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에 이름을 남긴 한 망국의 후예에 대한 애가
‘내가 후퇴한 것은 죄를 진 것이라서, 이 때문에 죽는다면 어찌 할 말이 있겠는가. 그러나 나보고 창고의 식량을 도적질했다고 하는 것은 모함이다'라고 말한 후, 다시 변령성에게 이르기를 ‘위로 하늘이 있고 아래로 땅이 있고 삼군이 모두 다 여기 있는데 어찌 임금께서 이 일을 모르시겠는가’라고 했다. 또 휘하 사졸을 둘러보며 말하기를 ‘내가 너희를 모집했던 처음 의도는 적을 격파하고 나서 큰 상을 받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적의 기세가 이 순간에도 무성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렇게 하지 못했고, 어쩔 수 없이 동관을 고수하고 있게 되었다. 나에게 죄 있다면, 너희들은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만약 너희들이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면 원통하다고 외쳐라’고 하자 군중에서 모두가 ‘원통하다’고 크게 외쳤는데, 그 소리가 사방을 진통시켰다. 이후 (먼저 처형당한)상청의 시체를 보고 말하기를 ‘그대는 내가 선발했고, 또 나와 절도사를 교대했다. 지금 그대와 함께 죽으니 이는 모두 운명이로다’라면서 죽음을 의연히 받아들였다
모함에 의해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그의 마지막 모습을 그린 ‘唐書’의 내용입니다. 자신의 억울함을 강조하면서도 죽을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음을 받아들이고 부하들에게 노고에 대한 보상을 하지 못한데 미안함을 표한 뒤 오랜세월 자신과 함께해온 동료와 마지막을 함께하는 모습, 비장하면서도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여겨집니다
고선지… 정확히 출생한 시기와 장소를 알 수 없으나, 고구려출신 장수 고사계의 아들로 고구려 유민들이 강제 이주해 모여 살던 베이징북방 어딘가에서 대략 서기 700년경 태어났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리고 755년 안록산의 난 토벌군 부원수(명목상 최고지휘관을 황자가 맡아 사실상 총사령관)로서 현재 섬서성 지역 방어임무를 맡았으나 반란군의 세가 강한데다 전황이 급박하게 전개됨에 따라 단독으로 전략적 요충지인 동관(潼關)으로 퇴각을 결정한 것을 둘러싼 모함으로 참형을 당하게 됩니다
세계군사사에 한 획을 그은 파미르 원정
그 55여년의 삶... 그는 중국사는 물론 중앙아시아와 세계사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그는 부친 고사계가 현재 신장성 쿠차에 주둔한 ‘안서절도사’ 휘하 제위장군으로 임명받게 되면서 어린시절 부터 이른바 ‘서역’으로 불리는 이 지역에서 성장(이곳에서 태어났다는 설도 있음)하게 됩니다. 일찍부터 군인으로 키워지며 뛰어난 역량을 보여준데다 많은 공을 세운 부친의 후광까지 맞물려 20대초인 721년경 안서도호부 유격장군이 됩니다. 이후 강성해진 토번 등과 전투를 성공적으로 치러내면서 호탄지역 사령관 등을 역임후 신장과 중앙아시아 동부지역을 관할하는 안서도호부의 부도호겸 도호부내 병권을 총괄하는 사진(쿠차, 카리샤르, 호탄, 카슈가르)도지변제사를 맡게 됩니다
그리고, 서기 747년 고선지는 대대적인 토번 정벌 조서를 내린 당 현종으로 부터 행영(‘절도사’관직명 앞에서는 일반적으로 관할지역을 나타내는 지역명이 붙는 반면 ‘행영’은 관할영역의 제한없음)절도사로 임명받아 기.보병 1만여명의 병력을 동원해 서역정벌에 나서게 됩니다. 당과 토번은 일시 평화관계를 유지하기도 했으나 토번이 강성해지면서 감숙회랑 지역 중심으로 당의 영역을 수시로 침공해 약탈하는가 하면 발률국(현재의 파키스탄 북동부와 카시미르지역, 소발률국은 토번의 조공국이 되고 대발률국은 토번에 항복)을 정벌하는 등 서역의 주도권을 장악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특히 740년이후 당이 절도사 3명을 동원하여 잇따라 공세를 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한 가운데, 토번은 파미르고원과 힌두쿠시 산맥 등 서역장악을 발판으로 압바스왕조와 연합해당을 봉쇄하는 한편 안서도호부에 대한 공세를 꾀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따라서 당 조정으로서는 힌두쿠시 산맥과 파미르고원 지대로 진출한 토번을 약화시켜 세력팽창을 막고 압바스왕조와 협력을 차단하는 것이 긴급한 과제로 대두됩니다.
