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피: 로마 공화정 최후를 장식한 역사의 패배자

'꿈'를 이루기에는 치밀하지 못했던 이들이 남긴 교훈

그의 동지였던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로마 내전기에 대한 역사 기록을 남긴 로마 역사가 아울루스 코르두스는 그를 이렇게 불렀습니다.


‘마지막 로마인(Last of the Romans ; 라틴어로 Ultimus Romanorum)’

마지막까지 로마의 가치를 구현하려 했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Gaius Cassius Longinus)’


그가 BCE 42년 10월 3일, 자신은 물론 뜻을 같이했던 동료들의 운명이 걸린 전투에서 패배 후 자결하면서 로마 공화정은 사실상 막을 내립니다. BCE 43년 3월 15일 로마 공화정을 위협하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살해에 동참했던 14명 가운데 이때까지 살아남았던 인물들과 小카토의 아들을 비롯해 공화정 사수를 위해 함께 싸웠던 주요 인물들이 이 전투에서 모두 사라집니다.

현재 그리스 ‘동마케도니아 트라키주’에 소재한 필리피인근에서 벌어진 필리피 전투(Battle of Philippi) 이야기 입니다.

필리피는 BCE 360년 그리스 식민도시로 건설된 유서 깊은 도시로서, BCE 356년에는 이곳을 차지한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2세(알렉산더 대왕의 父)가 '필리피'로 명명한 후, 2000년 넘게 그 이름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인근에 위치한 금광과 교통의 요지라는 지리적 이점을 살려 헬레니즘시대, 로마시대, 비잔틴제국 시대까지 줄곧 번영을 누렸고, 그 흔적은 유네스코 세계 유산인 번영했던 도시 유적으로 남아있습니다.


아마도 이 도시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것은 사도 바울의 빌립보서(Philippians)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2차 전도여행 기간중인 CE 49년이나 50년 필리피를 방문, 유럽지역에서 첫 설교를 했으며 유럽내 첫 기독교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그 후 바울은 두 차례 더 이 도시를 방문했고, 로마 당국에 의해 구금돼 있던 옥중에서 필리피의 교인들에게 일련의 서한을 보내게 됩니다. 이 서한집이 빌립보서 입니다. 사도 바울 및 빌립보서와 관계 등으로 인해 필리피는 초기 기독교 교회사에서 높은 위상을 차지하게 되고, 비잔틴 시대까지 기독교 신앙 주요 거점으로 기능하게 됩니다.


그리고 세계사에 중요하게 이름을 남기게 된 또 하나의 사건이 앞서 얘기한, BCE 42년 10월 3일 도시 인근에서 양측을 합해 총 20만명이 넘는 병력이 동원돼 벌어진 필리피 전투 입니다. 한쪽은 2년전인 BCE 44년 3월 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살해한 주역 마르쿠스 부루투스와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이끄는 군대, 다른 쪽은 제 2차 삼두정치 주역인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군대입니다. 이 대회전의 결과는 잘 아실 것입니다. 승리한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레피두스와 함께 제2차 삼두정치를 통해 로마를 지배하게 되고, 또다른 내전을 거쳐 최종 승리자가 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Gaius Julius Caesar Octavianus; 최고 권력자가 된 후 Imperator Caesar divi filius Augustus라는 명칭이 부여됩니다)가 로마의 첫 황제가 됩니다.


카이사르 암살사건을 주도한 인물 중 가장 유명한 이는 카이사르가 죽어가며 마지막으로 내 뱉았다는 ‘브루투스, 너 마저(실제는 ‘너도냐, 얘야’라고 말했다 함)’ 라는 말로 널리 알려진 마르쿠스 브루투스 였습니다. 물론 카이사르 살해에 많은 동참자를 모을 수 있었던 것은 브루투스의 명성에 힘입은 바 큽니다. 기원전 6세기 폭군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누스를 살해하고 공화정의 창시자가 된 전설의 주인공인 그의 조상과 같은 이름이었던 것도 상징적 힘을 발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카이사르 살해에 있어서 핵심 주도인물은 초기에 미온적이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를 설득하는 등 많은 동조세력을 결집해 살해를 실행한 카시우스 롱기누스 였습니다.


