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인트루이스 : '미국의 정신'을 상징 하는 사람들

미지의 영역으로 나아가 프론티어의 전설로 남다

by 미네르바의 올빼미

‘세이트 루이스의 정신’, 그리고 ‘게이트웨이 아치’


‘세인트루이스의 정신(Spirit of Saint Louis)’… 찰스 린드버그가 조종하여 1927년 대서양 무착륙 단독비행에 성공했을 때 탔던 비행기 이름입니다. 린드버그의 비행기 옆에 선명히 쓰인 ‘세인트루이스의 정신’이라는 글자는 그의 도전을 전폭적으로 후원한 세인트루이스 기업인들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세인트루이스의 ‘다른 무엇’ 이 아니라 ‘Spirit’이었을까요?


2010년 7월 노스캐롤라이나주 채플힐에서 ‘30일의 일정’으로 대륙횡단 자동차 여행을 할 때 첫 목적지가 세인트루이스였습니다. 그 세인트루이스의 랜드마크이자 대표적 관광명소인 게이트웨이 아치(Gateway Arch)는 생각했던 규모를 훨씬 넘는 거대한 구조물이었습니다. 192m의 높이도 높이지만 지하에서 연결된 작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치 꼭대기에 올라가 창밖의 시내전경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참신한 경험이었습니다. 스테인레스강(을 접합한) 클래드 소재로 만들어진 거대한 게이트웨이 아치는 1963년 12월 착공하여 1965년 10월 완공됐습니다.

그런데 ‘아치 이름이 왜 게이트웨이 일까?’ 궁금했습니다. ‘Gateway’란 ‘관문’이라는 뜻인데… 그렇다면 세인트루이스에 ‘관문’으로 기념할 무엇인가 있다는 의미일 것이었기에…

예. 세인트루이스는 ‘관문’도시로 발달했습니다. 서부로의 관문. 그것이 19세기 세인트루이스시가 발전한 원동력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게이트웨이 아치’라는 구조물을 세운 이유는 찰스 린드버그가 탄 비행기에 ‘Spirit of St. Louis’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와 연결됩니다.


토머스 제퍼슨의 루이지애나 영토 매입


게이트웨이 아치는 미 3대 대통령의 이름을 딴 미시시피강변 '제퍼슨 국립확장기념공원(Jefferson National Expansion Memorial)에 위치해 있습니다.

미시시피강과 미주리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한 세인트 루이스는 18세기 북미지역에 진출했던 프랑스인들이 모피교역 중심지로 세운 곳입니다. 이후 이곳은 뉴올리언스에서 캐나다 퀘벡까지 이어지는 북미지역 프랑스제국(루이지애나)의 주요거점으로 성장하게 되고, 1803.4.30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이 나폴레옹 1세로 부터 이곳을 포함하여 現미국 영토의 1/4를 넘는 광대한 ‘프랑스령 루이지애나’를 매입함으로써 미국령이 됩니다.

이 영토매매는 유럽 강대국이 본격적으로 북미대륙에 개입하기 전 미국 영토를 확장하고 입지를 확고히 다지려는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의 의지와 연이은 전쟁에 따른 재정적 어려움을 완화하려는 나폴레옹 1세의 계산이 작용한 타협이었습니다. 이 거래로 미국은 영토를 두배 이상 늘리게 됩니다. 어이없는 사실은 미국이 루이지애나를 매입했다고 하나, 사실 이 지역의 대부분은 프랑스가 거의 일방적으로 자신들의 영토로 선포한 것일 뿐 실질적 주권 행사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는 점입니다. 프랑스인을 중심으로 한 소수의 모피사냥꾼 이외 백인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었고, 미국은 열강의 관심권에서 벗어나 프랑스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지역을 넘겨받아 ‘미국령’으로 주장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미지의 땅을 횡단한 ‘루이스 & 클락 원정대‘


여하튼 루이지애나(Louisiana Territory)를 매입한 제퍼슨 대통령은 새로 미국영토로 편입된 광활한 미지영역에 대한 정보와 미국의 통치권 확보가 필요했고, 이를 위해 자신의 개인비서였던 메리웨더 루이스(Meriwether Lewis)대위가 지휘하는 탐험대를 파견하게 됩니다. 루이스 대위는 친분이 있던 윌리엄 클락(William Clark)대위를 영입해 둘이 동등하게 지휘권을 행사하는 ‘루이스 & 클락 원정대(Lewis and Clark Expedition; Corps of Discovery Expedition)’룰 이끌게 됩니다.