고선지는 음력 3월하순 1만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현재 중국령 쿠차를 출발해 100여일간 사막과 파미르 고원지대를 행군해 파미르고원의 남단이며 현재 파키스탄과 인접한 아프가니스탄 와칸 회랑의 사르하드(Sarhad) 인근에 위치했던 토번의 전략요충지 ‘연운보’를 공격하게 됩니다. 당을 비롯한 중국왕조의 군대는 전통적으로 맨앞의 전군과 중앙의 본대, 후미의 후속부대로 이루어지 는 ‘삼군법’에 따라 공격전법을 구사한 반면, 고선지는 보급선 확보와 효과적 기동을 위해 병력을 삼분해 세방향으로 진군후 7월 13일 연운보 공격을 위해 집결하도록 합니다. 고선지 본인은 진군과정에서 우선 현 와칸회랑 지역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되는 토번의 번국 호밀국을 공략하여 유사시 퇴로를 확보합니다. 연운보는 가파른 산악과 물살이 거센 하천에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였으나 신속 기동을 통해 공격 두시간여 만에 함락시킵니다. 연운보 함락으로 당은 토번이 서북방향으로 진출해 서역제국과 제휴할 수 있는 길을 원천 차단하고 동서교역로를 재장악하게 됩니다. 연운보에 3,000여명의 수비병력을 남긴 고선지는 카라코람산맥을 넘어 현재 파키스탄 동북부 길기트(Gigilt)에 위치한 소발률국을 정벌했으며, 고선지에 의한 소발류국 복속은 중앙아시아와 북부인도에 걸쳐 있는 72개 소국들이 당과 번속관계를 강화하거나 새롭게 복속해 오는 성과로 이어집니다.
안서도호 및 절도사로서 당나라의 서부지역 총괄
해발 4,600m를 넘는 파미르 고원과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성공적 군사원정을 성공시킨 후 귀환한 고선지는 의외의 위기를 겪게 됩니다. 그간 고선지의 역량을 높이 사 빠른 승진이 가능하도록 이끌어준 사진절도사 겸 안서도호 부몽영찰(Fumeng Lingcha)이 고선지가 상관인 자신을 거치지 않고 원정 성공에 대한 보고서를 직접 조정에 상주한데 대해 ‘고구려 노예놈’ 등으로 모욕하며 죄를 물어 사형에 처할 움직임까지 보인 것입니다. 고선지가 큰 전공을 세워 자신보다 높은 관직에 오르게 될 가능성 등을 질시해 허물을 씌워 죽이려 했던 것으로 평가되는데, 監軍으로 고선지 원정군에 동행했던 환관 변령성(Bian Lingcheng)이 황제인 현종에게 ‘고선지가 놀라운 전공을 세웠는데 지금은 죽을지 모른다는 걱정을 하게 되었다’고 상주하면서 국면이 반전됩니다. 감군은 황제에게 지휘관 동향과 군사작전에 대해 직접 보고하는 일종의 감시임무를 부여받아 파견되는 관직으로 통상 환관들이 맡았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8년후 고선지를 모함해 죽음으로 내몰게 되는 주역이 변령성이라는 사실입니다. 변령성은 고선지를 구해줌은 물론 현종이 부몽영찰을 조정으로 소환하고 고선지를 후임 사진절도사 겸 안서도호, 서방으로부터의 사신을 관장하는 홍려경 등의 관직을 제수받도록 도와준 셈이 됩니다. 안서도호로서 고선지는 서역과 토번(남), 돌궐(북)에 대한 감시 감독과 방어를 책임짐은 물론 서방과의 통교와 실크로드를 총괄 하는 사실상 서역의 총독과 같은 존재로 부상하게 됩니다.
