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즈미르 : 한 작가의 영혼에 남겨진 상처

2,000년 '코스모폴리탄'의 도시의 마지막을 기억하는 한 작가의 여정

by 미네르바의 올빼미


에게해의 관문, 스미르나 — 층층이 쌓인 시간의 도시


터키 서부 에게해 연안, 오늘날 '이즈미르'라 불리는 이 도시를 여행한다는 것은 단순한 공간적 이동이 아니다. 8,500년의 시간이 겹겹이 쌓아 올린 문명의 지층을 한 꺼풀씩 벗겨내는 일이고, 역사의 균열이 한 인간의 내면에 어떤 돌이킬 수 없는 흔적을 남겼는지 추적하는 여정이다.

이 도시의 옛 이름은 스미르나(Smyrna)였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개척한 이래 2,000년 넘게 그 이름으로 불렸다. 호메로스의 고향이었다는 전설이 서려 있고, 사도 바울이 일군 초기 기독교 공동체 '서머나 교회'가 뿌리를 내렸으며, 인류 최초로 금속 화폐를 발행한 리디아 왕국의 수도 사르디스(Sardis)로 향하는 관문이었다. 사르디스는 이즈미르 동쪽 90킬로미터 지점에 자리하며,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 수사와 '왕의 길(King's Road)'로 이어진 유서 깊은 땅이었다.


스미르나는 그리스인, 튀르키예인, 아르메니아인, 유대인이 어깨를 맞대고 살아온 다민족 교역 도시였다. 나일강 하구의 알렉산드리아나 다뉴브강 하구의 콘스탄차처럼, 지리적 이점과 오스만 제국 특유의 다문화적 포용성이 빚어낸 코스모폴리탄의 성소였다. 도시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그리스계였고, 그들이 가꾼 항구와 시장, 거리와 골목은 독특한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20세기는 이 오래된 공존의 질서를 산산이 부숴버렸다. 제국들이 무너지고 민족주의가 광기처럼 번지던 시절, 스미르나는 그 폭풍의 한가운데 놓였다. 로버트 거워스가 그의 저서 『왜 제1차 세계대전은 끝나지 않았는가(The Vanquished)』에서 지적했듯, 1차 대전의 종전이 곧 평화의 시작은 아니었다. 패전국 오스만 제국의 영토에서 민족 간의 충돌과 유혈 사태는 오히려 이후에도 오래도록 계속되었다.

역사학자 로버트 카플란은 『유럽의 그림자』에서 루마니아 콘스탄차에서 만난 한 타타르인의 이야기를 통해 이 공존의 파괴를 묘사한다. 1878년 러시아-오스만 전쟁 이전, 그 도시 인구의 절반 이상은 튀르크계와 타타르계였으며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유대인, 독일인이 평화롭게 어울려 살았다. 그러나 루마니아가 오스만 제국에서 분리되면서 튀르크인이 떠나고, 2차 대전 후 독일인들이, 공산주의 체제를 거치며 유대인들이 사라졌다. 민족주의는 자유와 해방의 언어를 말하지만, 그 이면에는 늘 배제와 폭력의 씨앗이 잠복해 있었다. 스미르나의 비극은 그 씨앗이 얼마나 잔인하게 꽃피울 수 있는지를 역사의 증거로 새긴 사건이었다.


이야기가 있는 여행 | 이즈미르(İzmir) — 에게해의 관문 코나크 광장의 오스만 시계탑(1901년 건립), 알산자크에서 코나크까지 이어지는 코르돈 해안 산책로, 케메랄트 시장의 미로 같은 골목(2,000여 개의 역사 건축물), 스미르나 아고라 유적. 이스탄불에서 국내선으로 1시간, 또는 버스로 약 8~9시간. 에게해의 일몰이 아름다운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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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9월, 불타는 스미르나 — 코스모폴리탄의 최후


1922년 9월, 무스타파 케말(Mustafa Kemal)이 이끄는 튀르키예 민족주의 군대가 그리스군을 격파하고 스미르나를 향해 진격했다. 그리코-터키 전쟁의 마지막 장이었다. 튀르키예군이 도시를 장악한 직후, 대화재가 시작됐다 역사가들은 그 불길이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해 지금도 논쟁을 이어가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 불은 그리스계와 아르메니아계 구역을 집중적으로 삼켰다는 것. 튀르키예인 구역과 유대인 구역은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다.