1803년 즈음 북아메리카의 지정학적 상황

원정대는 새롭게 획득한 광대한 영토의 지형과 지질, 동식물 등을 탐험해 정확한 지도를 작성하는 한편 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원주민들의 실태를 파악해 미정부의 통치권을 다지는 임무를 부여 받게 됩니다.

특히 제퍼슨 대통령이 가장 중요시했던 것은 태평양으로 연결되는 수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제퍼슨 대통령은 대륙을 횡단하여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상업 교역망을 할 수 있다면 미국의 번영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했던 것입니다. 물론 서부로의 진출을 위한 확실한 경로(루이스와 클락 원정대가 탐험한 구간 가운데는 훗날 서부로의 주된 이주통로가 되는 이른바 ‘오리건 트레일’도 있습니다)를 찾는 임무도 맡겨졌습니다


총 33명으로 구성된 원정대는 1804년 5월 14일 출발, 작은 보트와 통나무배를 이용, 미시시피강과 미주리강을 따라 북서쪽으로 이동, 현재 미주리주->캔자스주->네브라스카주-> 사우스다코타주->노스다코타주->와이오밍주와 몬태나주를 탐험한 후 스네이크강과 콜럼비아강을 거쳐 1805년 11월말 태평양에 도착하게 됩니다. 이들은 컬럼비아강 하구 남쪽에 ‘포트 클랫숍(Fort Clatsop: 요새가 있었다고 추정되는 곳에 현재 목책과 목조건물을 세워고 ’루이스와 클락 원정대 국립역사공원’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을 세우고 겨울을 난 후 1806년 3월 23일 귀환길에 올라 6개월후인 9월 23일 세인트 루이스로 귀환합니다.

DSC00903.JPG '[루이스와 클락 원정대 국립역사공원'내 포트 클랫숍

원정대는 2년이 넘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땅을 탐험하는 과정에서 굶주림과 인디언 부족과의 충돌 등 많은 어려움을 겪었음에도, 원정대원 중 한명이 급성맹장염으로 사망한 외 전원 무사히 귀환했으며, 140여개 이상 상세한 지도를 남겼고, 20여개가 넘는 인디언 부족들과 무역 및 미국의 주권을 기정사실화하는 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들의 성공적인 탐험의 실질적인 성과는 루이지애나 영토에 대한 미국의 지배권을 기정사실화 함은 물론 오리건 영토(Oregon Territory)에 대한 영유권 주장에 힘을 싣고, 서부로의 탐험과 개척을 북돋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루이스와 클락 원정대’와 관련한 막간 에피소드 한가지… 앞서 루이지애나는 결코 프랑스의 실질적 주권이 미친 지역은 아니었다고 언급한 바 있었습니다. 이 지역을 스페인 영토로 주장하던 뉴멕시코 산타페 주재 총독은 ‘스페인 영토 침범’을 막기 위해 네브라스카 지역으로 병력을 파견했으나, 며칠 차이로 놓쳐 소득 없이 철수하게 됩니다. 만일 이때 루이스&클락 원정대가 따라 잡혔다면, 미국의 서부로의 확장 역사도 많이 바뀌었을 것입니다


‘아메리킨 프론티어 정신’의 상징이된 메리웨더 루이스와 윌리엄 클락


‘루이스와 클락 원정대’의 탐험은 광활한 전인미답의 영역을 답사한, 미국사에 있어서 기념비적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의 도전은 미국을 상징하는 ‘개척정신’의 선구적 의미를 갖게 되었고, 이것이 여정의 출발지인 세인트루이스에 ‘서부로의 관문’이라는 상징성을 부여하여 ‘게이트웨이 아치’를 세우도록 한 것이기도 합니다. 미지의 세계로 두려움 없이 나아간 그 정신을 ‘Spirit of St. Louis’ 으로 표현, 린드버그의 비행기 이름으로 붙여진 것이기도 하고... (세인트루이스는 1904년 국제박람회를 계기로 ‘루이스와 클락 원정대’의 성취를 ‘세인트 루이스의 정신-Spirit of St. Louis-’으로 표현, 도시의 존재감을 홍보하는 고리로 적극 활용합니다. 미국의 장대한 서부개척의 역사를 잉태한 첫 출발이자 미국의 번영을 가져온 ‘개척정신’의 산실이 세인트루이스라는 것입니다. 대서양 단독 무착륙 횡단비행을 한 린드버그의 도전도 그 ‘세인트루이스의 정신’의 연장이라는 의미를 담은 것이기도 합니다)


