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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들리는 민들레 Jul 28. 2024

14. 비극을 만드는 건 운명이 아니다-비극의 본질

나르시스트와 살아야 한다면




세상에 대한 불신과 공포



세상에 대한 불신과 공포


나르시스트 부모에게 키워진 자녀들의 기본 정서에는 수치심, 죄책감, 분노, 열등감 같은 감정이 깔리게 된다. 래서 불행감을 가진 채 살아간다. 즐겁거나 행복한 경험을 할 때도 그들은 죄책감부터 느낀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나 같은 사람이 이런 감정을 가져도 되나? 하면서 자신의 행복을 의심한다. 마찬가지로 좋은 사람이 나타나도 의심부터 하게 된다. 저 사람은 왜 나에게 잘 대해주는 거지? 나한테 뭘 원하는 거지?


나르시스트 부모는 자녀에게 세상에 대한 공포와 불신을 심어준다. 그래서 자녀가 세상을 두려워하게 만들어 부모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그렇게 되면 부모는 자녀를 더 잘 통제할 수 있게 된다. 또 있다. 온 친척에게 자녀에 대한 욕을 하고 자녀를 나쁜 사람으로 만든다. 자녀에게는 또 그들에 대한 욕을 계속한다. 자기가 아는 자녀의 관계를 모두 와해시키고 고립시키며 친척에 대한 욕을 하면서 자녀에게는 자신을 피해자로 만들어 동정을 유도한다. 이런 과정 어쩌면 무의식적이라고 봐도 될 것 같다. 무의식이라는 단어를 쓰기가 조심스럽다. 마치 그들 행동무의식이라는 단어 하나에 정당화되는 것만 같아서다. 나는 그들이 자신이 그런 행동을 하는 이유에 대해 정확하게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무의식이라는 단어를 쓴다.


그들은 자기가 왜 그러는지 알까? 아마 모를 것이다. 스스로에 대해 성찰하는 능력도 없거니와 그럴 만한 내면적 힘도 없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자신의 유약한 정서를 보상하기 위해 타인에게 고통을 준다. 몸에 병이 생기면 짜증이나 화가 많이 나고 그런 감정들을 타인에게도 표출한다. 그래서 간호가 힘든 일이듯 그들의 내면이 고통 속에 있기 때문에 타인에게 고통을 다. 그들은 왜, 무엇 때문에 그토록 고통스러울까?








한  인간의 비극


한 인간의 비극


나의 친정엄마는 팔 남매의 넷째로 태어났다. 위에 오빠가 둘 있었고 맞딸인 언니가 하나 있었다. 언니는 어릴 때 병을 앓아 정신지체 장애를 갖게 되었다. 너무 가난해서 외할머니는 삯 바느질을 해서 아이들 공부를 시키고 살림을 했다. 남편은 무능력했고 아이들에겐 관심도 없었다. 그래도 아이들을 키워야 하니 열심히 일했다. 맞아들과 둘째 아들은 둘 다 아들이었으므로 어떻게든 공부를 시켰다. 셋째는 딸이라 살림을 도와야 했지만 아팠으므로 그럴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집안일은 넷째였던 우리 엄마에게 맡겨졌다. 그 시절 남아선호사상 때문이었겠지만 아들들은 다 공부를 시키고 학교에 보냈다. 막내는 막내라서 고등학교까지 공부를 시켰다. 오빠들은 오빠들이라서, 동생은 동생들이라서 공부를 했지만 엄마는 여자라서, 또 넷째라서 초등학교도 마치지 못했다. 엄마는 늘 일을 해야 했고 오빠와 동생들의 밥을 지어야 했다. 오빠들과 동생들이 학교에 갈 때도 집안일을 도와야 했다. 긴 세월이 흘러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그 옆을 지킨 것은 엄마였지만 할머니가 더 아끼고 좋아했던 자녀들은 아들이었다. 그 아들들은 동생이자 누나였던 우리 엄마를 가엾게 여겼을까? 아니다. 조금이라도 돕고 싶어 했을까? 아니다. 외할머니는 자신이 임종을 맞이할 때까지 자신의 옆에 있었던 넷째 딸을 사랑해 주었을까? 아니다. 할머니는 마지막까지 찾아오지 않는 아들들을 그리워만 할 뿐이었다.


