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가장 많이 느꼈던 감정은 부적절감이었다. 불필요한, 무쓸모한, 민폐인 것 같은 느낌이 언제나 나를 따라다녔다.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멍청한>이라는 말이었는데 그래서 내가 진짜 멍청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열심히 공부를 해서 성적을 올리려는 노력을 하면서도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난 멍청하니 바라고 원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단념 같은 것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모의고사나 중간고사를 볼 때도 실수가 잦았다. 한 번은 한 과목을 아예 풀지도 않고 답안지 제출을 하기도 했다. 시험지 뒷장을 확인하지 않은 실수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 2,3년 동안을 직장에 다니다 대학에 가고 싶어졌다. 대학에 가겠다고 했더니 집에서 난리가 났다.엄마는 이모를 부르고, 이모는 너 같은 게..라는 말로 시작하여 그만큼 키워놨는데 대학까지 보내주고 있게 생겼냐고 했다.
나 같은 것이란?
나 같은것이란?
지금 생각하면 정말 이상한 일인데, 난 그말에 의지가 꺾여버렸다. 학비를 대 달라고 한 것도 아니었는데,그저 내가 벌어서 가려고 했던 것인데 난 정말 철없는 패륜아가 되어버렸다. <너같은 게>라는 말이 너무 아팠다. 나 같은 건 무엇을 말하는가? 내가 어떻다는 말인가? 입시도 여러 전형이 있고 내가 해보고 싶은 공부였다.무엇보다, 처음으로 내가 해보고 싶었던 공부였다. 해야 되어하는 공부가 아니라 해보고 싶은 공부 말이다.
미성년자도 아니고 성인이 되어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한다는데 엄마가 이모를 부른 건 너무 이상한 일이고, 이모가 대학을 가라 마라 하는 건 더 이상한 일이라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그들의 말은 너를 지원해 줄 수 없다가 아니다. 엄마가 너를 키우느라 너무 힘들었으니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돈 벌어 집에나 보태라. 는 의미다. 그렇지 않는다면 너는 철없고 이기적인 애다.라는 의미다.
난 이기적이고 철없는 패륜아 취급을 받았다. 엄마가 어딘가 아파서 일을 못하는 것도 아니었고, 갑자기 전세금을 올려줘야 한다거나 병원비가 들어갈 일이 있다거나 한 것도 아니었다. 내가 번 돈으로 야간대에 가겠다고 했을 뿐인데 그게 그렇게 큰 일인가? 내가 번 돈으로 성형수술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사치품을 사겠다는 것도 아니고, 여행에 다녀오겠다는 것도 아니고 단지, 공부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그들이 이상하다는 걸 안다. 그러나 이십 대 초반이었던 그때는 몰랐다
이상한 것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나도 이상했다. 엄마에게 왜 말했을까? 어차피 엄마는 언제나 나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는데 그 얘기를 뭐 하러 했을까? 내가 어떤 일을 한데도 엄마는 늘 나를 반대하기만 했는데 무엇을 기대하고 그런 말을 굳이 했을까? 그냥 몰래 하던가 알아서 등록해 버렸으면 되었을 텐데...
나는 그들의 말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엄마를 책임져야 한다는 책임감, 엄마를 행복하게 해주지 않으면 이기적인 애라는 그들의 말들을 나도 모르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 그들의 말들을 받아들이고 의지를 꺾어버리고 만 것이다.
반전
반전
나는 문예창작과에 가고 싶었다. 퇴근 후 다닐 수 있는 대학을 알아보았는데 야간대에는 그 과가 없었다. 방통대 국문과도 알아봤는데 이러저러한 이유로 어려웠다. 그래서 포기했다가 십 년이 지난 후에 한국방송작가협회교육원에서 극본 쓰는 공부를 했다.그때부터 이런저런 글들을 썼고 공모전에도 투고하고 출판사에도 투고를 했다. 책을 내준다는 출판사가 없어 통장에 얼마 되지 않는 돈을 싹싹 긁어모아 책을 냈다.내 책을 읽으신 독자님들이 가끔 블로그에 찾아오시거나 한줄평을 남겨주신다. 가장 기뻤던 평은, 가볍게 읽으려고 폈는데 멈추지 못하고 끝까지 읽고 말았다는 말이었다. 위로를 많이 받았다고 고맙다는 말도 있었다.
책을 쓴 경험은 나에게 여로모로 많은 도움이 되었다.목차를 구성하고 편집을 하고 문단을 보기 좋게 다듬은 경험, 내가 정한 주제를 딴 길로 새지 않고 맺음말까지 유지했던 경험, 또 스스로 홍보를 하면서 인스타그램으로 서평해주실 여러 분들과 접촉했던 경험, 독립서점들을 탐색하고 직접 찾아가 내 책을 입점했던 경험, 서점 사장님들과 이야기 나눴던 경험들이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런 경험들이 내가 나를, 내 글을 사랑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내가 먼저 나와 내 글을 사랑하지 않는 한 진심의 홍보는 가능하지 않다. 처음이라 분명 서툴렀다. 그렇지만 끝까지 해냈다. 세상이 인정하는 성과보다 혼자서 끝까지 해냈다는 것이 무척 자랑스럽다.
마흔셋에 아이 둘을 키우며 거실 한편에 책상을 만들어놓고 공부를 시작했다. 밥을 차리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애들을 학교 보내고, 애들이 감기라도 걸리면 밤새 병간호를 하면서 책을 봤다. 밤새 병간호를 하고 다음 날 아침에 시험을 봤다. 그렇게 2년째 공부 중이고 난 줄곧 성적우수 장학금을 받고 있다. 공부를 놓은 지 23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또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님에도 나는 우수한 성적을 2년 동안 유지하고 있다. 공부방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도서관에 가는 것도, 스터디카페에 가는 것도 아니다. 이동하는 시간마저 아끼기 위해집에서만 한다.
여러과정들에서 실수도 많이 한다. 서툴 때도 있다. 괜찮다. 실수로부터 배우는 것도 분명 있기 때문에 오히려 좋다고 생각한다.
결국 나는 하고 싶은 일들을 했고 배우고 싶은 것들을 배웠다. 자, 나 같은 건 뭘까? 무엇이 나일까? 그들이 말한 내가 나일까 지금의 내가 나일까?나 같다는 건 무얼 의미할까? 당신은어떻게 생각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