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라: 백군의 최후를 비극적으로 체현한 영웅적 패배자

마지막 순간까지 신념과 의무에 충실했던 역사의 패배자들 이야기

by 미네르바의 올빼미

‘폐가 모두 녹아 내리는 고통’을 숨기며 최후까지 병사들과 함께한 지휘관


1920년 1월의 시베리아 혹한 속, 강에 빠진 그는 심한 동상에 걸립니다. 불과 하루 뒤부터 동상 부위의 괴사가 시작됐고, 그는 마취도 하지 않은 채 급하게 왼발의 발가락들과 오른손 손가락 일부를 절단하게 됩니다.

티푸스 증상까지 보인 그의 몸은 말을 타고 행군하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아니 몸을 가누기 조차 어려운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수레에 눕기를 거부하고 말에 올라 꿋꿋하게 선두에 서서 행군을 이끌었습니다. ‘말을 타는 것’이 아니라 ‘안장에 묶여서’... 병사들 사기를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초인적으로 버텨냅니다. 그의 친구이자 핵심측근의 증언; ‘매일 아침 창백하고 야윈 장군은 (끔찍한 고통에도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이를 악 다문 채 팔에 안겨 안장 위에 올려졌다. 그는 말에 손을 얹고 거리로 나선후, 힘들게 몸을 일으켜 자신의 모자를 들고 이 힘든 투쟁에서 무기를 내려놓지 않은 병사들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는 밤에만 멈췄고, 조심스럽게 안장에서 내려져 막사로 옮겨졌다.’

건강악화로 버틸 수 없게 된 그는, 1월 21일 세르게이 보이치에홉스키 장군에게 지휘권을 넘깁니다. 그리고 결혼반지와 자신이 수여받은 ‘성 조지 훈장’을 건네며 자신의 아내에게 전해줄 것을 부탁합니다.

1월 25일 저녁부터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그는, 1월 26일 오전 이르쿠츠크 서북쪽 250여Km에 있는 ‘우타이(Utai)’역 인근에서 사망합니다. (그가 사망한 곳에는 현재 나무로 만든 큰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고 합니다)


의식을 잃기 전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나의 병사들에게, 내가 그들에게 충성을 다했고, 그들을 사랑했으며, 그들 가운데서 죽음으로써 그것을 증명했다고 전해주십시오’였다고 합니다. 그의 최후를 지켜본 측근은 훗날 회고록에서 ‘그는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채 무의식속에서 적의 공격을 걱정하며 군에 대한 얘기를 쏟아내다 잠시 침묵한 뒤 말했다. 이상!’ ‘그를 진단한 의사는 한쪽 폐는 사라졌고 남은 한쪽도 작은 부분만 남았다며 몇 시간 후 사망할 것이라고 했다’고 밝힙니다


러시아 내전기간 가장 뛰어난 백군 지휘관으로 평가 받는 인물이 사마라에서 등장하다.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장악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이 볼세비키정권의 무장해제 명령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킨 후, 1918년 6월 9일 볼가강 중류 사마라 시에 반볼세비키 세력이 연합한 '제헌의회 의원위원회(Committee of Members of the Constituent Assembly;Komuch)정부'가 수립됩니다. 정부수립과 동시에 350여명 규모의 ‘코무치 인민군(Komuch People’s Army)’이 창설됐을 때 누가 지휘를 맡을 것인가를 놓고 장교들 회의가 열립니다. 열악한 장비와 소수에 불과한 병력으로 실패할 수 밖에 없을 것으로 여겨 졌기에 선뜻 지휘를 맡으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제비뽑기로 선정하자’는 제안까지 나온 시점, 사마라에 막 도착한 중령계급장의 제국군 정복차림 장교가 조심스럽게 일어나 발언권을 요청한 후, “지원자가 없으니 적절한 상급자를 찾을 때까지 제가 임시로 볼셰비키에 맞서 부대를 이끌게 해 주십시오”라며 차분한 어투로 자원하고 나섭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가 러시아 내전에서 가장 뛰어난 백군지휘관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불과 1년 6개월여 짧은 기간 불꽃같은 삶을 살다가 죽어간 인물. 그리고 역사의 부침에 따라 세 번의 장례식과 함께 세 곳에 묻히게 되는 인물

