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반 : '슬픈 복수', 그리고 행복할 수 없는...

인류에 대한 범죄를 어떻게 응징해야 할 것인가를 묻는 살인

by 미네르바의 올빼미

제노사이드(Genocide)’…

인종이나 종교 등의 이유로 특정 인류집단 전체를 체계적으로 몰살하는 행위를 의미하는 이 개념의 등장은 1921년 3월 15일 벌어진 한 살인사건에서 비롯됐습니다.


암살


1921년 3월 15일 아침,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수도 베를린의 하르덴베르그 대로(Hardenberg straße)에서 한 젊은이가 40대 중반의 한 남성을 권총으로 사살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대로상에서 밝은 대낮에 살인을 한 젊은이는 도주하지 않고 현장에서 경찰에게 체포됩니다.

살인자는 25세의 아르메니아인 소고몬 텔리리안(Soghomon Tehlirian: 1896.4.2∼1960.5.23), 피살자는 20세기초 청년 튀르크당 쿠데타 이후 엔베르 파샤. 제말 파샤와 함께 오스만 제국을 이끌었으며 제 1차대전기간 오스만제국 수상(Grand Vizier)을 역임했던 탈라트 파샤(Talaat Pasha)였습니다.


소고몬 텔리리안은 애초부터 도주하지 않을 계획이었습니다. 살인혐의에 대한 경찰수사에 이어 법원에서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자신이 '왜 탈라트 파샤를 살해했는지'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것이 그와 그가 속한 조직 ‘아르메니아 혁명연합(Armenian Revolutionary Federation’의 목적이었습니다.(ARF는 오스만제국 치하의 아르메니아 독립을 목표로 1890년 설립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아르메니아는 물론 레바논을 비롯해 아르메니아인들이 대거 이주한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온건 사회주의 성향의 정치조직입니다)

ARF는 이 살인사건이 벌어지기 1년반전인 1919년 9월 27일 현재 아르메니아의 수도인 예레반에서 개최된 9차 총회에서 논란끝에 1차대전 기간 100만명 이상 희생됐다고 알려진 오스만 튀르크 정부의 아르메니아인 대량학살 연루 인물들에 대한 복수를 결정합니다.


그리스 신화 속 복수의 여신 이름을 따 ‘네메시스 작전(Operation Nemesis)’으로 명명된 이 계획을 시행하기 위해 비밀리에 ARF내 특수팀(task force)이 결성되고, 총회에서 처음 복수를 제안 했던 샤한 나탈리(Shahan Natalie)가 이 조직을 이끌게 됩니다. 이들은 나름 상세한 조사를 거처 제거해야 할 200명의 명단(블랙리스트)를 작성하고, 제거대상들이 이주한 베를린. 로마. 트빌리시 등지에 조직원을 보내 암살대상 감시. 암살장소 물색. 무기확보 등 치밀한 사전 준비를 진행토록 합니다.


샤한 나탈리 등 네메시스 작전팀의 ‘제 1의 타깃’이 바로 내부적으로 ‘넘버 원’으로 부른 탈라트 파샤였습니다.

탈라트 파샤가 제 1 타깃이었기에 암살 임무를 수행할 소고몬 텔리리안은 면밀한 검토를 거쳐 선발되었습니다. 그는 튀르키예 동부 에르주룸 주에서 태어나 이스탄불의 아르메니아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세르비아에서 공학을 공부합니다. 그리고 1차대전이 발발할 무렵 러시아로 이주, 의용군에 입대하여 오스만제국과 싸우는 카프카스 전선에 투입됩니다. 그가 의용군으로 복무하던 1915년 6월 대규모 학살로 이어지는 오스만 정부의 아르메니아인 추방 조치가 단행되는데; 텔리리안의 발언 등을 다룬 기록에 따르면 ‘죽음의 행진’과정에서 형제자매 등 텔리리안의 친인척 85명이 희생됐다고 합니다.(그러나 2016년 텔리리안의 아들 증언에 따르면 여자형제는 없었고 희생된 가족은 모친과 의사였던 형이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암살을 정당화하기 위한 과장이 있었던 듯 합니다).