인디언 여성 ‘사카가위아’와 인디언 부족들


루이스&클락 원정대와 관련해 결코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존재가 있습니다. 쇼숀 또는 쇼쇼니 (Shoshonea)족 여성 사카가위아(Sacagawea) 입니다. 그녀는 원정대가 1804년말∼1805년초 겨울을 나기 위해 ‘포트 만단’ (Fort Mandan: 현재 노스다코타주 소재)에 머물던 기간 통역으로 선발된 남편 프랑스계 모피사냥꾼 ‘투상 사르보누(Charbonneau)’와 함께 합류해 원정대와 줄곧 동행했습니다. 원정대 합류당시 이미 임신상태였던 사카가위아는 1805년 2월 11일 아들 ‘장 밥티스트 사르보누’를 출산하기도 했습니다. 그녀가 원주민들과 소통은 물론 ‘쇼쇼니 부족 추장의 딸’이라는 위상을 앞세워 인디언 원주민과 충돌을 막는 등 큰 기여를 했다는 얘기가 역사적 사실 처럼 부각되고 있으나, ‘포카혼타스’ 이야기의 사례와 같이 ‘백인과 인디언이 협력했다 이미지’를 위해 미화되고 과장된 측면이 강합니다.(그녀가 이동경로상 지형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고 원주민 부족들과 소통에 도움을 주었으며, 어린 아들과 함께 하는 모습이 인디언 부족들에게 우호적 감정을 갖게 한 효과는 있었다고 합니다)


사실 '루이스와 클락 원정대'는 탐험기간 내내 많은 인디언 원주민 부족을 대면했으나 티턴-수(Teton- Sioux) 부족 외에는 대부분 우호적이었습니다. 19세기후반 이 지역에서 미국정부의 잔혹한 인디언 학살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씁쓸함을 느끼게 하는 부분입니다. ‘루이스와 클락 원정대’를 만나기 이전 원주민들과 백인의 접촉은 주로 프랑스계 모피 사냥꾼들과 사이에서 이루어진 것인데, 캐나다 퀘벡에 자리잡고 있던 ‘뉴프랑스’ 당국이 인디언의 문화를 존중하고 결혼과 융화를 권장하는 정책을 취해 많은 인디언 부족들과 우호적 관계를 형성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현재 미국인들은 美 개척사의 희생자인 인디언들을 네이티브 아메리칸(Native Americans)으로 부르며 그들의 역사도 자신들의 역사로 끌어안고 있습니다. 불과 200여년전부터 한세기 넘는 기간 학살당하고 추방당하고 차별받은 인디언의 역사를... 과거 역사를 반성한다는 의미도 있겠 으나, 대부분 과거사에 무감각하다는 느낌을 들게 합니다. 미국의 인종별, 지역별 소득수준통계를 보면 (루이스와 클락 원정대가 지나갔던) 사우스다코타 서부에 거주하는 네이티브 아메리칸들이 가장 가난하다고 합니다.


루이스와 클락, 사카가위아의 아들, 그리고 찰스 린드버그 이야기


메리웨더 루이스(1774.8.18∼1809.10.11)는 버지니아주 출신으로 버지니아 민병대를 거쳐 정규군 장교가 됐으며, 1801년 가족과 친분이 있던 제퍼슨 대통령 개인비서로 임명됩니다. 그가 탐험대를 이끌게 된 것은 개척지 등에서 근무한 군경력과 과학분야 전문지식을 고려한 것이었습니다. 루이지애나 탐험에서 돌아온 루이스는 1807년 ‘상부 루이지애나 지사(Governor of Upper Louisiana)’로 임명돼 재임하던 중 테네시주 한 여관에서 사망합니다. 그의 사인은 명확히 밝혀 지지 않았는데; 그가 건강과 금전적 어려움으로 우울증 증세를 보여왔기에 자살로 판정되었지만 살해됐을 것으로 보는 역사가들도 있습니다.