블라디미르 오스카로비치 카펠(Vladimir Oskarovich Kappel; 1883.4.28 ∼ 1920.1.26)의 이야기 입니다


카펠은 권위주의적이고 병사들 위에 군림하는 대다수 제정 러시아군 장교출신들과 완전히 다른 장교였습니다. 늘 병사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렸고 전투가 벌어지면 기꺼이 위험을 무릅쓴 채 솔선수범하며 함께 싸웠습니다. 휘하의 장병들로 부터 진심 어린 존경을 받았고, 강한 전투력과 결속력을 갖춘 군을 육성해 냈습니다.

그가 헌신적이었던 만큼 ‘카펠렙치(kappelevtsy)’로 이름 붙여진, 그를 따르는 부하들도 온갖 시련을 함께하며 마지막까지 충성을 다했습니다. 늘 압도적으로 우세한 적에 맞서 분투했고, 적군의 대공세로 서부 시베리아 전선이 무너진후에는 그의 지휘아래 추격하는 적의 끊임없는 공격을 물리치며 바이칼호 서쪽 ‘치타’까지 퇴각하는 3,000Km의 시베리아 얼음행진(The Great Siberian Ice March)을 묵묵히 견뎌냈습니다.


특히 그가 사망한 후, 얼어붙은 바이칼호를 횡단하는 과정에서 영하 40도를 밑도는 혹한속 최대 1만여명이 凍死하는 와중에도, 그의 주검을 적군에게 넘겨주지 않기 위해 관을 수레에 싣고 행군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카펠, 소수의 ‘코무치 인민군(Komuchi People’s army)’병력으로 기적 같은 연승을 이끌다


가난한 스웨덴계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카펠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생도단과 니콜라이 기병학교를 마친 후 20세에 장교로 임관, 1913년에는 고등 장교교육 기관인 참모대학을 졸업합니다. 그는 모든 교육과정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쳤고, 특히 참모대학 재학 중 당시로는 획기적인 ‘자동차부대 운용방안’을 제시하는 등 군사기술분야의 혁신에 기여해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내전기간 그가 기술력과 심리전을 배합한 전술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많은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기반은 초임장교 시절부터 닦여진 것으로 평가됩니다.

작전과 군사기술에 밝은 우수한 장교였던 카펠은 군 경력의 대부분을 참모장교로 보냅니다. 1차대전 기간 군단 참모장교, 사단 참모장, 남서전선군 참모장교로 근무하면서, 특히 1차대전기간중 러시아군의 가장 성공적인 작전으로 평가되는 1916년 6월 ‘브루실로프 공세(Brusilov Offensive)’ 작전계획 수립에도 참여합니다.

1916년 8월 중령 진급 이후 작전참모부장 등으로 남서전선군 사령부에서 근무하던 카펠은 볼세비키 쿠데타가 발발하기 직전인 1917년 10월 2일 건강문제로 전선을 떠나 페름에서 가족들과 함께 생활하게 됩니다. 1918년초 볼세비키가 장악한 사마라의 ‘볼가 군관구’ 사령부에서 잠시 근무하기도 했으나, 곧 적군가담을 거부하고 은거합니다(러시아 내전기간 볼세비키 정권은 가족을 볼모 삼아 제정 러시아 장교출신들을 적극 활용했는데, 이 시기 이미 카펠의 아내와 1남 1녀는 볼세비키 비밀경찰인 체카에 억류된 상태였다고 합니다)


