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단 Mar 15. 2024

나에게 상처 준 사람 마주하기

오빠에게 장문의 카톡을 보냈다

'나는 내 아이를 사랑할 수 없다.' 라는 썸네일이 눈길을 끄는 EBS 다규멘터리를 보았다. 어릴 때 학대를 받았던 엄마들이 자신의 아이를 사랑하기 위해 고군 분투하는 내용이었다.


아이를 사랑하고 싶지만 자신의 아이가 우는 모습을 견딜 수 없는 엄마들..

아이의 의견을 조금도 받아줄 수 없어 화를 내는 엄마들..


그녀들의 과거에는 자신도 똑같이 대우받고 학대받았던 어린 아이가 있었다.


어릴 때 받은 정서적 상처는 우리의 몸과 마음에 각인되어 뇌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다. 신체적으로 뿐 아니라 말로 상처를 받은 것들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을 왜곡시키고 그것이 나중에 아이를 키울 때에도 아이의 감정을 수용하지 못하고 아이의 감정 역시 왜곡하여 받아들이게 된다.


또한 어릴 때 불안정한 감정들을 표현했는데 누군가 받아 준 적이 없고, 수용되는 경험을 하지 못했다면 그것이 해결되지 못한 과제로 남아 나의 아이가 그런 감정을 드러 낼 때 나 역시 더욱 불안감을 느끼고, 그것을 수용할 수 없게 된다. 


어딘가 나와 닮은 점이 있는 그녀들.. 곰곰히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았다. 엄마에게 거친 말을 듣긴 했지만 그보다 더한 폭언으로 나를 주눅을 들게 했던 집안의 한 인물이 떠올랐다.


나는 오빠를 좋아했다. 항상 자신감이 있고, 유머감각도 많아 주변에서 사람들의 주목과 관심을 받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부모님의 불화의 영향이었는지 우리 사이는 그렇게 좋지 못했다.


어릴적에 오빠와의 좋은 추억을 생각하면 음악을 좋아하던 오빠 방에 가서 음악 테입을 듣던 순간이 생각난다. 서로 대면 대면하던 우리였지만 좋아하는 가수들의 신곡이 나오면 오빠가 방으로 나를 부르곤했고 나는 그 순간이 참 좋았다. 


그 외에는 서로 싸우고, 모욕적인 말들로 나에게 상처를 주고, 맞고 살며 눈치보던 내가 있었다. 나를 미워하는 오빠에 대한 원망과 슬픔이 대부분의 어린 시절 기억이다.


나는 오빠에게 잘해주고 싶고, 뭐든 다 주려고 했는데 돌아오는 건 더 큰 상처뿐이라 어느 순간부터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는 것을 포기하게 된 것 같다. 


이전부터 오빠에게 이런 감정이 있었지만 크고 나서 한번도 드러낸 적이 없다. 어릴적 일로 남겨두며 성인이 되고 나서는 그냥 현실 남매 관계로 유지해왔고 그냥 지금 현실을 서로 잘 살아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다큐멘터리를 보고 나는 바로 오빠에게 장문의 카톡을 보냈다. 나는 오빠에게 물어야만 했다.

왜 나를 그렇게 미워했는지.. 오빠에게 받았던 정서적 상처가 아직도 남아서 아이의 양육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나한테 왜 그랬냐고 물었다.(약간 학교 폭력 가해자에게 연락하는 피해자가 된 듯한...)


최대한 감정은 빼고 내가 기억하는 객관적인 사실들을 이야기하며 오빠의 생각을 들어보고 싶다고 했다. 한국에 있으면 술이나 한 잔 같이 하면서 할 이야기인데 멀리 있어 기회가 없으니 그냥 이렇게 이야기 한다고 했다. 


오빠는 감성적인 사람이긴 했지만 화내는 것 빼고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잘 보지 못했다.(항상 화가 많았다) 어릴 때 강아지를 잃어버리고 몇 날을 울고 있던 때 기억 이외에는 오빠와 진실한 감정의 소통을 나누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이번에도 오빠가 내 말에 대한 답장을 잘 해줄까 라는 생각을 하긴 했다.