나는 엄마이자 한 여성의 인생이 참으로 비극적이라 생각한다. 외할머니의 엄마에 대한 양육태도가 어린 엄마에게 무척 가혹했을 것이며 그것은 엄마가 성인이 되어 외할머니와 함께 살 때까지 지속되었다. 내가 기억하는 한 외할머니가 자신의 딸인 내 엄마에게 따듯하게 말하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리고 또한 손녀인 내게도 할머니는 그다지 따듯하지 않았다. 그런 모든 일들을 종합해 볼 때 나는 엄마가 정신분열증을 가지지 않게 된 것만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내게 깊은 상처를 주긴 했지만 이만큼 살아온 것 어쩌면 기적일지도 모른다.


나는 엄마가 밉다. 그러나 한 여성, 한 인간으로서는 너무 가엾다. 그랬기 때문에 그렇게 긴 시간을 그녀 곁에서 그녀의 상처를 덜어주기 위해 노력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마음 깊숙한 곳에는 그녀에 대한 사랑이 있다. 처음에는 이런 감정들을 감당하기가 너무 버거웠다. 미워해야 멀어질 수도 있을 텐데 미워할 수가 없었다. 한 인간의 삶이 너무 가여워서, 오만데서 쥐어 터지고 무시당하던 한 인간이, 그래도 살아보겠다고, 어떻게든 살아남겠다고 처투성이 손으로 어린아이의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그 지독한 생명력이... 나는 참 지긋지긋하고 슬펐다.







비극을 만드는 것은 운명도 타인도 아닌 자기 자신


비극을 만드는 건 운명 타인도 아닌 자자신이다.


나는 그녀의 삶을 이해한다. 또 그녀가 내게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도 이해한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이 고통스럽다고 해서 내게 상처를 줄 권리를 가지는 건 아니다. 그것과 그것은 별개다. 그녀를 사랑하지만 그녀를 구할 수 없다. 내게는 그런 권한이 없다. 자아도취적인 남편도 마찬가지다. 나는 남편의 삶을 이해한다.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도 이해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내게 상처를 줄 권리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나는 누구도 구할 수 없다. 그렇다고 생각하는 건 오만이다.


사람들은 신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한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건 그 신뿐이다. 스로 자기를 구하지 않는다면 신조차도 그를 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경험에서 우러나온 생각이다. 나는 아주 오랜 시간을 엄마를 구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구할 수 없었고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아팠다. 할 수 없는 일을 하려고 했기 때문에 아팠다는 걸 너무나 늦게 깨달았다.


만약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는 퇴역군인이 사람들에게 총을 난사하고, 폭력을 행사한다 우리는 그가 왜 그러는지 이해한다. 그러나 그의 행동까지 동의할 수는 없다. 그가 고통스럽다고 해서 타인을 죽이거나 고통을 주는 행위까지 허용할 수는 없지 않나. 가까운 가족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나를 낳아준 부모이고 가족이라도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은 있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들이 주는 상처에 대해 너무 관대한 경향이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고통 속에 빠져 있다면 우리는 그를 이해하고 도울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나를 파괴하도록 두어서는 안 된다. 그건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징어 게임에서 그런 말이 나오지 않나.

 " 이러다 다 죽어~ "


고통 속에서 나오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거기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고통을 벗어나고 싶다면 거기 있는 사람과는 다른 선택을 해야만 한다. 나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른 선택을 했고, 지금도 매 순간 다른 선택을 해 나가고 있다. 릴 때는 외톨이였고 고립되어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나를 응원해 주는 많은 독자분들이 있고, 치료해 주는 선생님들이 있다.


나는 많은 분들의 지지와 응원을 받으며 한 걸음,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다. 누구도 누구를 영원히 불행하게 만들 수 없다. 친정엄마도, 남편도 나를 불행에 붙잡아둘 수 없다. 내가 걸어 나오기로 결정했다면 누구도 나를 막을 수 없다. 비극을 만드는 건 운명이나 타인이 아니라 그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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