‘코무치 인민군’ 지휘관이 된 카펠은 오랜 작전분야 참모장교로서 경륜을 바탕으로 뛰어난 역량을 발휘합니다. 지휘관이 된 바로 다음날인 6월 11일 적군의 전력이 집중된 시즈란을, 7월 17일 ‘혁명의 지도자’ 레닌의 고향인 심비르스크를, 8월 7일 요새화 된 볼가 강변 중심도시 카잔을 잇따라 점령합니다. 압도적으로 우세했던 적군을 최소한의 손실로 연이어 격파한 그의 명성은 단기간내 볼가강을 넘어 러시아 전역에 알려지고, 볼세비키 정권의 지도부까지 그를 ‘작은 나폴레옹’, ‘작은 마켄젠(1차대전시 기동작전으로 세르비아와 루마니아를 굴복시키는 등 발칸지역의 승리를 이끈 인물)’으로 높이 평가하게 됩니다.

블라디미르 카펠이 전력열세에도 불구하고 연이은 성공을 이끈 것은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한 적에 대한 정면공격을 피하고 적의 측면과 후방으로 깊숙이 우회해 기습하는 성공적 기동작전을 펼친데 힘입은 것이었습니다. 1차대전기간 참모장교로 전장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역량을 키운 실전적 지식과 경험이 러시아내전을 통해 (다소 아이러니하지만…) 훌륭하게 적용된 것입니다. 군사학적으로 그의 성공적 기동전술은 전투현장에 대한 정확한 분석, 아군 병력과 적군병력에 대한 균형 잡힌 평가, 전장에서의 위험도를 꼼꼼히 따져 수립.시행됨으로써 파괴적 타격력을 발휘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적군 공세에 밀려 붕괴위기에 놓인 시베리아 지역 백군 총사령관직을 맡다


카펠의 성공으로 코무치 정부는 볼가강 중류지역을 장악하고 카잔에 보관된 6억 5천만 루블의 舊러시아 제국 자금까지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게 됩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습니다. 레닌의 고향에 이어 전략 요충지인 카잔까지 함락되자 볼세비키 정권은 큰 위기감을 갖게 됐고, 적군을 총지휘하던 트로츠키가 직접 증원군을 이끌고 볼가강 전선에 전력을 집중하면서 백군은 수세에 몰리게 됩니다.

결국 9월초 발틱해에서 운반해온 해군함정까지 동원한 적군의 대대적 공세에 밀린 백군은 볼가유역을 상실하고 우랄산맥까지 퇴각하게 돕니다. 카펠의 부대는 1918년 11월 8일 ‘전러시아 임시정부’ 수반겸 최고사령관으로 선출된 알렉산드르 콜차크(Aleksandr Vasilyevich Kolchak) 제독 휘하로 통합되고, 카펠은 소장으로 진급해 우랄산맥을 중심으로 하는 백군 방어선 유지에 중추적 역할을 해 나갑니다.

백군의 전력열세에도 불구 1년여간 이어진 교착국면은 1919년 11월 적군이 적극 공세를 재개하면서 깨집니다. 백군은 적군의 전력증강에 더해 제정 러시아 복원을 목표로 삼는 왕당파세력. 자유주의세력. 사회주의 세력 등이 혼재된 탓에 심각한 내부 갈등이 거듭된데다 백군 주요 축이었던 체코 군단의 이탈로 이중삼중의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이즈음 중장으로 진급했던 카펠은 12월초 옴스크와 노보시비르스크 전투에서 백군이 크게 패배, 전선이 붕괴되고 콜차크 정부가 후퇴하는 와중에 시베리아지역 백군 총사령관직을 떠맡게 됩니다.


‘고난의’ 시베리아 얼음행진(The Great Siberian Ice March)을 이끌다


빈약한 병력과 심각한 물자부족, 후방 곳곳에서 볼세비키 봉기로 붕괴 위기에 몰린 카펠은 바이칼호 동쪽까지 총퇴각, 전열을 재정비해 새롭게 방어선을 구축한다는 계획에 마지막 희망을 겁니다.