항구에는 공포에 질린 수십만 명의 난민이 몰려들었다. 뒤에는 불길이, 앞에는 바다가 있었다. 연합국 군함들이 항구에 정박해 있었지만, 각국 정부는 민감한 정치적 셈법에 따라 개입을 주저했다. 사람들은 이틀, 사흘, 나흘이 지나도록 그 좁은 부두에 갇혀 있었다. 배는 오지 않았고, 불길은 가까워졌으며, 절망은 깊어만 갔다. 훗날 집계된 희생자 수는 수만에서 10만 명 이상에 이른다고 알려졌으나, 정확한 숫자는 지금도 역사의 안개 속에 잠겨 있다.

'스미르나'라는 이름 자체가 지도에서 지워지듯, '이즈미르'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도시의 이름과 함께 2,000년의 공존도 역사 속으로 스러졌다.


그 불길 곁에, 한 청년 기자가 있었다. 스물세 살의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Miller Hemingway)였다. 《토론토 데일리 스타》의 특파원으로 파견된 그는 말라리아에 시달리는 몸으로도 기자의 본능을 꺾지 않고 취재를 강행했다. 그가 부두에서, 난민들의 증언 속에서, 영국 해군 장교들의 보고에서 긁어모은 장면들은 훗날 그의 문학 세계 전체를 떠받치는 철학적 토대가 된다.


이야기가 있는 여행 | 스미르나 아고라(Smyrna Agora)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후원으로 재건된 로마 시대 광장 유적. 지하 회랑 크립토포르티쿠스의 아치들이 1,800년을 버티며 서 있다. 현대 이즈미르의 한가운데, 시간의 지층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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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속에 멋진 것들이 떠다녔다" — 헤밍웨이의 기록, 빙산의 언어


헤밍웨이는 직접 화염에 휩싸인 스미르나 시내로 들어가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는 연합군 함선 위에서, 난민들이 몰려든 부두 주변에서, 생존자들의 목소리와 현장의 침묵을 통해 참상을 생생하게 재구성했다. 훗날 단편 《스미르나의 부두에서(On the Quai at Smyrna)》와 여러 기사에 담긴 그의 기록은 처절하되 절제된, 냉정하되 섬뜩한 방식으로 그 지옥을 증언한다.

그는 쓰지 않았다. '슬프다'고도, '끔찍하다'고도, '비참하다'고도 쓰지 않았다. 대신 그는 사실만을 나열했다.

"자정만 되면 그들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탐조등이 훑고 지나가면 잠시 멈췄다."


부두에 갇힌 수십만 명의 난민들이 매일 밤 자정이면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그것은 개별적인 절망이 집단적인 공포로 응축되어 터져 나오는 소리였다. 연합군 함선의 탐조등이 비추는 찰나, 비명은 잦아들었다. 빛이 사라지면 다시 시작되었다. 헤밍웨이는 이 기이한 청각적 규칙성을 통해, 신도 구원도 없는 세계에서 인간이 얼마나 동물적인 반응으로 축소되는지를 보여주었다.

항구의 물 위에 떠다니는 것들에 대해 그는 이렇게 썼다.

"물속에 멋진 것들이 떠다녔다.(Nice things floating in the water.)"


'멋진 것들'. 그 반어적 표현 속에 담긴 것이 무엇인지 독자는 스스로 상상해야 한다. 부풀어 오른 시체들, 부서진 가재도구들, 아이의 신발 한 짝. 직접 묘사하지 않기에 더 깊이 공포를 전달하는 이 기법이, 훗날 그의 '빙산 이론(Iceberg Theory)'의 핵심이 된다. 수면 위에 드러난 8분의 1만 보여주되, 그 아래 숨겨진 8분의 7의 진실이 독자의 가슴을 짓누르게 하는 것.