롱기누스의 카이사르 살해주도 배경에 대해 15권의 ‘로마인 이야기’를 쓴 시오노 나나미 등은 많은 공을 세웠음에도 카이사르로 부터 홀대를 받고 있다는 원한, 카이사르가 권력을 잡고 있는 한 미래가 없다는 판단 등 개인적 이유를 듭니다. 또한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제 1차 삼두정치의 한 축이었던 크라수스의 파르티아 원정군이 괴멸당한 전장에서 동료 장병들을 버리고 자신이 지휘하던 500여명의 기병과 함께 도주했다거나 내전기 폼페이우스 편에 섰다가 형세가 불리해지자 투항해 카이사르 특유의 ‘관용’으로 용서받은 이후 적극적으로 충성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 기회주의적 처신을 일삼은 인물이라는 부정적 평가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그런 평가를 받을 만큼 용렬한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은 1차 삼두정치의 한축이었던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군사적 영광을 위해 무리하게 밀어붙인 파르티아 원정 때문이었 습니다. BCE 53년 메소포타미아의 카르헤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Battle of Carrhae)에서 파르티아군 유인전술에 말려든 4만여명의 로마군은 3만여명이 사망 또는 포로가 되는 참패를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롱기누스는 시오노 나나미가 이야기하듯 혼자 살아남기 위해 도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회계감사관으로 참전한 롱기누스는 황폐한 사막으로 진군을 고집하는 크라수스에게 회군을 거듭 충언하였으나 외면당했고, 결국 파르티아기병(중장기병과 궁기병)에 포위된 로마군은 속수무책으로 학살을 당합니다. 크라수스가 참모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파르티아의 교섭제안에 직접 응했다가 죽임을 당한 후 최선임자가 된 롱기누스는 임기응변적 지휘를 통해 저녁까지 공격을 버텨내다 살아남은 병력을 이끌고 퇴각하게 됩니다. 로마군 1만여명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카시우스 롱기누스의 지휘에 힘입은 것이었습니다.

한니발에 의한 칸나에 전투후 로마군 최대의 패배인 카르헤 전투에 대해 플루타르크는 만일 크라수스가 롱기누스 조언대로 했다면 참패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평가했습니다. 파르티아에 인접한 시리아로 귀환한 롱기누스는 전력을 재정비, BCE 51년 카르헤 전투 대승의 여세를 몰아 로마영토를 침공한 파르티아군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격퇴하기도 했습니다.

BCE 50년 로마로 귀환한 롱기누스는 이듬해 호민관으로 선출됐으나, 카이사르가 루비콘강을 건너 로마로 진군하자 폼페이우스 진영에 합류해 해군을 지휘하게 됩니다. 시칠리아 인근 해역에서 카이사르의 해군을 격파하는 등 활약을 하던 롱기누스는 폼페이우스가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카이사르에게 패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폰투스왕의 反카이사르 연합에 합류해 항전을 이어가려 했으나, 카이사르군에 의해 차단당해 항복하게 됩니다.

그리고 카이사르의 그 유명한 ‘자비심’에 의해 사면받게 됩니다.


한편 폼페이우스를 제거한 후 명실상부한 로마 1인자가 된 카이사르는 독재관에 취임해 국정을 좌지우지합니다(카이사르는 BCE 46년 10년 임기 독재관이 되었으며 BCE 44년에는 종신 독재관이 됨) 나아가 자신의 애인인 클레오파트라의 황금 입상을 베누스 신전에 세우는 등, 황제로 취임하려 한다는 의심을 부추기는 행위를 잇따라거리낌 없이 합니다.

개인 자유와 인권이 강조되고 민주공화제가 뿌리내린 대한민국, 6.25를 비롯 고난과 희생을 거쳐 이룩해온 대한민국에 오랜기간 국가를 위해 많은 공헌을 했다는 것을 발판삼아 국민의 전폭적 지지아래 국체를 제정으로 바꾸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인물이 나타난다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대한민국의 공화정 역사가 불과 77년 인데 비해 로마는 BCE 510년경 왕정을 폐지한후 450여년간 공화정을 시행했습니다. '동등한 시민'이었던 존재들에게복잡한 감정을 갖게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카이사르 살해에 가담한 데키무스 브루투스.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 등 오랜동안 카이사르 휘하에서 근무한 인물들은 살해에 가담하지 않았다면 ‘카이사르 황제’ 치하에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롱기누스를 비롯해 카이사르 살해에 동참한 인물의 행동이 개인적 이해나 원한에서 비롯된 것으로 폄하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롱기누스는 젊은 시절 로도스섬에 유학해 철학 등을 공부했고 키케로와 긴밀하게 교류하기도 한 교양있는 지식인이었습니다. 그와 키케로간 대화 기록 등을 보면 카이사르를 ‘주인’으로 표현하며 1인지배 체제에 수치심을 내비치는 모습이 엿보입니다