그는 12월 15일 ‘남아서 자신과 함께 하는 모든 사람은 혹독한 시련을 겪게 될 것’임을 강조 후 행군에 참여하기를 원치 않는 사람은 누구든 집으로 돌아가거나 적군에 항복하는 것을 허용 하겠다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나 많은 병력과 그들의 가족을 포함한 피난민들이 그를 따릅니다.

‘시베리아 얼음행군’이 있던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답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장악한 체코군단이 열차 제공을 거부함에 따라 카펠의 군은 도보로 영하 40도를 밑도는 혹한 속에서 타이가지대를 통과합니다. 눈보라속에서 거의 모든 중화기가 버려졌고 부상자와 병자는 남겨져 얼어 죽거나 추격하던 적군에 의해 학살됩니다

카펠군은 어렵게 중간기착지인 크라스노야르스크에 도착했으나 휴식과 보급을 기대했던 것과 달리 적군에 투항한 지역 백군사령관 배반으로 포위 섬멸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포위망을 돌파해 수습된 카펠군은 3만여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크라스노야르스크 동쪽 120여Km에 위치한 예니세이강의 지류 칸(Kan)강… 카펠의 군대는 이곳을 통해 행군하게 됩니다. 칸강은 겉으로 보면 두꺼운 눈으로 덮여 있었으나, 그 아래엔 따뜻한 온천수가 흘러 곳곳이 얼음이 녹은 채 살얼음만 덮개처럼 떠 있는 독특한 곳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특히 어둠 속 강을 따라 이동하는 사람들은 눈 아래에서 보이지 않는 구멍으로 끊임없이 빠지게 되어 있었습니다.

카펠 본인도 말고삐를 쥐고 행군하던 중 한 구멍에 빠지게 되고, 그리하여 이 글 첫 부분에 묘사한 그의 죽음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에필로그 : 마지막까지 의리를 다한 카펠렙치들, 그리고 조작되는 역사


카펠은 죽기 사흘전 마지막 지휘관 회의를 열고, 이르쿠츠크로 신속히 진군해 볼세비키에 구금돼 있는 임시정부 통치자 콜차크 제독(1월 15일 적으로 돌아선 체코군단에 의해 체포되어 볼세비키에 넘겨졌습니다)을 구출할 것을 결정합니다.

카펠의 부대는 그가 사망하기 이틀전인 1월 24일 이르쿠츠크에 대한 공격을 개시해 1월 30일에는 도시에 진입합니다. 그러나 전투 가능한 병력이 6,000여명에 불과해 진격에 애를 먹는 가운데, 2월 7일 백군에 의해 구출될 것을 우려한 레닌의 직접 지시로 콜차크 제독이 총살됐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카펠의 후임으로 지휘를 맡은 세르게이 보이치에홉스키(Sergey Nikolayevich Voytsekhovsky; 1883.10.16 ∼ 1951.4.7)장군은 이르쿠츠크에 대한 공격을 접고 얼어붙은 바이칼호 횡단을 명령합니다.

호수를 건너 미소바야(Mysovaya)에 도착한 일행은 여성과 어린이, 부상당하거나 병든 남성들을 기차로 보낸후 또다시 약 600km를 걸어 1920년 3월 초 치타에 도착, 시베리아 얼음행군을 끝냅니다.

뒤늦게 합류한 낙오병까지 치타에 도착한 인원은 총 25,000여명이었답니다.


이들 생존자들은 이후 적군 공세가 가열됨에 따라 또다시 일본군의 중재아래 중국으로 이동 후 만주의 동청철도를 이용해 연해주로 향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대부분 병력은 ‘극동 백군’으로 편제되어 전투에 투입됐고, 대부분 전장에서 사라져 갔습니다.