748년 2월 조정에 입조해 사진절도사 겸 안서도호 등으로 제수된 고선지는 동시에 장안 황궁 인근 저택 두 채 및 아들에게도 5품관 벼슬이 하사되는 영예를 누리게 됩니다.
절도사가 된 고선지는 이후 두차례에 걸쳐 서역정벌에 나섭니다. 749년 식량과 소금 등을 카시미르 지역에 의존하는 소발률국이 친토번 부족에 의해 교역로를 차단 당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지원요청과 아무다리야강 상류지대의 친토번 세력에 의한 당 수비군 위협문제가 대두됨에 따라 잠재적 위협을 일소하기 위해 원정에 나선데 이어 750년에는 실크로드 교차지점에 위치해 중개무역으로 번성 하고 있던 석국(石國; 현 타슈켄트-Toshkent; 튀르크어로 돌을 뜻하는 Tash, 소그드어로 요새 또는 성곽도시를 의미하는 Kanda에서 유래한 Kent가 결합된 명칭)을 평정하고 막대한 재화를 탈취합니다. 타슈켄트 원정으로 당의 중앙아시아 팽창정책은 그 절정에 이릅니다. 이시기고선지가 총괄하는 안서도호부는 타림분지 전역과 일리강 유역, 이식쿨 호수 유역을 직접 관할 하고 이식쿨 호수로 부터 아랄해 동쪽 연안까지에 이르는 영역, 파미르 고원과 아프가니스탄 및 파키스탄 동부, 북부인도와 카시미르를 세력권 안에 두고 작은 번국들을 관리하게 됩니다.
몰락의 시작, 그리고 탈라스 전투
그러나 타슈켄트 정벌은 결과적으로 당의 영향력 약화가 시작되는 분기점이 됩니다. 타슈켄트나 부하라(安國) 등의 도시국가는 사마르칸트(康國)를 맹주로 한 소그디아나 연합체의 일원(사마르칸트의 왕이 소그드왕을 칭하기도 했음)이었습니다.(중국이 사마르칸트를 康國, 부하라를 安國으로 부른 것은 함축적 의미가 있다 싶습니다. 康과 安 모두 평안하고 안정, 번영의 의미를 갖고 있기에 중앙아시아의 교역과 교통의 중심지로 번영하던 두 도시에 대한 명칭으로 삼지 않았을까 하는…) 석국은 당초 현종 초 당과 긴밀한 번속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후 압바스 왕조 세력이 팽창, 압박을 받게 되자 당에 원병 등 지원을 요청했으나 어떤 대책도 마련해 주지 않자 비슷한 처지에 놓인 주변소국들과 함께 당과 거리를 두고 압바스왕조에 접근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결국 고선지는 석국의 친이슬람 노선에 대해 군사 제재를 통해 충성을 확보할 필요성이 있다는 판단에 따라 조정에 상주 후 정벌에 나서게 된 것인데, 손쉽게 항복을 받아낸 고선지가 장안으로 이송한 왕과 그 일족의 처분을 놓고 현종이 의외의 강경조치를 명합니다. ‘항복’을 했음에도 석국의 왕을 처형한 것입니다. 당의 이러한 조치는 서역 소국들이 (항복해도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는) 반감을 갖게 했고 당의 물리적 위협에 대해 자구책을 마련하도로 부추김으로써 결국 압바스 왕조와 ‘反唐’연합 결성으로 이어집니다
특히 석국의 왕자가 탈출해 당과 고선지의 기만행위와 노략질을 성토하며 동조세를 규합하고 압바스 왕조의 최대 건국공신으로 메르브에서 중앙아시아 경영을 총괄하던 아부 무슬림(719∼755)을 설득, 지야드 이븐 살리히를 사령관으로하는 압바스군의 파병을 이끌어 냅니다. 고선지는 서역의 소국들이 압바스 왕조와 연합해 안서도호부에 도전하는 정세에 맞서 3만여명의 병력을 동원해 선제적 공세에 나섬으로써 세계사에 중요한 이정표가 되는 ‘탈라스 전투’가 벌어지게 됩니다.
