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 위해 쓰고, 살기 위해 읽다.
생존 글쓰기
극본에서 나 자신으로.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마감시간은 정확히 엄수해야 한다는 것, 정확히 재단된 시간에 내 글을 끼워 맞추면서도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명료하게 표현해야 하는 것이 극본 쓰기의 원칙 중 하나였다.
방송은 분과 초로 움직이며 그것은 바로 철저한 자본주의의 논리에 따라서 흘러간다는 것을 배운 셈인데, 그것은 내게 곧 절대로 끊어지지 않을 사슬과도 같은 "구속"과 다름이 없었다.
구속을 즐기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라는 인간은 구속이 주는 심리적 압박감을 견디기가 고통스러웠다.
거대한 기업에서 나오는 핏줄로 tv라는 매체가 생명력을 이룬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그 피를 마시려니 독이 든 성배처럼 느껴졌다.
글쓰기의 배움 과정은 잃어버린 나를 찾게 했지만 꿈은 잠시 잃게 만들었다. 그러나 나는 곧 다시 극본이 아닌 글을 쓰기 시작했고, 써도 써도 갈증을 해결할 수가 없는 지경이 되었다.
나를 썼다.
돌아보는 글을 썼다.
글을 쓰며 보았다. 수위조절이 되지 않아 물이 가득 들어찬 댐이 무너질까 단단히 수문을 걸어 잠근 나 자신을. 댐이 터질까 봐 절대로 수문을 열지 않아 왔던 나 자신을 보았다. 열어야 터지지 않을 수 있을 텐데, 나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댐이 터져버리면 감당하지 못할 물길이 나를 집어삼킬까 봐 두려움에 떨었다. 두려운 나를 달래가면서 썼다.
감사한 독자분들이 어둡고 슬픈 내 글을 걱정해주셨다. 하지만 애써 노력하지 않았다.
나를 포장하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적어 내려갔다.
그동안의 아픔들을 글로써 모조리 토해 놓으며, 내가 가진 고통들을 바라보았다.
종이는, 나에게 그 어떤 평가나 조언도 하지 않았으며 비난이나 비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내 글을 듣고만 있었다.
나는 살기 위해 글을 썼다. 생존수영이 있는 것처럼 생존 글쓰기가 있었다.
생존 글쓰기가 나를 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왜, 아파야 했는가?
엉엉 울며 글을 쓰기도, 심장이 짓눌리는 고통을 참아가며 글을 쓰기도 했다.
통증 속에서 몸부림을 치면서 썼다. 나를 구성하고 있던 아픔들을 하얀 종이에 하나하나 꺼내놓고 보았다.
고통스러운 내가 보였다. 고통이 보였다. 그 고통을 바라보는 것이 무척 아팠다.
고통을 토하고 나면 괜찮아질 거라 생각했지만, 괜찮지 않았다. 토할만큼 토했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아팠다.
나는 다시 질문했다.
왜, 도대체 왜, 나는 이렇게 아파야 하는가?
그것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시, 소설, 수필, 인문학, 철학, 과학, 고전 책들을 탐독하기 시작했고, 애서가가 되었다.
수많은 책들에는 정답이 없었지만, 그들은 내게 질문을 해왔다.
"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불행이 있어. 불행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는 다 다르지. 불행을 바라보는 너의 태도는 어떠니? "
" 인간에게는 왜 불행이 찾아올까? "
" 세상에는 왜 불행이 존재할까? "
나는 그 질문에 하나하나 대답하기 시작했고, 그 대답은 바로 내가 가졌던 질문에 대한 답과도 연결되었다.
나는 살기 위해 글을 토했고, 결국 살게 되었다.
죽고 싶지 않아서 썼고 살고 싶어서 읽었다. 생에 관한 나의 질문과 답은 그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