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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도시락, 화명생태공원에서 다시 피어나다

by 성희

어제 슈퍼맨처럼 재활용쓰레기를 분리수거하고 집안정리정돈을 한 다음 남편은 홀로 화명생태공원에서 차박을 했다. 퇴직 후 24시간을 붙어 지내며 잦아진 다툼에, 우리는 '따로 또 같이'의 미학을 배워가는 중이다. 그러나 오늘 아침, 화명강변공원에서 같이 걷기로 하여 그의 곁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십수 년 전 추억의 샛길을 걷는 듯했다.


​긴 터널을 지나 화명생태공원에 들어서자, 눈에 익은 장소가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그래, 저기였지. 아이들은 서울과 기숙사 고등학교로 떠나고, 우리 둘만 남았던 그 시절. 남편은 자신의 아이디를 '내 남은 인생 집사람을 위하여'로 설정했을 만큼, 나만을 바라보던 때였다.

​그는 퇴근 후 호포생태공원에서 늘 나를 기다렸다. 그리고 우리는 양산천을 따라 걷고 또 걸어, 화명생태공원까지 12km가 넘는 길을 함께했다. 퇴근 후 지친 몸을 이끌고 걸었을 그 길, 목적지는 바로 이 도시락 장소였다.

​집에서 단돈 몇 천 원짜리 재료로 싼 소박한 도시락이, 저녁노을이 드리운 낙동강변에서는 50만 원짜리 최고급 만찬이 되었다. 그 순간의 평화와 충만함이 문득 그리움이 되어 몰려왔다. 눈물이 핑 도는 것은, 단지 과거의 행복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다툼이 잦았던 현실 속에서도 여전히 그때의 사랑이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리라.



​남편은 터널 너머 주차장에 있었다. 십여 년 전에는 흙먼지 날리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짙푸른 숲을 이루고 있다. 자연의 경이로움과 세월의 흐름에 경외감이 들었다. 그는 캠핑 의자에 앉아 휴대폰을 읽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고독을 즐기는 듯 평화로웠다.

​"어때? 오랜만에 혼자만의 시간 좋았어?"

​묻는 내 말에 남편은 씩 웃었다. "당신 올 시간만 기다렸지." 그 한 마디에 잦았던 다툼도, 쌓였던 서운함도 눈 녹듯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잘 정비된 흙길과 넓은 보행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오늘은 남편이 앞서 나가지 않고 나와 보폭을 맞춘다. 오순도순 이야기꽃을 피우며 걷는 이 길이 얼마만인가. 늘 앞장서서 나를 이끌던 그가, 오늘은 옆에서 발맞춰 걷는 동반자가 되어 주었다.


​오늘의 목표는 연꽃단지였다. 드디어 연꽃단지에 도착했지만, 연꽃은 이미 지고 없었다. 대신 그 자리를 노란 코스모스가 가득 채우고 있었다. 맑고 높은 가을 하늘 아래, 자연스럽게 피어난 황화 코스모스의 물결은 참으로 예뻤다. 가슴이 시원해지는 풍경이었다. 연꽃이 없으면 또 어떤가.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아름다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생의 변곡점처럼.

​혼자였다면 잘 오지 않았을 길, 그가 곁에 있으니 기꺼이 걸었다. 우리에게는 함께 걸었던 12km의 추억과, 이제는 따로 또 같이 걸어갈 앞으로의 시간이 있다.

​집으로 돌아와 나는 점심으로 김치찌개를 끓였다. 전업주부로서의 내 실력이 맛없을까 봐 걱정했는데, 남편은 한 그릇을 뚝딱 비우며 "당신 김치찌개가 최고야"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 단순한 칭찬에 나는 다시금 뿌듯함을 느꼈다.

​사랑하는 남편, 우리의 삶은 호포생태공원에서 화명생태공원까지 걸었던 12km처럼 길고, 도시락처럼 소박하지만 50만 원짜리 식사처럼 값진 것이다. 다투기도, 그리워하기도, 그리고 다시 사랑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연꽃이 지고 코스모스가 피어나듯, 우리의 삶도 그렇게 아름답게 변화하며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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