죽은 아이를 며칠씩 품에 안고 놓지 않으려는 어머니들이 있었다. 헤밍웨이는 기록했다. "그들은 죽은 아이를 6일 동안이나 안고 있었다. 우리는 강제로 떼어내야 했다." 모성애조차 무력하게 만드는 전쟁의 비정함. 그 장면에서 그는 어떤 논평도, 어떤 감정도 덧붙이지 않는다.

그리고 피난선에 실을 수 없게 된 당나귀와 노새들. 그리스 군인들은 짐승을 적에게 넘겨주지 않기 위해 그 앞다리를 꺾어 바다로 밀어넣었다. 얕은 물속에서 부러진 다리로 허우적거리는 동물들의 이미지는, 피난민들 자신의 처지와 겹쳐지며 인간성이 얼마나 깊은 곳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스미르나에서 동쪽 트라키아로 이어진 취재에서, 헤밍웨이는 또 다른 장면과 마주했다. 아드리아노플 근처 마리차 강을 건너는 20마일의 피난 행렬이었다. 25만 명에 달하는 그리스계 주민들이 빗속의 진흙탕 길을 걸어갔다. 헤밍웨이가 포착한 것은 그들의 소리였다. 아니, 소리의 부재였다.

"아무도 신음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Nobody even grunts.)"


비명도, 통곡도, 기도도 없이 그저 걷기만 하는 사람들. 소리를 낼 에너지조차 소진한 극한의 탈진 상태. 그 침묵은 어떤 비명보다 깊은 절망을 전달했다. 헤밍웨이는 이 침묵 속에서 수레 위에서 아이를 낳는 여성을 보았다. 남편은 낡은 담요로 빗줄기를 막아주려 애쓰고 있었고, 옆의 어린 딸은 공포에 울고 있었다. 기자는 바라볼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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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부재 — "하늘에 계신 우리 나다여"


이즈미르와 트라키아에서의 경험은 헤밍웨이에게 하나의 철학적 확신을 심어주었다. 신은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한다 해도 인간의 고통에 완전히 무관심하다는 것. 이 확신은 훗날 그의 문학을 관통하는 핵심 사상인 '나다(Nada)'로 발전했다.

'나다'는 스페인어로 '무(無, Nothingness)'를 뜻한다. 헤밍웨이의 단편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A Clean, Well-Lighted Place)》에서 한 늙은 웨이터는 주기도문을 이렇게 패러디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나다여, 이름이 나다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다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자정의 비명이 울려 퍼지던 부두에서, 하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탐조등이 꺼지면 비명은 다시 시작되었다. 신의 침묵은 완전했다. 이 체험이 헤밍웨이로 하여금 종교적 구원이나 외부에서 주어지는 도덕적 질서를 거부하게 만들었다. 세상에는 선악을 심판하는 절대자가 없으며, 오직 냉혹한 물리적 힘과 죽음만이 실재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으로 버티는가? 스스로 만들어낸 규율과 태도, 그리고 위엄. 그것뿐이다.


이 '나다'의 철학은 그의 작품 전체에 스며들었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의 상처받은 남자들, 《무기여 잘 있거라》의 비극적 사랑,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죽음 앞에서의 선택, 그리고 《노인과 바다》의 노인이 보여준 집요한 싸움 — 이 모두가 허무 앞에서 패배하지 않으려는 인간의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나다'는 단순한 허무주의가 아니었다. 헤밍웨이는 '의미 없는 세계에서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 인간의 조건이라고 보았다. 《노인과 바다》의 노인 산티아고는 84일간 물고기를 잡지 못하고, 거대한 청새치와 사흘 밤낮을 싸운 끝에 그것을 잡지만 귀항하는 길에 상어 떼에 뜯겨 뼈만 남은 채 돌아온다. 결과는 없다. 그러나 그는 패배하지 않았다.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어도 패배할 수는 없다.(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


이 문장은 이즈미르의 부두에서 탄생한 허무주의가 역설적으로 도달한 긍정의 선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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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은 영웅의 탄생 — 1차 세계대전에서 이즈미르까지


이즈미르를 이해하려면, 그 이전의 헤밍웨이를 먼저 알아야 한다. 그는 일리노이주 오크파크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클래런스는 성공한 의사이자 열정적인 야외 활동가였고, 어머니 그레이스는 오페라 가수를 꿈꿨던 예술가였다. 이 두 성향은 헤밍웨이 안에서 충돌하며 그의 복잡한 내면을 형성했다.

