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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들리는 민들레 Jul 31. 2024

15. 우리에겐 괴물이 필요하다-수용

나르시스트와 살아야 한다면




허기


허기


한 번도 받아들여진 경험이 없는 사람은 영원한 허기에 시달리게 된다. 무엇을 먹어도, 무엇을 입어도, 누구를 만나도 배가 부르지 않다. 포만감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인데 나는 그래서 만성적인 공허감에 시달렸다. 상징적일지도 모르겠지만 음식에 참 흥미가 없다.

음식을 맛있게 많이 잘 먹는 사람이 부럽다. 어떤 음식을 먹어도 딱 혀에서만 그 맛을 느낄 뿐, 먹고 나서 정말 맛있고 즐겁게 잘 먹었다는 만족감을 느끼기가 어렵다. 어떤 사람과 식사를 해도 마찬가지다. 또한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도 없고 자주 먹고 싶은 음식도 잘 없다. 먹는 행위가 흥미도 재미도 없다. 혀에서 끝나버릴 잠깐의 맛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나에게 먹는다는 행위는 대부분 생명연장, 허기 줄이기에 불과하다.


크게 즐거움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그런 것들에 크게 관심도 재미도 의미도 없게 느껴진다. 여행이나 운동에도 그렇다.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는다.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가슴이 답답하거나 두통이 생긴다. 그렇다고 해서 무기력하게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시간에 나는 계속 움직이며 주변정리를 하고 공부를 하거나 독서를 하고 글을 쓴다. 이런 내가 쇼핑을 좋아할 리 만무하고 공연장 같은 곳을 좋아할 리 만무하다.


어떤 누구를 만나거나 어떤 일을 해도 깊게 즐겁지 않은 이유는 기질 때문도 있겠지만 내 안에 커다란 구멍이 있어서라고 생각한다. 채워진 적이 없기 때문에 채워진 기쁨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내게 <충만하게 채워진다>는 그저 텍스트일 뿐이다.


결핍의 상태에서는 계속 채우고자 하지만 채워지지 않는다. 결핍이 채워진다면 결핍이 아니다. 결핍의 본질은 <영원히 채울 수 없음>이다. 누구로도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기 때문에 공허하다. 모든 걸 빨아들이기만 하고 채워지지는 않는 블랙홀처럼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커란 구멍이 바로 결핍이다.


나르시스트 부모에게 길러진 아이는 결핍과 공허함 속에서 살게 된다. 있는 그대로 수용되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자기 확신도 없다. 인정받기 위해서 애쓰고 인정받지 못할 때 버려질까 불안하고 행복하면 불안하다.


이러한 자신의 감정들에 대해 알아야 한다. 내가 결핍의 상태로 오랜 시간 살아왔고 나도 모르게 그 결핍을 계속 채우고자 하면서 불행 속에 있기를 선택했다는 걸 알고 있어야 한다. 또한 그런 결핍의 상태가 내가 어떤 선택을 하게 만드는 지도 알아야 한다. 내가 만약, 내 결핍에 대해 알고 있었고 이 결핍이 어떤 선택을 하게 만드는지에 대한 통찰이 있었더라면 자기도취적인 배우자를 선택했을까? 내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통찰이 있었다면 사십 년 동안이나 착취를 당했을까?







채워지면 결핍이 아니다.


채워지면 결핍이 아니다.


안다고 결핍이 메워지는 것은 아니다. 위에서도 말했듯 결핍이 채워지면 결핍이 아니니까. 그러나 알고 살아가는 것과 모른 채 끌려가는 것는 큰 차이가 있다. 어쩌면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내 생각과 감정의 모든 이유는 결핍인지도 모른다.


부모는 내가 선택할 수 없다. 성장환경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그렇게 자랄 수밖에 없었다면 그걸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게 바로 내 결핍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일이다. 결핍을 안고 사는 모습은 같지만 방식은 다를 수도 있다. 결핍을 끌어안고 자기 연민에 빠져 타인으로 그걸 메우려던 부모와 같은 선택을 한다면 나는 그의 연장선이 될 뿐이다. 그러나 결핍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노력한다면 나는 부모와 다른 인생을 살아볼 수도 있다.


내 결핍을 인정하고 수용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떻게 해야 할까? 매 순간 인정해야 한다. 타인이 밉고, 타인을 내 뜻대로 하고 싶고, 타인 때문에 깊이 슬퍼질 때, 그런 순간들이 다 내 결핍의 반복이라는 걸 인정하고 수용해야 한다. 자책과는 다르다. 자기비판이나 비하와도 다르다. 있는 그대로 수용한다는 것은 나의 결핍을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타인과 마찰이 생길 때 그것이 내 결핍에 불과하니 모든 타인에게 yes, sorry 하라는 것도 아니다. 나와 타인은 다르다. 나를 위해서 타인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타인을 위해서 내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내 안에 미움이나 분노가 일어날 때 행동하기를 멈추고 생각해봐야 한다. 내 감정이라는 잎사귀가 결핍이라는 뿌리에서 나온 것은 아닌지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스위트홈


결핍과 함께 살아가기-괴물을 이용하자


결핍은 사람을 옹졸하고 치졸하고 비겁하고 유치하고 비참하게 만든다. 그게 결핍의 작동 방식이다. 그걸 목격했을 때 너무 싫다. 몇 십 년간 해왔던 판단의 습관으로 내 결핍을 정의하고 판단하고 부인하고 회피하고 싶어 진다. 그러나 내 안에 있는 것을 미워하고 회피하는 순간, 나는 부모와 같은 방식으로 삶을 파괴하는 순서를 찾아간다.


넷플릭스 시리즈 [스위트 홈] 보면 자기 안의 괴물성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나온다. 결코 괴물이 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 괴물을 혐오하고 증오하는 사람들은 괴물이 된 사람들을 끊임없이 죽이지만 언젠가 그 자신도 괴물이 된다. 그러나 주인공은 자기 안의 괴물을 밀어내지 않는다. 자기 안의 괴물과 싸우고 혐오하면서도 결국 함께 공존한다. 그래서 주인공은 괴물의 힘으로 자기를 구한다. 주인공이 자기 안의 괴물 힘으로 자기와 타인을 구할 수 있는 것은 괴물을 수용했기 때문이다. 회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 안의 괴물을 혐오하고 거부하고 회피할 때 주인공은 괴물을 받아들였다. 그럴 때 괴물성과 인간성은 공존할 수 있게 된다.


결핍이 어쩌면 괴물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받아들여야 한다. 회피하지 않고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일 때만 인간성을 잃지 않은 채 괴물의 힘으로 나 자신을 구할 수 있다. 괴물의 힘으로 우리는 가시밭길 같은 인생을  걸어갈 수 있게 될는지도 모른다. 그 어려운 길을 오랜 시간 동안 걸어가려면 힘이 필요하다. 어쩌면 인간성만으로 가시밭길을 끝까지 걸어가는 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괴물 같은 결핍을 이용하자. 거부하지도 회피하지도 말고 함께 걸어가자. 을씨년스러운 밤의 숲길을 걸어가는데 괴물이라도 있어야 의지가 되지 않겠나. 여차하면 괴물이 나를 지켜줄 수도 있다.


결핍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드는 요소가 될 수 있다. 결핍 없이 행복하고 기쁜 감정만으로 이 치열하고도 깊은 삶을 살아낼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랑할 거라면 핍도 인정하자. 사랑하기까진 할 수 없어도 수용만이라도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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