고전학자 ‘메리 비어드’는 그녀의 책 ‘로마는 왜 위대해졌는가’에서 카이사르의 최상의 자질로 보이는 클레멘티아(Clementia, 자비)가 역설적으로 공화정의 전통에서는 최악이었다고 말합니다, 카이사르가 자신의 적인 폼페이우스 편에 서서 싸웠던 브루투스나 롱기누스 같은 인물을 용서한 클레멘티아는, ‘달리 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자만 베풀 수 있는 것’이기에 공화정의 자유에 대한 反명제였고 그로 인해 클레멘티아는 감사함 보다는 반감을 더 유발했다는 것입니다. 비어드는 공화정의 투사였던 카토(小)는 ‘자비를 벗어나기 위해 자살했다’고 얘기된다고 소개하기도 합니다.

또한 '은혜가 보답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면 증오가 감사하는 마음을 대신한다'는 역사가 타키투스, ‘카이사르가 주는 혜택을 받은 자유인들에게는 그런 시혜를 나눠 주는 카이사르의 권력 자체가 하나의 모욕이었다’는 로마역사가 루키우스 플로루스의 말은 카시우스 롱기누스 같은 인물들의 사고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줍니다.

톰 홀랜드는 그의 책 ‘루비콘’에서 ‘카이사르에게 관용을 입으면 그가 나보다 우위에 있는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게 된다며 투항을 거부하고 배를 갈라 자결한 공화파의 대표 카토의 유령’이 로마의 양심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고도 서술합니다. 사실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롱기누스 모두 그 ‘마르쿠스 카토(小)’와 특수한 관계에 있었습니다. 카토는 브루투스의 어머니이자 카이사르의 애인인 세르빌리아와 아버지가 다른 남매였고, 브루투스에게는 외삼촌이 됩니다. 브루투스는 카토를 깊이 존경해 계속 교류했으며 카토가 사망한 후, 처와 이혼하고 카토의 딸이자 카이사르에 맞서다가 병사한 마르쿠스 비불루스의 처였던 포르키나와 재혼합니다. 롱기누스는 세르빌리아의 3녀 유니아 테르티아와 결혼한 카토의 조카사위(브루투스의 매제)였습니다. 카이사르 독재정에 대한 철학적 거부감이 가풍에 내재돼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롱기누스의 손윗 동서이자 브루투스의 또다른 매제인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는 카이사르의 핵심 측근으로, 제 2차 삼두정치의 주역이 되는 상반되는 행보를 보입니다만...


카이사르 살해를 실행한 롱기누스나 브루투스를 비롯한 주역들의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사전에 살해이후 후속 계획을 전혀 마련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카이사르가 제거되면 모든 일이 잘 풀려나갈 것'이라는 식의 안이한 태도는 결국 그들의 실패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카이사르를 제거해도 핵심 측근인 레피두스가 로마를 장악할 수 있는 군 지휘권을 갖고 있었고 안토니우스가 집정관 자리에 앉아 있는 등 親카이사르파가 정부를 통ㅈ하고 있는 가운데 자신들이 의도했던 목표를 실현해 나갈 아무 대책없이 거사를 밀어붙인 것은 역사적으로 보기 어려운 사례입니다. 키케로는 그들에 대해 ‘바보같다’고 비판하며 ‘어른의 정신, 그러나 어린애 수준의 통찰력을 갖고 있다'고 비판했다고 합니다.


사실 롱기누스는 카이사르 뿐아니라 독재관 체제의 싹을 뿌리뽑기 위해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 등 친카이사르파 핵심인물들도 제거할 것을 주장했으나 브루투스가 일축했습니다. 자신들은 전제정치를 추구한 카이사르에 대한 처형을 집행하는 것이지 정치적 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지저분한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였습니다.