종전 후 텔리리안은, 오스만 제국 비밀경찰로 이스탄불 지역 아르메니아인 공동체 주요 인사들 체포에 중요역할을 했던 ‘하루티안’이란 인물을 살해합니다. 이 암살은 네메시스작전 지휘부에 깊은 인상을 남겼고, 그가 탈라트 파샤 암살 실행자로 선택되는 계기가 됩니다.

텔리리안은 탈라트 파샤 사진숙지 등 암살 실행을 위한 세세한 준비작업을 마친 후 ARF 조직의 도움아래 제네바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는 학생비자’를 발급 받아 1920년 12월 2일 베를린에 입성하게 됩니다


소고몬의 탈라트 파샤 살해사건과 1921년 6월부터 시작된 재판은 독일은 물론 국제사회에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킬 대학 법학교수였던 테오도르 니어마이어(Theodor Niemeyer)를 비롯한 텔리리안의 변호인단은 탈라트 파샤 살해사실은 인정하고 재판초점을 아르메니아인 대량학살이 그의 정신상태에 미친 영향에 맞춥니다.

1차세계대전 당시 오스만군 사령관으로 재임한 ‘오토 리만 폰 잔더스(Otto Liman von Sanders)’ 장군 등이 증인으로 출석, 아르메니아인 강제 추방과 학살이 오스만정부 지시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증언했습니다. 텔리리안은 법정에서 자신이 1915년 가족들과 함께 추방됐으며 모친을 비롯한 가족이 학살당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고 증언했습니다.(이 증언은 사실이 아닙니다. 앞서 얘기 했듯 이 시기 텔리리안은 카프카스 전장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재판중 “독일에 머무는 동안 어머니가 꿈속에 나타나 아들인 자신에게 ‘탈라트 파샤를 보고도 아직 복수를 하지 않느냐’며 꾸짖었다”고 진술하기도 했습니다. 판사가 탈라트 파샤 살해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지를 물었을 때는 “나는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으므로 유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사람을 죽였다. 그러나 나는 살인자가 아니다”라고 답변합니다.

배심원단은 무죄 평결을 내립니다. 이 재판 결과에 대한 반응은 엇갈렸습니다. 그러나 ‘보편적 인권’이라는 관점, 국제사회가 국제규범을 수호하기 위해 결속해야 한다는 관점에 힘을 실어준 것은 분명합니다.


서두에 밝혔듯 제노사이드라는 개념이 출현하는 것도 텔리리안의 탈라트 파샤 암살 사건이 계기가 됩니다


제노사이드 협약, 그러나 여전한 한계


당시 언어학을 전공하던 21살의 유태인 대학생 라파엘 렘킨(Raphael Lemkin: 러시아가 지배하던 폴란드에서 태어나 현재는 우크라이나영토가 된 르비우에서 대학을 다녔습니다)은 국제사회에 아르메니아인들 집단 학살을 기획하고 실행한 탈라트 파샤와 같은 인물을 기소해 처벌하는 제도가 없다는데 관심을 갖게 됩니다. 이후 법학을 공부한 렘킨은 국제연맹 법률위원회 회의에서 집단학살에 대한 국제사회의 인식을 제고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1939년 독일과 소련에 의해 점령되기 직전 폴란드를 탈출하여 미국에 정착한 그는, 나치 독일의 점령지 통치와 민족집단 대량학살을 연구하며 그리스어에서 ‘가족. 부족. 인종, 혈통’을 의미하는 ‘genos’와 라틴어로 ‘살인’을 의미하는 ‘cidium-> cide’ 라는 두 단어를 결합한 ‘Genocide(집단 학살)’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냅니다. 그의 노력으로 ‘제노사이드’가 국제법적 개념으로 받아들여 지게 되었고, 1948년 12월 국제연합은 ‘제노사이드 협약(Genocide Convention)’을 공식 승인하게 됩니다.