서기 751년 7월에 벌어진 탈라스 전투에 참전한 양측의 정확한 병력수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대략 4만여명의 당연합군에 비해 압바스연합군이 대략 1.5배이상 수적으로 우세한 상황에서 전개된 것으로 평가됩니다. 전투는 당 진영에 속해 있던 동맹부족 케를룩이 고선지를 배신하고 돌연압바스군에 합류함으로써 고선지 등 2000여명만 살아남는 당 연합군의 괴멸적 패배로 끝나게 됩니다. 탈라스 전투에서 참패했음에도 고선지의 뒤를 이은 봉상청이 파미르고원을 비롯한 전략적 요충지를 재평정하는 등 당의 서역에서 영향력은 외형상 상당기간 유지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탈라스 전투로 당의 서방으로 팽창은 사실상 끝나게 되고 승리한 압바스 왕조의 영향력은 점차 확대 됩니다. 결정적으로 ‘안사(안녹산.사사명)의 난’이 발발해 당이 서역에 대해 관심을 기울일 여력이 없어지면서 중앙아시아는 물론 타림분지로 까지 이슬람 세력의 침투가 본격화됩니다
탈라스 전투는 포로가 된 중국인에 의해 제지술이 전파(탈라스 전투 얼마후 사마르칸트에 제지공장이 세워집니다)되는 등 인류문명사와 중앙아시아를 비롯한 세계사에 큰 영향을 미치나 정확한 전투장소는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기록에 나와 있는 자료, 구전되는 이야기 등을 토대로 키르키즈스탄은 카자흐스탄에 인접한 탈라스강변의 포크로브카(Pokrovka) 언덕을 유력한 전투현장이라고 판단해 기념물을 설치해 놓고 있습니다.
탈라스전투가 영토 서쪽끝 변경에서 벌어진 전투였기 때문에 당 조정의 충격은 그리 크지 않았던 듯합니다. 고선지가 안서사진절도사직에서 물러나기기는 했으나 하서절도사로 옮겼을 뿐이고 이후에도 주요관직을 계속 맡게 됩니다. 특히 752년 12월 고선지 휘하에서 그를 보좌했던 봉상청이 안서사진절도사로 임명된 것은 고선지의 천거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평가될 만큼 영향력과 신망을 여전히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안녹산의 난과 억울한 죽음
탈라스 전투이후 장안에 주로 머물며 현종으로부터 하사받은 저택에서 여유롭게 여생을 보내려 했을 고선지는 예기치않은 ‘안녹산의 난’으로 인해 비극적 운명으로 휩쓸려 들어갑니다. 안녹산은 중앙아시아의 소그드계 아버지와 튀르크(돌궐)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인물로, 현종과 양귀비(안녹산은 자신보다 16살이나 어린 양귀비의 양자를 자청)의 총애를 받아 평로. 범양. 하동절도사를 겸직하며 현재 베이징을 중심으로 한 중국 동북지역 군권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757년 11월 10일 양귀비의 친족으로 정권을 농단하던 ‘간신 양국충 토벌’을 내세워 15만 병력으로 거병해 낙양 공략에 나서자 당 조정은 우선 입조해 있던 안서사진절도사 봉상청에게 서둘러 낙양으로가 병력을 모아 방어전을 펼치도록 하는 한편 고선지를 부원수(형식상 최고지휘관은 황자)로 삼아 토벌에 나서도록 합니다. 봉상청이 10여일만에 6만여명의 병력을 끌어 모아 방어전을 펼쳤으나 안녹산의 정예병에 비해 훈련도 안된 오합지졸인데다 수적인 열세까지 겹쳐 한달여를 버틴 끝에 패퇴하게 됩니다. 고선지는 현종의 명령으로 한달여 기간 동안 확보한 10만여명의 병력을 동원해 섬서 방어에 나섰으나 방어에 적합치 않은 지형과 후퇴한 봉상청의 ‘며칠 동안 혈전을 벌였으나 적의 무서운 기세를 감당할 수 없었다. 동관에 군사가 없으니 적이 마구 쳐들어오게 되면 장안 까지 위태로워질 것이다. 