그 결과는... 대의명분에 사로잡혀 大事를 그르친 수 많은 사례가 담긴 역사의 한 챕터에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와 마르쿠스 브루투스도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들만 망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서로 칼을 겨눴던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제2차 삼두정치에 합의하며, '카이사르 암살의 사상적 지도자'로 지목된 키케로를 비롯한 로마 지도층 2,300여명의 명단이 담긴 살생부를 작성, 체계적으로 살해합니다. 로마를 탈출, 롱기누스와 브루투스 진영에 합류한 인물들까지 죽임을 당하면서 제정으로의 길을 가로막을 모든 걸림돌도 사라지게 됩니다


브루투스의 유해는 로마식으로 화장돼 어머니 세르빌리아에게 보내졌고 롱기누스의 시신은 필리피 인근 타소스 섬에 묻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실패를 장식한 마지막 장면은 브루투스의 처이자 小카토의 딸인 포르키아가 남편과 오빠가 필리피 전투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부엌으로 달려가 붙타는 숯을 삼켜 자살하는 참혹한 사건이었습니다.

카시우스 롱기누스 등이 실행한 카이사르 살해는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한 돌출적 사건이었다는 평가가 맞을 것입니다. 아무리 좋게 판단해도 그들은 몽상가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을 둘러싸고 본격화된 민중파와 보수 귀족세력의 갈등, 마리우스와 술라를 거쳐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내전까지 이어진 혼미를 극복하는데 로마의 공화정은 이미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카이사르가 사라져도 그 이후 벌어진 상황에서 보듯 제정으로 가는 길을 되돌리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또한 역사가 메리 비어드가 자신의 책에서 언급했듯 '폭군의 제거가 반드시 폭정의 척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도 합니다. 실제로 롱기누스와 브루투스의 카이사르 살해가 초래한 것은 로마의 또다른 혼란과 오랜 내전, 그리고 영구적 1인지배 체제(제정)의 확립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사에는 때로 그들과 같은 실패가 있어야 다채로움과 풍부함을 갖게 되고, 그 실패가 드러나지 않게 후세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예전 KBS 대하사극 ‘용의 눈물’이 신드롬이라 불릴 만큼 인기를 끌고 있을 때 주간조선 문화 부장이 기고한 글의 마지막 문구가 생각납니다. 역사의 승자가 된 이방원, 패자가 된 정도전... 이 둘을 비교하며 ‘승자는 역사를 물려주고, 패자는 꿈을 물려준다’는 글로 마무리합니다. 정도전의 꿈은 후세에 면면히 이어져 또다른 역사의 동력이 되었다는 이야기 입니다. 카시우스 롱기누스도 꿈꿨던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몰락했으나 공화주의와 독재자 살해의 기억을 후세에 새기는 효과가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랜 필리피의 역사에서 주목되는 한가지... 필리피 전투에서 승리한 옥타비아누스는 전장 인근의 도시 필리피를 퇴역군인들이 생활하는 식민도시로 적극 개발토록 합니다. 그의 후원아래 필리피는 대도시로 성장하고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의 호칭을 얻게된 BCE 27년에는 옥타비아누스의 가문명 '율리우스'를 담아 도시명을 아우구스타 율리아 필리피(Colonia Augusta Julia Philippensis)로 개칭하게 됩니다. 그에게 이곳이 크게 기념할 만한 공간이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필리피라는 이름 자체가 황제의 승리와 권위를 널리 알리는 상징성을 갖고 있었기에 프로파간다에 유용했을 것입니다. 옥타비아누스에 의하여 번영하는 도시, 명예로운 도시가 되었던 필리피는 그로 인해 초기교회사에 큰 흔적을 남기는 것으로 이어졌고, 로마 제정시대부터 비잔틴제국까지 번창하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그 잔영이 남아있고...


언젠가 필리피를 방문하게 되면 화려했던 로마시대 도시 유적을 둘러본 후 습지가 펼쳐진 도시 외곽에 잠시 멈춰서서 2000여년전 어느 날 그곳에서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 '찬란하지만 무모했던 두 젊은이'의 실패와 좌절을 되새겨보는 것도 의미있을 듯합니다.


꿈을 물려준 역사의 패배자들을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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