렘킨이 소고몬 텔리리안 사건을 접했을 때 ‘왜 독일이 탈라트 파샤와 같은 잔혹한 범죄를 저지른 자에 대해 기소하지 않았는지’ 이해되지 않아 폴란드인 법학 교수에게 질문을 했었답니다. 유대인과 우크라이나인을 폴란드 땅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믿는 강한 민족주의 성향의 그 교수는 이렇게 답했답니다. “양계장을 운영하는 농부의 사례를 생각해 보게. 농부는 닭을 잡네. 그것은 그의 일이네. 만일 자네가 그것을 간섭한다면 무단침입이네.” 렘킨은 “아르메니아인들은 닭이 아닙니다”고 항변했다고 합니다. ‘주권이 수백만 명의 무고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권리로 생각될 수는 없다”는 렘킨의 명제는 오늘날 광범위하게 받아들여 지고 있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에는 국제형사재판소를 통해 르완다 학살이나 보스니아 인종청소 등 인류에 대한 범죄행위의 책임자에 대한 처벌이 추진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시리아 아사드 정권 등이 내전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을 학살하는데 대해 국제사회가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을 때 중국과 러시아 등은 ‘내정간섭’임을 들어 반대하는 등 여전히 한계를 면치 못하고 있음도 사실입니다.

튀르키예 정부는 현재까지도 ‘아르메니안 제노사이드’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튀르키예의 이미지를 깎아 내리려는 음모와 과장, 왜곡이 있다는 것입니다. 1915년 4월 24일 이스탄불의 아르메니아 공동체 지도급인사들 체포로 시작돼 수십만명을 시리아 사막지대로 강제 이주시키면서 비롯된 아르메니안 제노사이드가 ‘전쟁 중 반란을 예방하기 위한 조치’였을 뿐 민족말살을 위한 계획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잔더스장군도 아르메니아인 대량학살 사실을 증언하면서도 ‘군사적 필요’에 의한 것이었음을 주장했었습니다.

튀르키예측에서 억울함을 토로하는 명분도 있습니다. 카프카스전선에서 오스만군이 궁지에 몰리면서 아르메니아인들이 다수를 점한 지역에서 무슬림 학살이 잇따라 자행되었고, 전선에 인접한 지역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의 반란음모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19세기초부터 이어진 발칸에서의 전쟁과 혼란속 튀르키예인들에게 가해진 조직적인 학살에 대한 트라우마, 적국 러시아에 대한 공포도 작용했습니다. 피가 피를 부르는 복수의 역사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르메니안 제노사이드는 희생의 규모가 너무 컸습니다


또다른 비극, 네메시스 작전... 그리고 역사의 비정함


네메시스 작전은 언뜻 영화 '뮌헨'을 떠올리게 합니다.

복수를 한다고 해서 이미 발생한 피해가 회복될 수도 없고, 복수했다고 만족스럽거나 '이제 끝났다'는 개운함도 느껴지지 않는 복수. 오히려 또다른 비극을 잉태하며 찜찜함을 남기는 복수...

그리고 그 이면에는 많은 여운과 연민을 자아내게 하는 비극적 사연들, 동지가 적이 되고 어제의 동지가 과거의 동지를 제거하는 후일담 등이 한편의 드라마처럼 펼쳐지기도 합니다


네메시스 작전은 많은 성공을 거둡니다. 그 가운데는 1922년 4월 7일 베를린의 거리에서 가족들과 어울려 걸어가던 케말 아즈미(Cemal Azmi)와 바하에딘 샤키르(Bahaeddin Shakir)가 총격을 당하여 살해된 사건도 있었습니다. 암살자들은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살인을 한 것입니다. 가족의 일원이 살해 당하는 모습을 무기력하게 지켜봐야 했던 가족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가족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수많은 아르메니아인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모습. 네메시스 작전을 무조건 '정의로운 응징'이라고 단순화하기 어렵게 합니다

