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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홀로 평화로운 오후에 그가 들아왔다

by 성희

이사온지 보름, 정리할 것은. 날마다 생긴다.​오늘은 방마다 전등을 교체했다. 아침에 로켓배송으로 온 리모컨이 있는 등은 키가 큰 아들이 쉽게 달았다. 커넥터에 전선을 끼우고 너트만 잠그면 되니 별로 어렵지 않다. 다만 나는 키가 작아서 천장에 손이 닿기가 어렵다.

​12시쯤 거실 등이 도착했다. 도서관에 간 아들은 저녁 8시쯤 되어야 돌아온다. 그때는 햇빛이 없어 두꺼비집을 내리기가 힘들다. 키가 작은 내가 달아야겠다. 제법 높은 책상을 발판으로 놓고 올라가 교체했다. 천장이 정리되니 집안도 환해진다.


고요한 오후를 깨뜨린 뜻밖의 방문


​그리고 베란다에 쌓아둔 종이박스를 정리했다. 추석 연휴라 분리수거를 못 해 양이 많았다. 쿠팡 에 주문을 맗이하니 종이박스, 비닐등 재활용쓰레기가 너무 많다. 그래도 정리를 했으니 금요일 오후에 아이들과 같이 나가서 내면 된다.

​나 홀로 점심 식사로 나물 반찬을 해서 비빔밥을 비벼 먹었다. 그리고 나른한 오후, 게임에 빠졌다. 나만의 휴식 시간이다.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지금 올 사람이 없는데, 누구일까? 공부하러 간 아들이 일찍 돌아왔을까? 여행 간 딸의 조기 귀가일까? 아니면 아파트 반장일까?

​그가 돌아왔다.

​문을 열어보니 남편이었다. 아침에 영동에 있다고 했는데 꾸무리한 날씨 때문에 집으로 왔다고 한다. 목도 쉰 듯하여 아픈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된다.


추진력은 일등


​폭풍 추진력, 그러나 나의 질서를 헤집다

​오자마자 남편은 전투적으로 집안 곳곳을 살펴봤다. 이사짐 정리하면서 나온 대형폐기물들이 아직 집안에 있다. 침대 머리장과 아일랜드 식탁 의자, 전신 거울 둘 같은 대형 폐기물부터 경비실 앞으로 가지고 간다. 우리가 이사 가기 전까지는 경비실에서 비용을 받았는데, 지금은 폐기물 업체에 바로 연락하고 지불해야 한다고 경비 아저씨가 말씀해 주셨다. 그렇지만 대형 폐기물은 경비실 앞에 두어도 된다고 한다.

​차일피일 미루던 것을 하고 나니 속이 시원하다. 집안이 훤하다.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곧바로 해버리는 추진력은 일등이다. 이건 참 고마운 추진력이다.


딸이 사둔 좋은 원두가 있어 블랜드에 갈아서 맛있게 내린다'. 남편은 커피는 사양하지 않는다. 감사의 뜻으로 정성스럽게 커피를 내렸다. 그런데 LED등이 어둡다고 몇번이나 말한다. 나는 너무 밝은 것 같은데 생각이 다른 모양이다.

계속 남편의 잔소리 폭격이 시작됐다. 내가 대충 끼워둔 화장실 하수구 트랩을 다시 작업하면서부터이다. 내가 헤드부분을 교체하기 힘들어 세면대 아래쪽에 있는 배수관만 끼워서 쓰기로 했다. 그리고는 나머지 배수관 부속은 재활용쓰레기에 버렸다. 아직 버리지는 않아서 찾아왔는데 하나의 부속이 없어졌다. 찾아도 없는데 자꾸 들먹여'나를 부담스럽게 한다.

그 후 내가 해둔 재활용 쓰레기를 자기방식대로 다시 정리하기, 딸이 산 음식물 발효기 링클의 위치 변경까지, 그냥 정리하는 것이 아니다. 쉴 새 없이 말이 나온다. 당부도 하고 조언도 하고 자신의 지식도 이야기한다. 이 많은 말들이 나에게 잔소리로 입력된다.

내가 주도적으로 살아도 집안이 잘만 돌아갔는데...... 나는 왜 이리 잔소리를 들어야할까? 머리가 아프다.

집에 있는 이것 저것 쓰레기봉지에 넣으며 이것도 저것도 버리라한다. 나의 뜨게질 도구, 캐리어 등등이다. 의견차이가 나면 화도 낸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 구기자차를 마시려고 했는데 차주전자가 없다. 고흥에 살 때 유리로 된 차주전자를 내가 두개나 샀었는데 나 모르게 버렸나보다. 유리주전자에 구기자차는 진한 노란색, 홍화차는 붉은색, 박하차는 초록색으로 참 예쁘게 우러 났는데


남편은 컵에 넣고 바로 우려내어 마시는 것을 선호한다. 나는 예쁜 작은 찻잔에 여러번 따라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는 나의 질서에 맞게 정리해둔 집안을 헤집어 버린다. 자신의 생각대로 밀어붙이는 사람, 추진력은 좋다. 그러나 나는 고구마 100개를 먹은 것보다 더 속이 답답하다.


저녁에 잠은 차에 가서 잔다고 한다. 이사온 후 나혼자 집정리를 하는게 안되어 보였던지 집정리를 해주려고 온 것 같다. 남편이 차에 가고 난 후 집이 더 어지럽다. 자신은 최선의 방법이라고 정리해주고 갔지만 내가 원하지 않은 방식이라 그런가보다. 완전히 차박여행을 떠나고 나면 나 방식대로 정리를 살 것이다.


그러나 집안 정리를 해주려고 온 마음은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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