하지만 오빠가 답장이 오지 않아도 내가 해야 할 말을 한 것에 대한 깊은 곳에서 시원함이 밀려왔다. 어릴 적 오빠에게 맞고 울고있던 아이를 대변해서 말해 준 느낌이랄까...


이틀 뒤에 오빠에게서 더 장문의 답장이 왔다. 주말에 바쁜 일들이 있어서 이제서야 답장을 한다고 했다.


오빠의 장문의 답장에 사과는 없었다. 오히려 나의 기억이 왜곡되었고 자신은 그런 모욕적인 말을 한 적이 없으며, 싸우는 것도 거의 쌍방이었다고 하였다. 내 성격을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고 한다. 


또한 어릴적부터 부모님이 나에게 맛있는 것을 더 챙겨주고 잘해주는 모습이 부러웠다고 했다.(그러고 보니 자신의 과자를 못먹게 하는 병적인 집착이 있었다) 주변에 동생한테 잘해주는 누나들이 있는 집이 너무 부러웠다고 했다.


나는 기억이 나지 않는 나의 고자질로 부모님께 매를 맞았을 때에 대해 말할때는 나에 대한 증오가 느껴졌다.(글에서 순환했지만) 어쨌든 본인은 항상 부모님께 혼나고 맞은 기억에 지금도 어떤 때는 트라우마가 있다고 했다.


처음에는 놀라웠다. 기억은 정말 왜곡 될 수 있다라는 것을 느꼈다. 누구의 기억이 더 왜곡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증인을 대라면 나는 엄마 아빠가 있을 것이다. 어릴때부터 오빠가 지독하게도 나를 미워하고 괴롭히던 이야기는 부모님께도 자주 말씀하셔서 나의 허구적 발언은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자신이 부모에게 받지 못한 결핍을 나에게 풀었던 것 같다)


오빠의 글을 읽고 처음에는 당황스럽고 황당했다. 하지만 다시 한번 글을 읽으면서 오빠의 어린 시절을 생각해 보았다. (이 때는 어린 나와 지금의 나를 분리해서 오빠를 바라보아야 했다.)


첫째라서 자주 혼나고, 자신의 소유는 인정해주지 않고 양보를 강요하고 제재만 하는  부모님 앞에서 자신도 사랑받고 싶어하는 어린 아이의 모습이었다. 


사실 첫째가 둘째에게 부모의 사랑이 빼앗기는? 느낌을 받을 때의 스트레스는 배우자가 바람을 필 때 받는 스트레스 정도와 같다고 한다.


그래서 부모님이 사실 첫째에게 더 많은 사랑을 주고 소유욕도 인정을 해주고 했어야 하는데.. 두분의 불화도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서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만큼의 육아 정보도 없었기도 했다.


그런 생각들을 하고 보니, 나에게 상처준 오빠가 아니라 가여운 그 어린아이는 아마도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사랑받기 위해,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나에게 배타적으로 행동했던 것 같다. 그리고 부모님께 사랑받는 동생을 미워할 수 밖에 없고 자신도 더 사랑받고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고 그 과정에서 나만큼이나 힘들었을 오빠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나는 그렇게 나에게 상처준 오빠를 한 인간으로서 이해하게 되었다. 나에게 했던 모욕적인 말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건 그가 진심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오해는 이해의 이전 단계라고 했던가. 나는 오빠가 나를 정말 미워하는 줄 알았다. 사랑하는 가족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미움받는다는 그 감정은 참 다루기 힘들었는데..


오해가 다음 단계로 나아갔다. 


오빠가 직접적인 사과는 하지 않았지만, 장문의 문자로 자신의 감정과 과거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 사과를 잘 포장해서 보내 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온전히 오빠를 이해하고 보낸 문자에 오빠의 답신은 한층 더 누그러져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안녕과 행복을 기원하며(다시는 안 볼 사이?) 마무리를 지었다.


다음에 오빠를 만날 때 어떨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내 마음은 한결 편안해졌다. 


그리고 내 안에 오빠에게 화내고 울고 있던 아이도 이제는 진정이 된 듯 하다. 그 아이가 내 마음 한켠에 계속 살려고 할지도 모르나 나는 이제 그 아이를 달래며 살아갈 수 있을 듯 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