한시라도 빨리 동관을 지켜야 한다’는 조언 등을 고려하여 당의 장안- 낙양(東京)에 이은 제3의 도읍이자 중요 보급기지인 태원(北都)의 정부창고를 열어 재물을 병사들에게 나누어주고 (반란군에 넘어가지 못하도록) 나머지 물품을 불태운 후 동관으로 후퇴합니다. 고선지가 전략요충지 동관에 강력한 방어체제를 구축, 반란군 1차공격을 격퇴하면서 소강국면이 조성, 한숨 돌리게 된 상황에서 474년에 부몽영찰로 인해 위기에 몰렸던 고선지 구명에 앞장섰던 환관 변령성이 현종에게 ‘고선지가 섬주를 사수하라는 황제의 명령을 어겼을 뿐 아니라 국고의 물품마저 훔쳐 나눠줬다’고 참소합니다. 감군 변령성이 고선지를 모함하게 된 배경에는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그가 오랫동안 ‘황제의 대리인’격 위상을 앞세워 빈번하게 군사작전 등에 간섭했으나 고선지가 대부분 일축해 악감정이 쌓이게 된데다 이민족출신 안녹산의 반란으로 인하여 이민족 출신 고선지의 퇴각에 대해 경계심을 갖게 된 조정내 세력들의 공감대가 작용한 것 등의 평가가 제기됩니다. 변령성은 고선지와 더불어 낙양을 사수하지 못함은 물론 섬주로 퇴각하여 반란군의 위세를 알리는 등으로 군사들 동요를 야기한 봉상청도 단죄할 것을 청하게 되고, 변령성의 참소에 격노한 현종이 두사람에 대한 참형을 명령함으로서 결국 글 첫머리의 상황이 빚어지게 됩니다.
고선지 휘하에서 오랫동안 보좌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던 봉상청은 영민함과 용맹을 겸비한 인물로 평가됩니다. 그는 많은 배움과 뛰어난 역량을 갖췄음에도 여윈 몸집의 애꾸에다 절름발이였고 빈한한 가정에 태어난 고아라는 한계까지 맞물려 30세가 넘게 벼슬을 얻지 못하고 있었답니다. 그런 그가 고선지의 범상치 않은 면모를 보고 수하로 거둬주기를 수십일에 걸쳐 간청해 허락을 얻었고, 이후 고선지가 장기 원정에 나설 때마다 관할지역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길 만큼 각별한 신임을 받는 존재가 됩니다. 제대로 된 병력도 없이 10여일만에 6만여명 병력을 끌어모으고 방어선이 거듭 돌파되는 상황에서도 병력을 수습해 낙양에서 한 달여를 버틴 것을 보면 그도 범상치 않은 인물임은 분명하다 싶습니다.
재위초기 ‘개원의 치’로 불리는 역량을 보여줬던 현종이 ‘경국지색’ 양귀비에게 빠져 양국충 등 간신에게 휘둘리면서 국정을 방치하고 결국 안녹산의 난으로 몰락하는 과정은 잘 알려져 있으나사실 반란 초기 효율적으로 대처했다면 단기간내 진압할 수 있었습니다. 고선지와 봉상청을 처형한 당 조정은 돌궐출신 백전노장 가서한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해 방어임무를 맡깁니다. 가서한은 고선지의 방책을 계승 20만명으로 증강된 병력으로 동관을 철통같이 방어합니다. 장안으로 진격이 좌절되고 한숨을 돌린 당 조정이 체계적으로 토벌군을 동원하면서 안녹산군은 점차 낙양에서 고립되는 국면에 놓이게 됩니다. 시간은 당 조정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돌연 양국충의 주장에 휘둘린 현종이 가서한에게 낙양으로 진격해 반란군을 괴멸시키라는 명을 내립니다. 가서한이 동관에서 반란군을 막으면서 시간을 버는 것이 최선이며 숫적으로 우세하나 전투역량이 크게 뒤지는 현실 등을 들어 재고를 거듭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섬서를 지키라’는 명령 위반으로처형된 고선지의 전례를 본 가서한은 마지못해 공세에 나서게 되나 매복에 걸려 참패해 항복하고 동관은 무너지게 됩니다.