소수는 러시아를 떠나 타국에 정착하기도 했습니다. 많은 경우 힘든 삶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지휘한 인연으로 체코로 이주해 군 최고지휘부(대장)까지 역임했으나, 2차대전후 진주한 소련군에 의해 체포돼 이르크츠크 인근 타이세트 강제노동수용소에 수용됐다가 1951년 4월 병사한 보이치에홉스키 장군 사례와 같이 국외 이주한 많은 사람들도 결국 볼세비키 세력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보이치에홉스키는 카펠이 사망한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사망했습니다. 굴라그에서 사망한 그의 시신이 어디에 묻혔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앞서 얘기했듯 카펠의 부대는 거의 한 달 동안 장군의 관을 운반해 치타에 도착한 후 장례식을 치룹니다. 1920년 가을 적군이 치타에 접근하자 또다시 시신을 하얼빈으로 운구(치타에서 영구동토층에 묻혀 시신이 부패하지 않았다 합니다)해 ‘성 이베론’ 교회에 매장했고, 1929년에는 모금으로 그를 기리는 대리석 십자가를 세웁니다. 1945년 8월 하얼빈에 진주한 소련군이 그의 묘비를 폭파하고 카펠의 무덤을 훼손했으나, 소련군이 떠난후 묘는 다시 복원되는데; 1955년 소련 영사관 요청으로 중국정부는 또다시 묘비를 제거합니다.

그러나 카펠의 유해 자체는 훼손되지 않았고, 소비에트 공산정권이 무너진 25년이 흐른 후 2006년 12월 러시아 정교회와 언론계 중심의 조사단이 카펠의 유해를 확인해 모스크바로 운구, 2007년 1월 13일 성대한 행사와 함께역사적인 ‘돈스코이 수도원’ 묘역에 안장합니다.

카펠은 ‘돈스코이 수도원’ 묘역에서 남러시아군 사령관을 역임했던 안톤 데니킨(Anton Ivanovich Denikin), 법학자이며 언론인이자 反볼세비키 이데올로그인 이반 일린(Ivan Alexandrovich Ilyin) 등 내전당시 白軍의 주요인물은 물론 적으로 맞붙었었고 스탈린의 숙청과정에서 희생된 미하일 투하체프스키원수 등 赤軍 주요인물들과 함께 묻혀 있습니다.


많이 궁금합니다. 그리고 상상을 하게 됩니다. 적으로 맞섰던 이들이 저승에서 만났다면 무슨 얘기를 할까?


카펠과 데니킨, 투하체프스키 등 화해할 수 없는 인물들이 한 곳에 묻히게 된 것은 ‘자랑스러운 러시아 역사’를 다시 쓰려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계획에서 비롯됩니다.

리처드 코언의 저서 ‘역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따르면 푸틴은 (‘공산주의라는 짐’을 제외하고) 미국과 양극체제를 구축했었던 초강대국 소련의 신화에 1917년 이전의 영광스런 러시아 제국에 대한 이야기를 결합해 자신들만의 (러시아인의 위대함을 부각하는) 고유한 역사를 만들어내려 한다고 합니다. 그 역사에는 볼세비키 혁명이 없어야 하기에 1917년 10월과 赤白내전 자체는 축소하거나 지워버리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100여년전(1917년) 간첩과 반역자들이 우리를 자극해 서로 죽이도록 유도했다. 다시는 그런 참사가 일어나서는 안되기에 어떠한 형태의 반대나 이견도 금지해야 하고, 시민의 권리까지 기꺼이 포기해야 한다’는 논리와 더불어...


에필로그 : 카펠의 가족들. 그리고 사마라…


카펠이 보이치에홉스키에게 남긴 결혼반지와 훈장은 끝내 그의 아내에게 전해지지 못했습니다.블라디미르 카펠과 올가(Olga)부부는 1909년 1월 결혼했습니다. 둘이 결혼하려 했을 때 올가의 아버지가 미래가 불투명한 가난한 젊은 장교와 결혼을 강하게 반대함에 따라 둘은 사랑의 도피후 시골교회에서 둘만의 결혼식을 올렸고, 카펠의 장인은 카펠이 고급장교를 양성하는 참모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에야 사위로 받아들입니다.