심리학적으로 더 주목할 것은, 어머니 그레이스가 어린 헤밍웨이에게 여장을 시키거나 누이 마셀린과 쌍둥이처럼 키우려 했다는 사실이다. 훗날 그의 소설 《에덴의 동산》에 나타나는 젠더 정체성의 혼란은 이 유년기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평생 그가 과시한 마초적 남성성은 어쩌면 이 혼란과 어머니의 강한 그늘로부터 벗어나려는 과잉보상(Overcompensation)이었을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의 '마초적 이미지'만으로 그를 평가한다. 나역시 이즈미르에서 벌어진 참상을 그가 그렇게 목격하고, 목격한 것을 담당하게 기록한 사실을 알기 전까지 그러했다. 그러나 '그 앎' 이후 그의 외부에 비쳐진 모습이 다가 아닐 수 있음을, 아니 몸부림이었음을 어렴풋 하게 나마 깨닫게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헤밍웨이는 대학에 진학하는 대신 저널리스트의 길을 택한다.《캔자스시티 스타》에서 6개월간 기자 수업을 받으며 문체의 기초를 다졌다. '짧은 문장을 써라. 힘 있는 영어를 써라. 긍정문으로 써라.' 신문사의 이 가이드라인은 그의 문학적 십계명이 되었다.


1918년, 그는 적십자 구급차 부대로 이탈리아 전선에 자원했다. 열여덟 살의 청년은 전쟁에 대한 낭만적 환상을 품고 있었다. "정말 멋진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편지에 쓸 정도로. 그러나 1918년 7월 8일 자정, 피아베 강 전선에서 오스트리아군의 박격포 포탄이 참호 안에서 폭발했다. 그는 기절했고, 의식을 되찾았을 때 다리와 무릎, 발에 수백 개의 파편이 박혀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더 중한 부상을 입은 이탈리아 병사를 업고 응급호로 후송하다가 기관총 사격에 추가로 노출되었다. 훗날 이탈리아 정부는 그에게 은성무공훈장(Silver Medal of Valor)을 수여했다.

그 부상은 외면적으로는 영웅의 훈장이었지만, 내면적으로는 세계의 안전함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자신은 언제든 외부의 힘에 의해 파괴될 수 있는 존재라는 인식. 이후 그는 어둠 속에서 잠들기를 두려워했고, 평생 불면증에 시달렸다.


밀라노의 병원에서 회복하는 동안 그는 7살 연상의 간호사 아그네스 폰 쿠로프스키와 사랑에 빠졌다. 전쟁의 공포를 잊게 해주는 도피처였으나, 귀국 후 받은 이별 통보는 또 다른 종류의 상처를 새겼다. 헤밍웨이는 결혼까지 생각했었으나, 19살 어린 젊은이와의 결혼은 그녀에게 힘든 결정이었을 것이다. 그 마음이 그녀으 마지막 편지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만 결혼할 수는 없다.”는 글에 담겼었다. 육체적 상흔과 감정의 배신이 겹쳐, 《무기여 잘 있거라》의 비극적 사랑으로 승화되었다.


그리고 1922년. 이탈리아 전선에서 돌아온 지 4년째 되던해 파리에서 작가의 꿈을 키우던 헤밍웨이는 취재지시를 받고 이즈미르로 향했다. 전쟁의 첫 번째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채로, 그는 그곳에서 더 깊고 더 넓은 지옥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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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문학 혁명 — 빙산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이야기가 있는 여행 | 파리, 좌안(Left Bank) — 잃어버린 세대의 살롱 생제르맹 데 프레 카페들,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서점. 거트루드 스타인의 살롱이 있던 뤽상부르 공원 인근 골목. 헤밍웨이가 파리를 기억하며 쓴 회고록 《파리는 날마다 축제》의 무대.


