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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진 May 21. 2024

겨울아이

Philippe Parreno

눈을 찌푸립니다. 햇살이 눈 부셔서, 눈이 찌푸려집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겨울이었던 것 같은데 벌써 왜 땀이 흐르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상하게 나는 겨울이 너무 깁니다. 겨울에 태어나서 언제나 겨울이 외롭기만 했던 나는 유달리 겨울에만 흔했던 헤어짐 하나가 없습니다. 어쩌면 역설적으로 내게는 겨울이 가장 평온했던 계절이 아닌가 싶습니다. 특별한 날이 많은 계절에 특별하지 않은 매일을 보내려 했던 나는 겨울이 정말 쓸쓸했을까요? 이렇게 사무치게 겨울이 그리워서 겨울을 쓰는 중인데 말이죠. 또다시 겨울을 기다립니다.


첫눈이었습니다. 사실 더 일찍 맞았던 눈이었는데 첫눈이라고 억지로 덮어 씌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눈은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하는데, 네 버스는 올 생각을 안 합니다. 나는 이미 세 번째 버스를 막 보낸 참이었습니다. 너는 어느 먼 동네에 살았고, 버스는 사십 분에 한 번씩 왔습니다. 좋은 핑계였습니다. 너도 굳이 의심하지 않았으니 완전 범죄였습니다. 나는 아직 버스가 안 온 거였고, 그 덕에 너와 첫눈을 봤고, 그래서 친구와 나란히 강남역 사거리에 서 있는 것뿐이다. 그해 겨울에 했던 거짓말은 전부 착했습니다. 나 하나만 아프면 숨겨지는 전부였으니까요.


눈이 찌푸려집니다. 간신히 잠들었으면서 왜 갑자기 깼는지, 방금 꾸었던 선명한 꿈을 떠올리려고 눈을 찌푸립니다. 찌푸린 눈꺼풀 사이로 눈물이 흐르지만 아무 의미 없는 것이라 모른 척합니다. 그래서 뒤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버스는 왔을까요? 하필 또 숨겨뒀던 기억이 틈을 비집고 나옵니다. 겨울은 아니었던, 그때는 네 전화에 잠에서 깼던 날입니다. 너는 울고 있었고 네 불행은 내게 스며들 준비를 끝냈습니다. 기다리겠다고 하지 말 걸 그랬습니다. 나는 그러고 몇 계절을 기다렸으니까요. 친구를 기다렸습니다.


내가 잃었던 친구는 내 모든 작품의 이름이었습니다. 이름 하나 사라졌다고 원고는 가치를 상실해서 그냥 뭉개버렸습니다. 단어 몇 개도 같이 버려서, 한동안은 표현하는 것이 서툴렀습니다. 똑똑한 인간이라고 자부했지만, 네 이름 하나 기억 못 해서 나는 겨울 두 글자를 붙잡았습니다. 나는 너를 겨울로 기억했습니다. 그래서 겨울에 죽고 싶었던 내가 겨울에는 죽지 말아야겠다고 혼자 약속했습니다. 내게 겨울은 그래야 했습니다. 나는 겨울이 정말 아팠을까요? 아니요, 나는 오늘도 겨울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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