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명 <표백> 서평
이 소설은 현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이 처한 현실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20대 청년들은 기성 세대로 인하여 이미 완성된 세계에 발을 딛고 있다. 그들이 해야할 시대적 과업은 남아있지 않으며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라 불리는 무색무취의 세계에서 정해진 개인적 목표에 골몰하며 살아간다. 위대한 존재가 되기 위해 그들이 내려야 할 선택은 적당한 직업을 갖고, 돈벌이는 안되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며 소극적으로 저항하거나 체제에 완전히 순응해서 사회적으로 의사, 변호사, 기업인, 정치인 등 명망받는 위치에 오르는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폭력적인 타도 등으로 적극적 저항을 해야할텐데, 그건 사회적으로 권장되지 않는다. 소설 <표백>의 스토리는 과격할 정도로 적극적인 저항의 한 형태로 등장하는 '자살 선언'에 관한 것이다.
말 그대로, 자살하고자 마음 먹고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것을 말한다. 혹은 선언문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며, 소설 속 주인공격인 '세연'이 먼저 시작한 움직임을 뜻한다. 선언문에는 자살 선언에 어떻게 동참해야 하는지 나온다.
- 자살을 앞두고 낙심되거나 좌절할 만한 사건을 겪고 하지 말 것.
- 자살을 기도하기 전 24시간 전에 외부에 알릴 것.
- 방법으로는 자기가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의 방식을 선택할 것 등.
그렇다면 이 선언은 도대체 왜 하는 것이며, 어떠한 연유로 시작하게 된 것일까?
단순히 세상을 증오해서라든지 극단적인 허무주의에 빠져서라든지 그런 감상적인 이유는 아니다. 오히려 소설 속 화자는 세연을 매우 합리적이고 심지어 천재적이며 매력적인 인물로 그린다. 그냥 별다른 큰 노력 없이 살아가기만 해도 좋은 평판과 남들이 말하는 행복을 경험할 수 있는 그런 젊은 청년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그녀는 위대한 일을 타고난 시대로 인하여 박탈당했다는 이유로 '자살 선언'을 주창한다. 그녀는 '표백 세대'들에게 현 시대에 적극적이며 유효하게 저항하는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소설 속 자살 선언이 추구하는 목표는 현 체제에 대한 완전한 전복이다.
판을 뒤엎는 혁명이라고 봐도 무방하겠다. 먼저 스스로 실행한 뒤에 젊은이들을 설득하고, 동참하도록 이끌어 자살을 부추기며 대대적으로 진행한다. 그러면서도 세연은 소설 속 인물들에게 이메일로 전송한 '잡기'라는 글에서 자살 선언의 성공 후 다음의 일에 관하여서는 물음표라고 남긴다. 몇몇의 관점에서(특히 종교적인 관점에서) '자살 선언'는 완전히 어긋나고 악할 수 있는 데도 불구하고 일단 실행을 하면 잘못된 판을 뒤엎는 것이니 유익할 것이라고 설득한다. 이게 과연 맞는 말일까?
소설의 후반부에서 세연은 끊임없이 고뇌한다.
그리고 죽음으로 몰아붙이는 그녀 자신과 '누군가'의 추궁으로 인해 섬뜩한 환각, 극심한 불안, 간질 발작 등을 경험한다. 그러면서 이 선언이 과연 가능할까를 두고 진지하게 고민하는데 그 과정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어 보는 내내 커다란 연민의 감정과 함께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했다. (잘못된 방향이든) 위대한 일을 성취해 나가는 과정은 '노인과 바다'처럼 숭고하고 아름다울 수 있지만 '표백'의 세연처럼 처연하고 비극적일 수도 있구나라는 걸 깨달았달까. 인생을 살아가며 방향이라는 게 이렇게 중요하다.
세상은 물론 복잡하다.
2차원으로 구성된 간단한 직선이 아니다. 나에게 선인 것이 타인에게는 악일 수도 있고, 제 3자에게는 또 다른 범주일 수도 있다. 3차원이나 4차원 공간 안에 목표가 점인지, 선인지, 면인지, 혹은 그 좌표조차도 특정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우리에게는 공동의 선이라는 것이 있다. 공익과 공동선이라는 개념은 종교적 관점을 배제하더라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나는 그 좌표를 완전히 벗어나는 쪽으로는 한발자국도 나아가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우리는 좌표를 벗어나게 하는 여론들을 규탄하는 쪽이어야 한다.
작가의 말에서 장강명 작가님이 서술하셨듯이 '위대함'이라는 것은 '전적으로 가치있다'는 말로 치환될 수 없다. 위대하다는 것은 운도 따라야 되고, 위대하다고 기록된 위인들이 모두 가치있는 인물인 것은 아니다. 나는 오히려 위대함을 좇기보다는 흔들리지 않는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시대의 과업이라고 할 만한 많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작가님은 자동차 자율주행 시스템으로 인한 일자리 구조 전환과 같은 사회적 변화를 예로 들었다) 그렇기에 소설 속 세연이 헌신한 '자살 선언'이 과연 합리적인가에 대해서는 경계심을 갖고 분석하고 판단해야 된다기 보다는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는 정도로만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간결한 문체와 뛰어난 문장력으로 쉽게 잘 읽히는 재밌는 소설이었다. 어두운 내용과 시종일관 세상을 바라보는 비관적인 관점에서도 현실에서와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한 채 서사에 집중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이었다. 기독교라는 종교를 가진 나의 관점에서 불편하고 부정적인 감정이 들었다기보다는 주인공과 인물들을 바라보며 연민의 감정이 가장 컸다. 내가 소설 속 인물이 되어서 공감하며 읽기보다는 관찰자의 시점에서 작가의 의도, 그리고 인물들의 성격과 심리를 설명할 때 가장 흥미로웠다.
다소 찝찝한 결말을 읽고 책을 덮으며 과연 우리 청년 세대는 그와 같이 공허하고 허무할까 생각해본다. 허무하지 않으려면 일단 세상을 경험할 만큼 경험해본 나이여야 되지 않을까? 사건에 휘말린 세연을 비롯한 화자, 병권, 휘영, 윤영 등의 인물들이 많아야 20대 중반이였다는 것이 나름 이해가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