이즈미르에서 돌아온 헤밍웨이는 파리에 정착하여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의 중심에 섰다. 거트루드 스타인, 에즈라 파운드, F. 스콧 피츠제럴드, 제임스 조이스와 교류하며 자신의 문체를 갈고 닦았다. 스타인이 명명한 '잃어버린 세대'는 전쟁으로 인해 기존의 가치관과 도덕을 상실하고 방향을 잃은 청년들을 가리켰다. 헤밍웨이는 이 상실을 문학적 동력으로 삼았다.

이즈미르에서 체득한 '빙산 이론'이 완성된 것도 이 시기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작가가 자신이 무엇을 쓰고 있는지 충분히 알고 있다면, 그 아는 바를 생략할 수 있다. 독자는 작가가 진술한 것만큼이나 강렬하게 그 생략된 것을 느낄 수 있다." 수면 위에 드러난 8분의 1의 사실. 그 아래 잠긴 8분의 7의 진실. 이즈미르의 부두에서 그는 깨달았다 — 직접 묘사보다 생략이 더 깊이 공포를 전달한다는 것을.


1926년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1929년 《무기여 잘 있거라》. 두 작품은 전후 세대의 환멸과 전쟁의 허무를 감각적으로 그려내어 그를 세계적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1930년대의 그는 '행동하는 남성(Man of Action)'으로서의 페르소나를 구축하는 데 더욱 집착한다. 아프리카 사파리, 스페인 투우, 키웨스트의 심해 낚시. 그에게 이것들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었다. 죽음과 직접 대면하는 제의적 행위였다. 1932년 《오후의 죽음(Death in the Afternoon)》에서 그는 투우를 '죽음에 대한 예술적 형상화'라고 예찬했다. 피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도 위엄을 잃지 않는 것, '그레이스 언더 프레셔(Grace under pressure)'. 이것이 그가 추구한 삶의 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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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내전과 2차 대전 — 전쟁에서 태어난 작가, 전쟁 속으로 돌아가다


이야기가 있는 여행 | 쿠바, 아바나 — 헤밍웨이의 은신처 아바나 구시가지의 바 플로리디타(헤밍웨이가 즐겨 찾던 칵테일 바)와 바 라 보데기타 델 메디오. 코히마르 항구(《노인과 바다》의 배경). 헤밍웨이의 저택 핀카 비히아. 그가 스페인 내전을 취재하며 집필을 이어간 흔적들이 남아 있다.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헤밍웨이는 다시 종군기자로 전선에 섰다. 파시즘에 맞서는 공화파(Republicans)를 지지하며, 단순한 관찰자를 넘어 반파시즘 활동가로 변모했다. 이 시기 그는 이즈미르에서 만난 허무주의를 넘어서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 이념보다 인간의 연대와 존엄. 1940년 출간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그 발견을 담아 헤밍웨이 문학의 정점으로 평가받는다.


헤밍웨이는 전쟁을 취재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2차 대전 시기, 그는 쿠바에서 사설 방첩 조직 '크룩 팩토리(Crook Factory)'를 조직하고, 자신의 낚싯배 필라 호에 기관총과 수류탄을 실어 카리브해를 순찰하면서 독일 유보트를 사냥하겠다는 무모한 계획을 실행했다. 1944년에는 프랑스 랑부예(Rambouillet)에서 제네바 협약을 위반하고 프랑스 레지스탕스를 규합하여 사설 부대를 조직했고, 파리 해방의 날에는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리츠 호텔로 직행하여 "호텔을 해방시키러 왔다"고 선언하며 샴페인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 유쾌한 해방 퍼포먼스 뒤에, 이어진 휘르트겐 숲(Hürtgen Forest) 전투 취재는 그에게 또 다른 층의 트라우마를 새겼다. 미군의 막대한 희생이 벌어진 이 전투에서 그는 다시 한번 시체가 쌓인 지옥을 목격했다. 그가 바라봤던 죽음의 풍경들이 켜켜이 쌓여, 그의 정신 건강은 조용히, 그러나 돌이킬 수 없이 무너져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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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추락, 노벨상의 영광 — 그리고 육체의 파괴


1954년, 헤밍웨이는 아내 메리 웰시와 함께 아프리카 여행을 떠났다가 연이은 비행기 추락 사고를 당했다. 1차 사고에서 비행기가 머치슨 폭포 상공에서 전선에 걸려 불시착했다. 2차 사고에서는 구조를 위해 탑승한 비행기가 이륙 중 화재를 일으키며 추락했다. 헤밍웨이는 불타는 기체에서 탈출하기 위해 강철 문을 머리로 들이받아 열었다.

