 아들임을 인정받는다. 헬리오스는 그동안 아들을 돌보지 않은 미안함에 파에톤에게 무엇이든 들어줄 테니 소원을 말해 보라고 했고, 파에톤은 아버지의 태양마차를 하루만 직접 몰아보고 싶다고 말한다.

헬리오스는 아차 싶었지만 이미 한 약속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헬리오스가 아침마다 몰고서 너른 하늘을 지나 다시 오케아노스 속으로 뛰어드는 태양마차는 네 마리의 날개 달린 거친 천마들이 끄는 거대한 마차로 파에톤이 몰기에는 너무나 위험했다. 헬리오스는 무엇이든 다른 소원을 말해 보라고 했지만 파에톤은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헬리오스는 아들에게 마차를 내주며 절대로 정해진 길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한다. 그러나 파에톤의 힘으로는 거친 천마들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가 없었다. 마차가 궤도를 벗어나 너무 하늘 높이 올라가자 대지는 온기를 잃고 꽁꽁 얼어 버렸고 반대로 대지에 너무 가까워지자 너무 뜨거워져 불이 붙을 지경이 되었다. 세상은 재앙에 휩싸였다.

“대지는 가장 높은 곳부터 화염에 휩싸이며 습기를 모두 빼앗겨 쩍쩍 갈라져 터지기 시작했다. 풀밭은 잿빛으로 변했고, 나무는 잎과 더불어 불탔고, 마른 곡식은 제 파멸을 위해 땔감을 대 주었다. (···중략···) 대도시들이 성벽과 더불어 파괴되고, 화재는 전 민족들을 그들의 부족들과 함께 잿더미로 바꿔 놓았다.” (오비디우스, 『변신이야기』). 북아프리카에 사막이 생기고 에티오피아 인들의 피부가 까맣게 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보다 못한 제우스는 벼락을 내려 파에톤이 초래한 혼돈을 끝낸다. 제우스의 벼락을 맞은 마차는 산산조각이 나고 파에톤은 새카맣게 그을린 채 추락하여 에리다노스 강으로 떨어졌다. 오비디우스에 따르면 파에톤의 누이인 헬리아데스(헬리오스의 딸)들은 동생의 죽음을 슬퍼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다 포플러 나무로 변했고, 그들이 흘린 눈물은 호박(보석의 일종)이 되었다고 한다. 히기누스는 헬리아데스가 포플러 나무로 변한 것은 아버지 헬리오스의 허락 없이 파에톤을 위해 전차에 멍에를 씌운 짓 때문이라고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파에톤 [Phaethon] - 신화 속 인물 (그리스로마신화 인물백과, 안성찬, 성현숙, 박규호, 이민수, 김형민)

 저 작은 아이가 머리에 남았던 건 아마... 그때부터도 저를 얽매는 남에게 민폐 끼치지 말아야 하지 하는 답답함이 아니었나 싶은데... 세상에서 가장 부질없는 인정욕구의 먹힌 가난한 사람이란 인식에 더 그렇지 않았나 싶네요. 어린 마음(그때도 조금 비뚤어져 있었습니다. 그때는 15도 정도. 지금은... 90?)에도 혐오스러운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던 것 같네요. 게다가 그 욕망의 투영 대상이 위대한 아버지라니... 위대하신(자수성가도 꽤 위대한 업적이라 생각합니다. 특히 본인에게.) 아버지에 대한 혐오로 가득 차 있던 그때의 저로서는 아예 이해하지 못할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저를 한 문장이 움직였네요.



여기 파에톤이 잠들다. 아버지의 마차를 몰던 그는 비록 그것을 제어하지는 못했지만 큰일을 감행하다 떨어졌도다.

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 -파에톤의 비석에 쓰인 문장

 모든 사람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욕망이라 생각합니다. 정말 사소한 것부터 정말 위대한 것. 정말 작은 것부터 정말 큰 것. 모두 욕망이라는 뿌리 위에 자라난 나무들이니까요. 저도 결국엔 인정욕과 잔존욕으로 이뤄진 사람이기에 이렇게 열심히 글을 써 내려가는 건 확실합니다. 저의 대부분은 남기는 것과 사랑받는 걸로 이뤄져 있다는 걸 많이 느끼네요.


 그리고 그런 욕망들은 결핍에 의해서 더 증폭됩니다. 파에톤의 하늘로 솟아오르고 싶을 만큼 거대한 욕망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아마 아버지의 부재가 크지 않았나 싶네요. 그의 욕망과 그의 능력이 하나 되는 날. 그는 아버지를 만나 그의 마차를 타고 하늘로 날아오릅니다. 자신이 그 마차를 몰 수 있는지 없는지 아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는 날아오르고 싶다는 욕망을 이뤘고 그 이후 남은 것이 단지 추락이더라도... 그 순간만큼 태양처럼 가장 빛날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Φαέθων(phaethon) 그리스어로 빛나는 자라는 뜻으로 그는 그래도 이름 값은 한 셈이네요.


 아마 그가 새롭게 제게 다가온 건 어느 정도 동질감이 느껴져서 일지도 모르겠네요. 수많은 결핍 속(뭐 사실 도련님의 투정같이 쓰잘데기 없는 것뿐이지만), 오만가지 욕망 사이, 언젠가 한번 빛날까 이리저리 헤매며 세상을 떠돌고 있을 뿐입니다. 그게 힘들고 지치더라도 무언가 있기를 바라며 계속 걸을 수밖에 없는 순간이네요.


 사실 빛나는 그 순간이 오더라도 제가 감당할 수 있을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 사실은... 더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 빛나는 순간에도 개인적 구원 따윈 없다는 걸. 결국 구원은 본인 안에 있는 것인데. 한 조각 없는 구원을 밖에서 계속 찾는 전 구원받지 못할 거라는걸. 


 점점 글을 쓸수록 저를  더 잘 알아가고 점점 배울수록 사람을 더 알아가도 저는 아직 빛나는 순간을 찾고 있는 것 같습니다. 황금 마차를 타는 순간에 제 마음이야 어떻든... 사람들이 그걸 보고 저를 반짝였다 생각해 준다면... 그 즉시 추락해도 별 상관없을 것 만 같은 기분.



요제프 하인즈 <파에톤의 추락>, 1595

그게 누군가에겐 '아름다움'으로 남지 않을까 소망해 볼 뿐. 지금 저 그림을 보고 제가 느끼는 감각처럼.

어차피 떨어질 거면... 빛나면서 떨어지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네요.



오스카 와일드, 황병승, 다자이 오사무, 샤를 보들레르


제 인생을 구성해 준 사람들인데... 왜 이렇게 다 한결같이 끝이 끔찍할까요(옥사. 자살. 자살. 매독사... 젤 오랜 산 게 49세. 대단들 하십니다.). '미'에 미쳐사는 사람들은 빨리 죽는 모양입니다. 장수한 유미주의자 따위는 들어본 적이 없네요. 그럴 만도 한 게 삶은 그렇게 아름답지 않으니... 모두들 태양처럼 한번 반짝이고는 다 타죽어 버렸네요. 그래서 더 오래 강렬하게 남은 걸까요. 이런 사람들을 보며 아름답다 느끼는 저 같은 사람들이 문제겠죠...


그래도 반짝임을 찾다 떠난 삶은 그렇게 불쌍해 보이진 않습니다. 최소한 저한테는요.


나라도 꼭 오래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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