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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들리는 민들레 Aug 03. 2024

17. 죄책감은 사랑이 아니다-사랑이란

나르시스트와 살아야 한다면



사랑을 죄책감으로 배우다.


사랑을 죄책감으로 배웠다.


사랑이 뭘까? 사랑이라는 주제는 내가 끊임없이 생각해 온 주제다. 도대체 사랑이라는 게 뭘까? 그게 뭐기에 사람들은 그걸 그렇게 갈구하고 떠올리고 그리워하기에 마지않을까? 도대체 그게 뭐기에? 조건 없는 것? 국경과 인종을 초월한 것? 열렬하고 열정적인 것? 아니면 오래오래 따듯한 것? 도대체 사랑이 뭘까? 당신은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는가?

사랑은 누구에게 배울까? 부모? 조부모? 친구? 선생님? 이성? 지인? 그것이 어떤 사랑이냐에 따라 다른가? 부모나 이성에게 배우는 사랑이 다른가?

 

나는 사랑을 죄책감으로 배웠다. 부적절한 존재인 것에 대한 죄책감이 사랑인 줄 알았다. 부적절한 존재가 하는 사랑은 어떤 사랑이었을까? 1. 항상 상대방을 살핀다. 2. 상대방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집중한다. 그리고 3. 그것을 주기 위해 노력한다. 그가 원하는 것이 내가 줄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최선을 다한다. 그걸 주기 위해서. 내가 준 것이 그에게 기쁨이 되면 나도 역시 기쁘다. 그가 기뻐하면 그게 나에 대한 사랑에서 나오는 기쁨이라고 여기며 사랑받는다고 느낀다. 그래서 계속 그 반복한다. 그가 원하는 걸 주기 위해 언제나 그를 살피고 그에게 집중이 되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 자신은 뒤로 밀려난다. 나의 욕구, 나의 감정, 나의 생각, 나의 느낌 같은 것들은 저 멀리로 밀려나는 것이다.


엄마는 나를 사랑했을까? 사랑하지 않았다. 자신의 욕구를 채워준 나를 사랑했을 뿐 원래의 나, 진짜 나는 사랑하지 않았다. 진짜 내가 나왔을 때 그녀는 나를 미워했고 억압하려 했고 통제하려고 했다. 그랬기 때문에 진짜 나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게 되었다. 진짜 내가 나오면 죄책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녀는 아주 오랜 시간 그것을 종용하고 이용했다.


죄책감은 자기 자신을 미워하게 만든다. 자기 자신을 미워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관점보다 타인의 관점을 더 많이 수용하게 된다. 편은 나를 사랑했을까? 아니다. 자기의 필요를 채워준 나를 사랑했다. 그렇다면 나는 그들을 사랑했을까? 아니다. 내가 그들을 채워줄 때 느껴지는 불필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느낌, 나는 그것을 사랑한 것이지 그들을 사랑한 것이 아니었다.

우울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고 나서야 그것을 깨달았다. 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많은 사람들이 그걸 사랑이라고 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하는 말 <나는 너를 사랑해>는 <나는 나를 사랑해. 그래서 네가 필요해>였다. 사랑은 없다고 그래서 사랑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에리히 프롬의 말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사랑은 필요.



대부분의 사랑은 <필요>이다.


가끔 너무나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온 부모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자녀들을 본다. 죄책감으로 부모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애쓰고 노력하는 자녀들을 볼 때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안타깝게도 그 사랑이 아니다. 죄책감과 사랑은 다른 것이다. 사랑이 있기 때문에 죄책감도 있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본질이 다르다.

종교에서는 믿음을 강조한다. 왜 그럴까? 종교를 유지하기 위해서? 사랑은 믿어야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부모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사랑인 것 같지만, 부모가 어쨌든 그 고통을 잘 통과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한 발 물러서 응원하는 마음이 사랑인지도 모른다. 사랑은 대신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영역을 믿고 기다려주는 것이다. 그의 영역을 대신해주고자 하는 것은 그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내 불안>이다.


힘들었던 삶을 자녀를 통해 보상받고자 하는 부모의 그 마음은 <자기 필요>이지 사랑이 아니다. 그것이 사랑이 되려면 자신의 힘들었던 삶과는 무관하게 <너의 길을 가라> 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자녀가 죄책감을 가질 때 <건 내 인생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사랑이다. 내가 그랬으니 너는 어떻게 살아라, 가 아니라 네 뜻대로 살라. 가 사랑이다. 어떤 어려움도 잘 극복해 나갈 거라고 믿어주는 것이 사랑이다. 내가 언제나 너를 믿어주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사랑이.







새로운 사랑을 하고 싶다면.



새로운 사랑을 하고 싶다면.


부모에 대한 죄책감을 사랑이라고 믿고 있는 한, 새로운 사랑을 할 수 없다. 똑같은 죄책감을 다른 대상을 통해 양산해 낼 뿐이다. 나는 그랬기 때문에 엄마와의 관계를 끊었다. 그녀는 내가 없어도 잘 지낼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멀리서 응원해 주자는 마음과, 새로운 사랑을 해보겠다는 결심이 있었다. 증오와 분노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더 이상 그들처럼 그녀를 통해 내 필요를 채우지 않을 것이며, 그건 배우자, 자녀 등 다른 대상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부모에 대한 죄책감이 있다면 새로운 사랑을 꿈꾸지 말자. 것은 내 필요의 복붙이다. 이런 말이 비관적으로 들릴 거라는 거 안다. 그러나 어쩌면 희망은 기기만인지도 모른다. 죄책감을 벗어버리기 위해선 용기가 필요하다. 철학자 에릭 호퍼의 말처럼 희망 없는 상황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용기뿐이다.


사랑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만들어내야 한다.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 노력과 애씀의 발버둥은 아무도 알 수 없다. 나 혼자만 아는 일이다. 증명할 수도 없고 들리지도 않는다. 정확한 수치로 확인할 수도 없다. 매 순간 노력하고 애쓰고, 성찰하는 일을 반복해야만 가능하다. 나도 모르게 반복하는 죄책감 앞에서 좌절하는 날들도 많다. 간절히 엉망진창으로 살아버리고 싶은 날들도 있다. 그러나 그러기엔 내 삶이 너무 지 않나.


모든 사람은 <선택>이라는 것을 하며 산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는 선택에 대한 <책임>도 주어진다. 그건 모든 어른에게 해당한다. 누구도 제외는 없다. 부모는 자기 삶에서 많은 선택들을 했고 그 책임을 살았다. 그건 내 잘못도 아니고 그의 잘못도 아니다. 삶이 그냥 그런 것이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는 것처럼, 문제가 있으면 답을 해야만 하는 것처럼, 헤겔의 변증법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처럼 그냥 그런 것이다.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내 삶에도 선택과 책임이 있다. 만약 부모가 너무 가여워서 부모를 위해서만 살겠다고 한다면 그렇게 하면 된다. 죽을 때까지 부모를 위해서 살면 된다. 그 선택이 쁘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선택을 했다면 그에 대한 책임을 살아야 한다. 내가 부모를 위해서만 살겠다고 결정했다면 다른 사람을 내 인생에 들이지 않아야 한다. 내 결정으로 타인을 불행에 빠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건 온전한 나만의 책임을 사는 것이 아니다. 앞서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고 했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하든 결과가 따라온다. 그걸 잊지 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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