이 사고로 그는 두개골 골절, 뇌척수액 유출, 심각한 뇌진탕, 척추 디스크 파열, 간과 신장 파열, 시력과 청력 손상이라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언론은 그가 사망했다고 오보를 냈고, 그는 붕대를 감은 채 자신의 부고 기사를 읽으며 샴페인을 마셨다. 그 기행은 강인함의 과시였으나, 실제로는 이 사고가 그의 죽음을 앞당긴 결정타였다.


현대 의학자들은 그가 평생 9회 이상의 뇌진탕으로 인해 만성 외상성 뇌병증(CTE)을 앓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1차 대전의 박격포 파편, 이탈리아의 전선, 파리의 교통사고, 아프리카의 두 차례 추락까지. 뇌의 물리적 손상은 극심한 두통, 기억력 감퇴, 조절 불가능한 감정 기복, 우울증으로 이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육체가 무너져가는 바로 그 시기에 그는 문학적 정점에 올랐다. 1952년 발표한 《노인과 바다》. 84일간 물고기를 잡지 못한 노인 산티아고가 거대한 청새치와 사흘 밤낮을 싸우는 이 소설은 헤밍웨이 자신의 초상이기도 했다. 뼈만 남은 물고기를 이끌고 항구로 돌아오는 노인처럼, 그도 모든 것을 잃으면서도 버티고 있었다. 그 작품으로 1953년 퓰리처상, 1954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시상식에 참석할 기력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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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로 돌아가다 — 헤밍웨이 가문의 저주


말년의 헤밍웨이는 아이다호주 케첨(Ketchum)에 은둔했다. 그는 FBI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극심한 편집증에 시달렸다. 길을 걷는 사람을 요원으로 의심하고, 은행이 돈을 횡령하려 한다고 믿었다. 사후 공개된 FBI 파일에 따르면, 에드거 후버 국장이 실제로 그를 감시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헤밍웨이의 공포는 실제를 훨씬 넘어선 병리적 망상이었다.

1960년, 아내 메리는 그를 가명으로 메이요 클리닉에 입원시켰다. 당시 표준 치료법이던 전기충격요법(ECT)을 수차례 받은 그는, 그 치료가 기억을 지워버린다고 호소하며 치료 중단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퇴원 후 그는 글을 쓸 수 없게 되었다. 케네디 대통령 취임 축하 메시지를 부탁받고 몇 시간 동안 단 한 문장도 완성하지 못한 채 눈물을 흘렸다. 작가에게 언어의 상실은 존재의 소멸을 의미했다. 그는 친구에게 말했다. "내 자본을 모두 잃고 사업을 계속하라는 것과 같다."


그의 붕괴를 단순히 개인의 비극으로만 볼 수는 없다. '헤밍웨이 가문의 저주'라 불리는 자살의 계보가 그 배경에 있다.

1928년, 아버지 클래런스 헤밍웨이가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건강 악화와 경제적 어려움이 겹친 끝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그 공포는 현실이 되었다. 1961년 7월 2일 일요일 이른 아침, 모두가 잠든 시각, 헤밍웨이는 지하실에서 자신이 아끼던 12게이지 더블 배럴 산탄총을 꺼냈다. 붉은 가운을 입고 현관 로비로 올라가, 총구를 이마에 대고 두 방아쇠를 당겼다. 그는 아버지가 갔던 길을 그대로 따랐다.

그 후로도 저주는 이어졌다. 여동생 어슐라는 1966년 암 투병 중 약물 과다복용으로 숨졌다. 남동생 레스터는 1982년 권총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1996년, 슈퍼모델로 나름 유명했던 손녀 마고(Margaux Heming way) 도 약물 과다복용으로 사망했다. 외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꼭 35년이 된 해였다.