그에 앞서 1921년 12월 6일 로마에서는 前오스만제국 수상 사이드 할림 파샤(Said Halim Pasha)가 암살당합니다. 그는 탈라트 파샤 등 청년튀르크당 인사들과 갈등을 빚다가 밀려난 인물이었고, 아르메니아인 추방과 학살에 관여한 실무자 증언 중에는 그가 추방명령에 대해서는 책임이 있으나 단순한 추방조치로 이해했지 대량학살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네메시스 작전으로 죽임을 당한 인물중에 억울한 피해자가 있을 수 있다는 얘기 입니다


무엇보다 네메시스 작전의 단죄대상에는 오스만 정부를 위해 밀정역할을 하거나 친족들을 고발해 죽임을 당하게 한 아르메니아인들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동족을 배반한 사람들에 대한 응징.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다룬 영화 등에서 보여지는 우리 근현대사의 한 장면을 연상시켜 씁쓸함을 갖게 합니다


네메시스 작전 뒷이야기는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작전을 주도했던 인물들의 운명은 약소민족인 아르메니아들의 애처로운 현실과 얽혀 또다른 애처로움을 자아냅니다. 사실 네메시스 작전이 '논란'끝에 승인된 1919년 9차총회때 부터 이미 볼세비키 세력에 의해 고국에서 쫓겨난 ARF 지도부 내에서는 국권을 되찾기 위해 튀르키예나 아제르바이잔과 협력해야 한다는 입장이 세를 얻고 있었습니다.

1929년에 이르면 親튀르키예 노선이 확고한 우위를 점하게 되고, 네메시스 작전을 주도한 샤한 나탈리 등 튀르키예에 대해 강경투쟁을 고집하던 세력은 ARF에서 축출당합니다. 이후 나탈리 등 ARF 이탈세력은 1934년 파리에서 '서유럽 아르메니아 해방연맹(Western Armenian Liberation Alliance)'을 결성하고 아르메니아어로 ‘요새, 성채’를 의미하는 ’암로쯔(Amrots)’라는 잡지를 발행하며 독자노선을 걷습니다.

이때부터 배신과 배신이 난무하는 스파이 영화속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해방연맹의 분파주의적 활동에 자극 받은 ARF는 암살 등을 통해 이들을 제거해 나갑니다. 네메시스 암살작전을 주도했던 인물들이 이제는 동족에게 쫓겨 죽임을 당하는 상황이 빚어진 것입니다. 특히 해방연맹 내에 소련 정보기관을 위해 일하는 인물이 있었음이 드러나면서 ARF를 反소련 공작의 매개로 삼았던 각국 정보기관까지 가세, 결국 네메시스 작전을 실제 주도한 샤한 나탈리 등 ARF 이탈조직은 역사의 뒷골목으로 밀려납니다. 이후 ARF 지도부는 탈라트 파샤 암살과 관련한 기록에서 샤한 나탈리의 이름과 역할을 삭제하기도 했습니다. '탈라트 파샤 처단'이라는 역사적 성과와 암살을 실행한 텔리리안은 민족의 영웅으로 남았지만, 어둠속에서 네메시스 작전을 이끈 주요 인물들의 존재는 지워진 것입니다

때로는 비정해 져야 할 현실세계에서, 對튀르키예 강경 투쟁을 주장한 세력이 탄압을 받았다고 안타까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시대적 환경에 따라 요구되는 역할과 의미가 달라져야 한다는 것도 이해됩니다. 소비에트 정권의 아르메니아 장악으로 또다시 주권을 상실한 상황에서 독립항쟁의 대상이 튀르키예에서 소련을 바뀌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것입니다.

네메시스 작전은 역할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ARF는 변화하는 환경에 맞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새로운 길을 가게 된 것이라고 평가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동족끼리 싸우고 죽이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 안타깝고, 억울한 희생이 있었더라도...