동관(潼關; Tong Pass)은 현재 중국 웨이난(渭南)시 인근에 소재했던(댐건설로 수몰) 군사 요충지로, 남측으로는 화산, 북쪽으로는 오르도스를 휘감으며 남쪽으로 흐르던 황하의 흐름이 동쪽으로 급격히 바뀌는 지형으로 인해 남북 양측에 자연방벽을 끼고 있는 형국이었습니다. 장안(서안) 등 관중지방 방어에 반드시 필요한 요새였고 역으로 관중지방에서 낙양 등 동쪽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도 꼭 확보해야 했던 만큼 많은 역사적인 전투가 이곳을 중심으로 벌어졌습니다. 대표적으로 삼국지연의에서 ‘난세의 간웅’인 조조를 몰아내기 위해 거병한 마초의 서량군이 조조군과 격전을 치른 곳으로 유명하며, 금나라가 몽골침략에 맞서 최후의 항전을 벌이는 시기 3년여를 버텨낸 곳이기도 합니다(금나라가 공식적으로는 1234년 멸망하나 1232년 2월 삼봉산 전투에서 참패후에는 사실상 전투력을 상실한 상태가 되는데, 이즈음 동관 주둔병들도 수도방어를 위해 철수도중 궤멸 됩니다) 명나라를 멸망시킨 이자성의 반란군이 청나라군에 패배하여 북경에서 축출된 후 마지막으로 유의미한 군사적 저항을 했던 곳도 동관을 중심으로 한 섬서성 서부지역이었습니다.(이자성은 1645년초 동관이 함락되면서 도피중 5월 후베이성에서 사망)
한편 가서한의 항복과 동관의 함락으로 장안 사수가 불가능해지자 현종은 사천으로 도피하게 되며, 그 과정에서 현종의 실정에 반발한 병졸들에 의해 양국충은 살해당하고 양귀비는 자살을 강요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반란은 763년 1월까지 계속되고, 장기간의 전투를 거쳐 반란은 진압되나 그 과정에서 각 지방의 군권을 장악한 절도사들이 半독립세력으로 자리잡게 되면서 당 제국 쇠망으로 이어지게 되니…
망국의 후예가 약소민족을 억누르는 당의 장수가 된 아이러니
고선지를 다룬 국내 대부분의 서적들은 그의 억울함을 모두 ‘망국 고구려 유민의 설움’과 연결짓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다소 과도하다 싶습니다. 당 황실은 북위를 계승한 북주, 북주의 우문씨를 몰아내고 중국을 재통일한 수의 황실(양씨)과 같이 선비족이 세운 북위에 의해 설치된 무천진을 기반으로 하는 선비계 귀족 출신 이었습니다. 당 황실 자체가 순수 한족출신이 아니었고, 건국초에는 오히려 유목민적 성향이 강했습니다. 황실에서 튀르크-몽골계 언어를 사용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북방 유목민 출신이라는 특성이 반영돼 중국역사상 가장 개방적이었고, 고선지. 안녹산. 가서한 등 이민족 출신들이 주요 관직에 임명돼 활약을 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당 고종을 거쳐 현종대에 이르면 漢和가 많이 진행되고 무천진 출신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관(관중)롱(농서)집단’의 세력이 퇴조하면서 非한족 출신에 대한 차별과 견제가 늘었을 것입니다. 특히 북방과 서방에 나름의 세력을 갖고 있었던 튀르크계나 소그드계에 비해 이미 멸망한 고구려인 고선지의 위치는 더욱 취약할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싶기도 합니다. 자신도 한족이 아니었던 부몽영찰이 고위장군인 부도호에게 ‘고구려 노예놈’ 운운한 것은 대표적 사례일 것입니다. 한계와 차별, 설움은 불가피했겠으나 당이 자신들에 의해 패망한 고구려 유민을 최고위 관직에 임명하고 막강한 권력을 쥐어줄 만큼 실용적이고 열린 나라였음은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포용적 정책이 당의 중앙 아시아 진출의 자산이 되고, 강대한 국가를 건설한 동력이 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고구려의 후예 고선지를 높인다고 해서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부분이라 여겨집니다
