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 일과 속에 문득 머리가 띵했습니다. 아차! 싶었던 건 매일 챙겨 먹던 혈압약이었습니다. 남편과 함께 있을 땐 늘 아침마다 혈압약, 잇몸약은 물론 오메가3, 비타민까지 꼼꼼하게 챙겨 먹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천연 아로나민이라 불리는 구기자차와 체온을 1도 올려준다는 생강차를 마셨고, 혈전 용해에 좋다는 홍화꽃차와 귤피차까지 더하며 건강을 살뜰히 돌봤죠. 하지만 홀로 지내며 약 먹는 것도 잊고 딸과 냉커피만 즐기다 뒤늦게 약 먹을 알람을 설정했습니다.
긴장감 속에 매일 약은 챙겨 먹었지만, 며칠은 혈압약 외 다른 약들이 어디 있는지 몰라 그것만 먹었습니다. 집안 정리로 24층 집순이가 되니 머리가 아픈 것도 당연했습니다. 같이 있었다면 억지로라도 운동을 갔을 테니까요. 남편의 잔소리 속에는 늘 나에게 꼭 필요한 조언들이 담겨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새벽에 추위를 느끼면서도 얇은 옷차림 그대로 잠을 이겨내다 결국 감기 초기 증세까지 겪었습니다. 기침과 으스스한 떨림에 더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비상 감기약을 찾아 헤맸습니다. 늘 남편이 챙겨주던 약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기에, 오늘 남편을 만난다는 사실이 더욱 반가웠습니다.
차박 여행기 연재를 위해 영동에서 차박을 하다 집 앞까지 마중 온 남편과 드디어 만났습니다. 조금 야윈 듯했지만 에너지가 넘치는 모습이었습니다. 혼자만의 차박이 그에게도 자유와 재미를 만끽하게 해주는 듯했습니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 멀리 가지 못하고 경주로 향했습니다. 첫날은 무장산의 아름다운 억새를 보기로 했고, 둘째 날은 첨성대 근처에 머물기로 했습니다. 지난주에 다녀왔는데도 나를 위해, 그리고 다시 걷고 싶은 길이라며 무장산에 동행해 주는 남편이 고마웠습니다.
숨 고르며 오르는 무장산
무장산 등산 코스는 주차장에서 암곡까지 1.5km를 걷고 오른쪽 코스로 돌아 정상까지 2.8km를 오르는 길입니다. 처음 500m는 **된비알(급경사)**이라 숨이 가빴습니다. 가볍게 오르는 남편과 늘 거리를 두고 천천히 올랐습니다. 다리보다 숨이 가쁜 나를 위해 스스로 작은 목표를 정했습니다. 100걸음 걷고 쉬기, 50걸음 걷고 쉬기 등 경사도를 보며 목표를 조절했고,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오면 다시 출발했습니다. 이것이 스스로 내 몸을 사랑하는 방법이었습니다.
300m쯤 올랐을 때, 다행히 다리가 아프지 않았고 꾸준한 오르막길을 걸었습니다. 온몸에 땀이 흘러 끈적했지만, 몸은 가벼워지는 기분이었습니다. 능선에 다다르자 남편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쉴 새 없이 흐르는 땀을 닦아주려 남편이 건넨 손수건을 사양하고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땀 닦는 것조차 힘들어 남편은 몇 번이고 흘러내리는 땀을 직접 닦아주었습니다.
억새가 나타나는 멋진 곳에서 한참을 쉬었습니다. 자연의 기를 받으며 사진도 찍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남편은 자신보다 빨라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다는 재미있는 일화 속 여성분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외손자 육아로 주중에는 등산 시간이 없다는 그 여성분보다 느린 자신이 민망해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다고 너스레를 떨었죠. 영동에서의 식당 이야기, 월류봉 둘레길 이야기 등 우리의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도착한 억새밭은 그리 면적이 넓진 않았지만, 참 좋았습니다. 등산 내내 남편은 잔소리 없이 묵묵히 동행했습니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은 나와 달리 남편은 땀 한 방울 나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내려오는 길은 멀었지만 수월했습니다. 휴식 시간을 포함해 11.5km, 5시간의 산행을 마쳤습니다.
주차장에서 옷을 갈아입고 세수를 하니 비로소 살 것 같았습니다.
둘째 날, 차박지인 첨성대 근처로 향했습니다. 남편은 주차비가 없는 새로 생긴 주차장을 기막히게 찾아냈습니다. 복잡한 주차장이었지만 마침 나가는 차가 있어 쉽게 주차했습니다. 피곤했지만 복잡한 주차장에 있는 것도 스트레스라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화장실조차 줄을 섰고, 화장지가 떨어져 관리인이 장애인 화장실에서 휴지를 가져오라 하기도 했습니다. 화장실을 나와 걷다 보니 첨성대였습니다. 수많은 인파 속을 지나 계림을 지났습니다. 큰 나무들 아래 푸릇푸릇하게 자란 맥문동이 좋았습니다. 내물왕릉을 지나 교촌 마을의 향교와 최부자집을 둘러보고 월정교로 향했습니다.
야간 조명이 켜지기 한 시간 전, 교촌 마을의 기와집들을 돌아보았지만 20분도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월정교 앞으로 돌아와 빈 벤치에 앉아 6시가 되기를 기다렸습니다.
6시가 되기 전 켜진 월정교의 은은하고 아름다운 조명에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왕과 왕비 복장을 한 스리랑카에서 온 젊은이들의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먼 나라까지 와서 체험을 즐기는 그들의 젊음이 참 아름답다고 느꼈습니다.
아름다운 경주의 밤
돌아오는 길, 백일홍 꽃밭 너머 첨성대에도 은은한 조명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초승달과 절구질하는 토끼도 보였습니다. 왕릉들도 은은하게 불을 밝혔고, 월성으로 가는 길, 그리고 동궁과 월지의 조명도 참 아름다웠습니다. 마치 신라의 밤을 거니는 듯했습니다.
다음 날, 오릉, 대릉원, 동궁과 월지를 돌아볼 계획이었지만 아쉽게도 비가 오는 바람에 집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나를 태워다 준 남편은 집에 들어오지도 않고 다시 자유를 찾아 떠났습니다.
나는 나대로 자유 부인으로, 남편은 남편대로 자유를 찾아 떠났습니다.
아직은 자유가 달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