다섯 명. 한 가문에서 이어진 다섯 번의 자살. 연구자들은 여기서 유전적 요인을 발견한다. 헤밍웨이 가문이 유전성 혈색소침착증(Hemochromatosis)을 앓았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철분이 과도하게 축적되어 간, 심장, 뇌에 손상을 주는 이 질환은 심각한 우울증과 인격 변화를 유발할 수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헤밍웨이가 평생 싸운 것은 단순한 실존적 허무가 아니라 몸 안에서 자라난 보이지 않는 적이기도 했다.

그러나 유전자가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않는다. 이즈미르의 부두에서 시작된 트라우마, 전쟁들이 새긴 반복된 상처, 아홉 차례의 뇌진탕, 그리고 언어를 빼앗긴 노작가의 절망. 이 모든 것이 겹쳐 그를 그 아침으로 이끌었다. 그는 이즈미르에서 '나다'를 발견했고, 평생 그 허무와 싸우다가, 결국 그 허무 속으로 스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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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자들의 도시 — 이즈미르가 남긴 것


오늘날 이즈미르는 튀르키예 제3의 도시로, 에게해 연안의 현대적이고 세련된 도시다. 코나크 광장의 시계탑(1901년 술탄 압둘 하미드 2세 즉위 기념으로 건립된 25미터의 오스만 후기 양식 석조 탑)은 여전히 광장을 지키고, 알산자크에서 코나크까지 이어지는 코르돈 해안 산책로에서는 에게해의 일몰을 감상하는 시민들로 가득하다.

케메랄트 시장의 미로 같은 골목에는 2,000개가 넘는 역사적 건축물이 밀집해 있으며, 1744년에 완공된 대상 숙소 '키즐라라아스 하니'의 마당에서는 지금도 터키 커피 향이 피어오른다. 히사르 모스크와 '시나고그 거리'가 나란히 존재하는 풍경은 과거 이 도시가 지녔던 다문화적 포용성의 흔적이다.

스미르나 아고라의 지하 회랑 크립토포르티쿠스의 아치들은 1,800년이 지난 지금도 무너지지 않고 서 있다. 한때 도시의 정치, 행정, 상업의 중심지였던 이 공간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후원으로 재건된 로마 공학의 결정체였다. 지상의 문명은 파괴되었을지언정, 그 토대는 침묵 속에서 버텨왔다.


이야기가 있는 여행 | 사르디스(Sardis) — 황금의 왕국 이즈미르 동쪽 90km. 리디아 왕국의 수도로, 인류 최초의 표준화된 금속 화폐를 발행한 곳. '크로이소스 왕만큼 부유한'이라는 표현이 탄생한 땅. 아르테미스 신전 터와 비잔틴 교회, 2025년 발굴된 기원전 8세기 궁전 유적이 있다. 요한계시록의 '사르디스 교회' 터도 이곳에 있다.


이즈미르 동쪽 90킬로미터의 사르디스(Sardis)는 또 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다. 리디아 왕국의 수도였던 이 도시는 팍톨로스 강에서 채취한 사금으로 인류 최초의 표준화된 금속 화폐를 발행한 곳이다. 2025년 니콜라스 케이힐 교수가 이끄는 발굴팀은 지표면 8미터 아래에서 기원전 8세기의 리디아 궁전 유적을 발견했다. 리디아 문명이 그리스의 영향 이전에 이미 독자적이고 웅장한 도시 계획 능력을 갖추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발견이었다.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 두 곳 역시 이즈미르와 사르디스에 있다. 스미르나 교회는 박해 속에서도 신앙의 위엄을 잃지 않은 '충성스러운 교회'로 기록되었다. 주교 폴리카르프는 155년경 순교하면서도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반면 사르디스 교회는 '살아있으나 죽은 교회'라는 혹독한 책망을 받았다. 풍요로움 속의 안일함. 아르테미스 신전 옆에 덧붙여진 작은 비잔틴 교회가 그 전이의 시간을 고요히 증언한다.