그리고 한가지... 고선지의 정벌 대상이 된 중앙아시아의 많은 소국들의 운명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사마르칸트, 부하라, 타슈켄트 등은 각각 康國, 安國 등으로 불릴 만큼 국제무역을 통해 경제적, 문화적으로 번성했습니다. 그러나 제국(당)과 제국(압바스왕조)사이에 끼어 복종과 때로는 수탈을 강요 당해야 했던 지정학적 숙명은 그들에게 고통과 끊임없는 근심을 안겨줬을 것입니다. 토번이 번성함에 따라 생존하기 위해 토번의 지배권을 받아들인 소발률국은 그로 인해 당의 침공을 받았고, 당에 의지해 압바스 왕조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받으려 했던 석국(타슈켄트)은 제대로된 도움을 받지 못하자 압바스 왕조에 충성하는 선택을 하려 함으로써 당의 공격과 약탈을 당합니다. 그 역사는 이후로도 줄곧 이어져 소련의 패망에 이르기까지 제국들 사이에 끼어 세력경쟁의 대상이 되거나, 제국의 일원으로 흡수되는 역사가 반복됩니다. 현재는 오랜 속박에서 벗어나 독립국가가 됐으나, 러시아, 중국, 인도, 튀르키예 등 중앙아시아 지역을 세력권으로 끌어들이려는 제국들의 경쟁에서 비껴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약소국의 영원한 비애이며 숙명…
그 모습은 우리민족 오랜 고난의 역사와 오버랩 되어 남의 일 같지 않게 여겨집니다. 그리고 당 제국에 의해 멸망한 망국의 후예인 고선지야 말로 약소민족의 비애를 누구보다 직접 겪었을 터인데 자신을 ‘뿌리잃은 사람’으로 만든 제국의 일원이 되어 다른 약소국가를 고통스럽게 하는 존재가 된 것도 아이러니 합니다. 자신이 충성했던 제국을 지키기 위한 사심없는 결정과 헌신이 억울한 죽음으로 끝난 것도… 그의 삶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에필로그 : 755년 같은 해에 억울한 죽음을 당한 두 사람
덧붙여지는 에필로그… 고선지를 패배시킨 압바스군을 파병한, 압바스 왕조의 중앙아시아 최고 책임자 아부 무슬림… 그는 단순한 압바스 왕조의 신하가 아니었습니다. ‘호라산의 호랑이’라고 불린 그는 현재의 이란 서부, 투르크메니스탄, 아프가니스탄 동부지역을 망라하는 호라산 지역을 기반으로 거병, 우마이야 왕조를 멸망시키고 압바스 왕조가 이슬람제국을 장악하게 한 인물이었습니다. 압바스 왕조는 그가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한 존재였습니다. 그것이 그를 오만하게 만들기는 했으나, 결과적으로 그는 고선지보다 더 억울하게 ‘토사구팽’의 희생양이 됩니다. 고선지가 죽임을 당한 755년 같은 해에... 그는 왕에 의해 참살을 당하고 시신은 티그리스강에 던져집니다. 그리고 그의 죽음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킨, 그를 따랐던 세력은 철저하게 숙청됩니다그리고… 아부 무슬림의 무용과 비극적 최후는 그에 대한 아쉬움과 안타까움과 맞물려 호라산의 영원한 전설로 남게 됩니니다.
거창한 현실얘기를 떠나… 1270여년전 고선지가 누볐던 이식쿨호수, 천산산맥, 대초원과 파미르고원, 그리고 고난의 역사가 담긴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부하라 등 중앙아시아의 공기를 마시며 그 시대의 삶, 나아가 노마드의 삶을 산 태고적 인류의 본성을 되새겨보는 멀지 않은 미래의 어느 날을 꿈꿔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