법정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풀려난 소고몬 텔리리안은 가족이 살았던 튀르키예 동부 에르진잔 출신 여성과 결혼해 유고슬라비아 정착했습니다. 그리고 2차대전이 끝난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해 10여년을 산 후 사망해 프레즈노에 있는 아라라트 공원묘지에 묻힙니다. '아르메이나인들의 영웅'인 그의 이름은 묘지는 물론 아르메니아 곳곳에서 기려집니다.

그의 이름을 영어식으로 바꾸면 ‘솔로몬 테일러’라고 합니다. 그가 처음부터 아르메니아인 ‘소고몬 텔리리안’이 아닌 미국인 ‘솔로몬 테일러’로 태어나 살았다면 그의 삶은 전혀 달랐을 것입니다. 억압받고 죽임 당하는 피정복민족의 삶, 타인을 생명을 빼앗는 삶이 아닌 일상의 작은 일에 기뻐하고 슬퍼하는 평범한 삶. 늦게 나마 그런 삶을 산 것이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그의 모국과 그의 동족들이 겪는 고난의 역사에는 숙연함을 느끼게 됩니다


오스만제국과 러시아, 소련 치하에서의 억압과 차별을 벗어나기 위해 아르메니아인들은 중동은 물론 미국을 비롯한 세계 곳곳으로 이주해 삶의 터전을 일궜습니다. 국권 상실후 만주, 시베리아, 중앙아시아를 떠돌게 된 우리의 민족사로 인해 동병상련의 감정을 갖게 하는 ‘아르메니안 디아스포라’의 역사.

유서깊은 역사를 지닌 이 민족은 굴하지 않고 오히려 디아스포라를 민족독립과 번영으로 나아가는 자산으로 삼았습니다. 유대인들 처럼 그들은 세계 곳곳에서 자신들의 문화를 유지하는 공동체를 발전시켰고, 모국에 아낌없는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영화 ‘뮌헨’에서의 유대인 네트워크 처럼 네메시스 작전 과정에서 조직원들은 아르메니안 네트워크의 도움에 기댔습니다. 그리고 샤한 나탈리나 소고몬 텔리리안, 아르샤비르 시라키안 등 네메시스 작전에 참여했던 많은 인물들이 미국에 정착해 생활할 수 있는 기반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으로 '떠도는 민족'의 삶이 편할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舊소련 붕괴후 독립을 일궈 낸 '아르메니아 국가'도 고단한 미래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튀르키예 등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족쇄는 계속해서 아르메니아를 옭아맬 것입니다. 석유자원을 앞세워 국부를 쌓아가는 아제르바이잔과 그 후원국인 튀르키예의 틈바구니에서 서구의 도움을 받기 어려운 고립된 위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전통적후원세력인 러시아의 약화로 인해 앞으로 더욱 더 운신의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물론 오랜 피종속의 역사에도 민족문화와 자주의식을 유지해온 저력과 세계 곳곳의 아르메니아 공동체들의 지원아래 힘이 들더라도 아르메니아인들은 고난을 헤쳐나갈 것입니다.


아르메니아에 간다면 아르메니아인들의 한과 의지가 담긴 민족의 성지 아라라트산(위치는 튀르키예 영토)이 바라보이는 수도 예레반의 '빅토리 파크'와 캐스케이드 컴플렉스 등을 찾게 될 것입니다. 아르메니아인들의 오랜 독립투쟁과 고난의 역사를 기리는 그 공간을 찾게 된다면, 웅장한 자태의 ‘어머니 아르메니아(Mother Armenia)상’이나 인류가 잊지 말아야 할 참혹한 만행과 비극이 아로 새겨진 ‘아르메니아대학살 희생자 추모비’를 보며 잠시나마 인류의 역사에 대해 사색하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그리고... 튀르키예 정부의 강한 반발을 초래했던 ‘네메시스작전 영웅 기념비(Memorial to the heroes of the Nemesis operation)’를 찾는 선택지도 있습니다. '영웅들을 기리는' 차원이 아니라 인류 역사에 또다시 벌어져서는 안 될 비극과 슬픔이 있었음을 상기하는 차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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