이 모든 층위의 역사가 이즈미르라는 도시에 겹겹이 쌓여 있다. 8,500년의 시간. 그리스와 로마와 비잔틴과 오스만의 지층. 그리고 그 위에 1922년 9월의 재와 연기. 그 잿더미 위에 다시 세워진 현재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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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 "파괴될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 않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1922년 이즈미르에서 지옥을 보았다. 신의 침묵을 들었다. 그리고 그 허무로부터 하나의 문학을 만들었다. 이즈미르가 그에게 '나다'를 가르쳤다면, 그는 '나다' 속에서 '그레이스 언더 프레셔'를 발명했다.

그의 삶 자체가 그 역설의 증명이었다. 이탈리아 전선의 파편, 이즈미르의 비명, 아프리카의 불타는 비행기, 말년의 전기충격요법. 그는 아홉 차례 이상 뇌진탕을 겪었고, 기억을 잃었으며, 언어를 잃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그랬듯, 자신이 아끼던 총으로 스스로를 파괴했다.

그러나 그가 남긴 것들은 패배하지 않았다. 이즈미르의 부두에서 건조하게 기록된 문장들은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영원한 증언이 되었다. 빙산 이론은 현대 문학의 흐름을 바꾸었다. 《노인과 바다》의 노인 산티아고는 지금도 거대한 바다 위에서 청새치와 싸우고 있다.


이즈미르는 1922년의 재 위에서 다시 피어났다. 오늘날 코르돈 해안을 걷는 사람들은 에게해의 일몰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야기한다. 그 아름다움 아래에 무엇이 잠겨 있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사르디스의 부러진 대리석 기둥들은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쓰러진 채로도 문명의 위엄을 잃지 않고 서 있다.

헤밍웨이가 이즈미르에서 보았던 심연을 기억하며 이 땅을 걷는다면, 무너진 기둥과 낡은 시계탑이 전하는 메시지가 들린다. 인간은 파괴될 수 있다. 도시도, 문명도, 한 작가의 정신도. 그러나 그가 남긴 문장들은, 불길 속에서도 살아남은 지하 회랑의 아치처럼, 패배하지 않는다.


이즈미르를 방문한다면, 코르돈의 일몰을 즐기고 케메랄트의 향신료 향기를 맡으며 아고라의 돌기둥 사이를 걷는 것도 좋다. 그러나 잠시 멈추어, 1922년 9월 그 항구 위에서 비명이 울리던 밤을 떠올려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한 청년 기자가 그 비명을 들으며 발견한 허무와, 그 허무에도 불구하고 그가 끝내 내려놓지 않으려 했던 위엄의 의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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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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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은 누구를 위해 울리는가' : 헤밍웨이의 대표작 '누구를 위해 종이 울리나(For Whom the Bell Tolls) ?'를 읽으며 혹시 '종이 누굴 위해 울리지?' 궁금증이 생기지 않았습니까? 답은 독자인 바로 '나'입니다. 이 이야기는 17세기 영국의 성직자이자 시인인 '존 던(John Donne)'의 묵상집에 있는 '누구를 위해 종이 울리는지 알려 하지 말라. 그것은 바로 그대를 위해 울리는 것이다(Never send to know for whom the bell tolls; it tolls for thee)'에서 유래합니다. 그 시대 유럽에서는 누군가가 죽으면 교회 종을 울려 마을에 알리는 관습이 있었기에 종 소리는 곧 누군가의 죽음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존 던은 '인간이라는 존재는 서로 연결된 공동체'로 봤고, 그에게는 '어떤 사람의 죽음이든(나는 인류속에 포함된 존재이기에) 그것은 나를 줄어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누군가의 죽음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상실이고, 그렇기에 그 종은 결국 '나 자신을 위해' 울리는 것입니다. 헤밍웨이는 소설의 제목을 통해 '한 사람의 죽음은 인류 모두에게 영향을 주는 것이며, 따라서 전쟁에서 죽는 사람들은 단순히 타인이 아닌 우리 모두의 죽음과 연결돼 있다'고 얘기하려던 것입니다. '인간의 연대와 존엄!' 그가 던진 메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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