부부의 행복한 삶은 볼세비키 쿠데타로 불과 9년만에 끝납니다. 앞서 얘기했듯 카펠의 처자는 내전 초부터 체카의 손아귀에 안에 있었습니다. 카펠의 아내는 어린 자녀(1녀 1남)를 위해 남편과 서류상 이혼을 해 카펠이라는 성을 버리고 결혼 전 성인 스트롤먼(Stralman)을 씁니다.

그녀는 스탈린 대숙청기인 1937년 NKVD에 체포돼 1940년 3월 5년형을 선고받고 굴라그에서 강제노동을 한후 44년에야 석방되기도 했습니다(1960년 4월 사망) 1937년 어머니와 함께 체포됐던 아들 키릴 스트롤먼은 2년만에 풀려나 제 2차대전에 참전해 전공을 세웠고, 이후 모범적인 소련 국민으로 살았습니다.


러시아 볼가 강변 도시 사마라는 1586년 요새로 처음 건설되었습니다. 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모스크바 인근까지 진격하자 정부기관들이 대거 이주하기도 했던 이 도시는, 그 전략적 중요성으로 인해 볼세비키 쿠데타 후 벌어진 적백 내전시에도 치열한 전투에 휘말립니다. 그러한 역사는 강변을 따라 이어지는 2차대전 때 벙커나 전설적 赤軍 지휘관 바실리 차파에프(Vasily Chapaev) 기념비 등의 모습으로 도시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사실 러시아 내전을 놓고 보자면 사마라에서는 기려지는 바실리 차파에프의 자리에는 이곳에서 처음 역사무대에 등장한 블라디미르 카펠이 놓이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비록 돈스코이 묘역에 안장됐지만 여전히 많은 러시아인들에게 백군이 부정적으로 각인돼 있기에 어렵다면, 볼가강 유역에서 벌어진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중심역할을 했던 적군 지휘관 표도르 라스콜리니코프(Fyodor Raskolinikov) 등이 차지해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차파에프는 스탈린과 소비에트 정권에 의해 ‘영웅으로 만들어진’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사속에 늘 있어 왔던 사례처럼, 차파에프는 승자들의 필요에 따라 ‘혁명에 헌신하다 죽음을 당한 영웅’ 으로 부각되고, 내전에서 패배한 백군 지휘관이나, 내전에서 큰 공을 세웠으나 소비에트 정권내부 권력투쟁에서 밀려나 지워진 인물은 ‘역사의 쓰레기통’에 버려졌습니다

(본명이 표도르 일린-Fyodor Ilyin-인 표도르 라스콜리니코프는 10대후반 볼세비키에 가담하며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 주인공 이름을 따 개명한 인물로, 1917년 2월혁명과 볼세비키 쿠데타과정에서 크론슈타트 해군봉기를 주도했으며, 내전과정에서도 발트해와 볼가강. 카스피해에서 적군 승리에 크게 기여했으나, 대숙청시기 프랑스로 망명해 '반스탈린 활동'을 벌여 소련붕괴 때까지 '인민의 적'이었습니다)


죽음이 임박한 시기. 카펠은 시베리아 농민들에게 反볼세비키 투쟁에 동참을 호소하는 글을 썼습니다


우리 뒤에는 소비에트군이 있습니다. 그들은 공산주의, 빈곤, 예수 그리스도신앙에 대한 박해를 가지고 옵니다. 소비에트 권력이 확립된 곳에서는 농민의 노동을 보상하는 재산이 없을 것이며, 모든 마을에서 소수 게으른 사람들이 위원회를 구성하고, 모든 사람으로부터 자신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박탈할 권리를 갖게 될 것입니다.

볼셰비키는 신을 거부하고 있고, 신의 사랑을 증오로 대체함으로써 서로를 무자비하게 말살하도록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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