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어제저녁, 화명생태공원에 있는 차로 퇴근하여 잠을 자고 오늘 오전 10시에 집으로 '출근'했습니다. 예전에 인간극장에서 집을 두고도 차에서 주무시는 분을 보고 의아했는데, 요즘 남편이 딱 그럽니다. 집 대신 차로 잠을 자러 갑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남편은 곧바로 전투적으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오늘 첫 작업은 배관 청소였습니다. 화장실 두 곳과 싱크대를 전문가처럼 멋지게 분해하더군요. 떼어낸 부분은 심하게 더럽고 냄새도 났지만, 따뜻한 물과 세제로 깨끗이 닦아내고 주방 휴지로 물기를 제거한 후 다시 조립했습니다. 세제 향이 은은하게 배어 집안이 향긋해졌습니다. 내 마음도 정화되는 느낌이었습니다.
40년간 직장생활을 하는 저와 조기 퇴직한 살림을 하던 남편, 남편은 정기적으로 이렇게 배수관 청소를 해왔다고 합니다
. "당신 최고!"라며 두 개의 엄지(쌍엄지 척)를 치켜세웠습니다. 남편은 "당신이 알아주지 않아서 그렇지, 나는 멋진 사람이야"라고 말했습니다,
겸손하면 어디가 덧나나.
싱크대 청소를 시작한 김에 그릇 정리도 함께 진행했습니다. 제가 시집올 때 해 온 무거운 접시들, 한때 된장찌개를 끓인다고 크기별로 샀던 뚝배기들, 10년 전 혼자 차박을 갈 때 밥 굶지 말라며 샀던 너무 커서 사용하지도 못한 스탠리 보온밥통, 커피 메이커 등등. 쓰지는 않지만 버리지 못하던 물건들이 과감히 버려졌습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쌀들을 모으니 섞여서 5kg 정도의 잡곡이 생겼습니다.
남편의 빠르고 강력한 추진력 덕분에 버릴까 말까 고민할 시간조차 없었습니다. 싱크대 안은 이제 널찍해졌습니다. 몸이 아파 일찍 귀가한 아들과 점심을 먹는데 식기가 부족한 해프닝도 있었습니다. 짧은 시간에 싱크대 정리가 깔끔하게 끝났습니다.
방, 거실, 뒷베란다는 어느 정도 정리를 마쳤지만, 앞베란다와 창고는 머리 아플 정도로 짐이 많습니다. 웬만한 추억들이 모두 거기에 있습니다. 쓰레기봉투를 사다 놓았는데, 도자기류를 버리느라 봉투를 금세 다 써버렸습니다.
창고 물건들, 친구 작품인 종이접기 액자, 결혼 선물로 받은 도자기, 감사패와 상패 등 추억이 담긴 물건들도 모두 버려졌습니다. 사진 앨범도 버려야 할지 생각하다 잠시 보류했습니다. 베란다와 창고에 있던 물건들이 거실에 나와 가득합니다. 몸이 빠른 남편은 매일 버릴 수 있는 쓰레기는 모두 치워버렸고요. 재활용 수거일인 내일이 지나면 짐 다이어트를 마친 우리 집은 훨씬 환해지겠지요.
오늘은 정말 마음이 후련합니다 남편은 저 혼자 이삿짐 정리하는 것이 마음에 걸려 영동에서 차박을 하다가 부산으로 내려왔나 봅니다. 마음은 안 맞는 것 같아도, 이렇게 일을 척척 맞춰 잘 해내는 우리 부부입니다. 둘이서 하니 정말 빨리 끝나 내일이면 모든 정리가 끝날 것 같습니다.
잔소리는 여전히 남편 입에 붙어 있지만, 오늘만큼은 슈퍼맨이었습니다. 집안일을 정말 잘하네요. 남이 해주는 밥이 제일 맛있다며 외식을 하겠다던 남편의 말이 생각나 오늘 점심은 제가 해 주었는데, 정말 잘 먹었다고 합니다.
결국 이삿짐 정리를 제가 혼자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려 내려온 그 마음 때문이라면, 그 잔소리는 그냥 애정의 표현으로 들어야 할까요? 오늘 그는 저에게 더할 나위 없는 슈퍼맨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