탐험기간 정밀한 지도작성과 기록물로 서부개척에 큰 기여를 하게 되는 윌리엄 클락(William Clark; 1770.8.1 ∼1838.9.1) 역시 독립전쟁의 영웅 조지 클락(George Rogers Clark) 준장을 비롯한 형 5명이 독립전쟁에서 활약한 버지니아주 명문 대지주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그도 역시 버지니아 민병대에서 군 경력을 시작, 정규군의 장교가 돼 '북서인디언전쟁' 등에 참전했습니다. 탐험에서 돌아온 뒤 윌리엄 클락은 루이지애나 영토(Louisiana Territory) 민병대 준장 겸 인디언업무 감독관직을 수행한 후 1813년∼1820년간 미주리(Missouri Territory) 지사로 활동합니다. 그는 특히 인디언업무 감독관으로 온정주의와 강압정책을 혼합, 미 정부와 많은 원주민 부족간 원만한 관계유지에 큰 역할을 했으며, '루이스와 클락 원정대' 여정의 시작과 끝이었던 세인트루이스에서 사망해 벨레폰테인 묘지(Bellefontaine Cemetery)에 묻혔습니다.

루이스가 인디언부족출신 사카가위아와 거리를 뒀던 반면 클락은 계속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특히 그녀의 아들 장 밥티스트 사르보누를 돌봐줍니다.

원정기간 내내 어머니와 함께 하며 인디언부족들에게 ‘평화로운 의도를 가진 원정대’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던 장 밥티스트 사르보누(1805.2.11∼1866.5.16)는 윌리엄 클락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18세 무렵에는 가이드 역할을 하며 인연을 맺은 독일 뷔템베르크 공작의 후원아래 유럽을 여행하면서 유럽의 귀족들과 친분을 맺고 유럽의 다양한 언어와 과학 등을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6년간 유럽에 머문 후 24세에 귀국한 장은 통역, 등반가, 모피사냥꾼 등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다가 캘리포니아로 이주해 호텔을 경영했으며, 남북전쟁기간에는 북군의 가이드겸 통역으로 복무하기도 했습니다.


찰스 린드버그(Charles Augustus Lindbergh, 1902.2.4~1974.8.26)는 논쟁적인 인물입니다.

1902년 디트로이트에서 스웨덴 이민자출신으로 미 하원의원을 역임하는 찰스 린드버그 시니어의 아들로 태어난 린드버그는 위스콘신-메디슨대를 중퇴한 후 비행학교를 거쳐 미 육군항공대의 사관후보생 과정을 마치고 1925년 소위로 임관합니다. 이후 우편항공기 조종사로 근무하다가 25세의 나이에 대륙횡단 비행 성공, 미 군인에게 수여되는 최고 훈장인 '명예훈장(Medal of Honor)'과 '프랑스 레종 되뇌르 훈장(Legion of Honor)'을 비롯한 많은 포상을 받게 되고 세계적 스타가 됩니다. 그 해 7월에는 미 육군 항공대 예비군 대령으로 승진하고, Time지의 첫 ‘올해의 인물(Man of the Year)’로 선정의 명예도 얻게 됩니다. 그가 과도한 대우를 받았다는 측면은 부인할 수 없으나, 그의 대서양 횡단비행 성공에 대한 전세계적인 관심이 상업적 항공산업과 항공우편 운송 등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고. 이른바 ‘린드버그 붐(Lindbergh boom)’으로 불리는 항공산업의 변화를 촉진하게 되는 등 많은 기여를 한 것은 분명합니다

1932년 3월에는 승승장구하던 그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비극적 사건이 발생합니다. 태어난지 20개월이던 장남 찰스가 납치살해 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사건은 ‘세기의 사건’으로 불리며 미국 국내는 물론 세계적 관심사가 되고, 미 의회는 유괴를 연방범죄로 수사 하고 강력한 처벌을 하도록 하는 이른바 ‘린드버그법’을 통과시키는 계기가 됩니다. 1934년 독일계 이민자 리처드 하우프트만이 범인으로 체포돼 사형에 처해지지만 억울하게 희생됐다는 평가도 만만치않아 여전히 논란이 이어지고 있으며 린드버그 가족은 언론의 선정적 보도와 각종 유언비어에 시달리다가 1936년부터 3년여간 유럽으로 도피성 이주를 하기도 했습니다


린드버그와 관련해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그가 반유대주의자. 인종차별주의자이며 나치에 우호적이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논란이 심화된 것은 독일의 잇단 침략행위에도 불구 독일에 대항하는 국가에 대한 무기지원과 미국의 참전을 반대하는 캠페인에 적극 참여했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미국의 참전기류가 강화되자 ‘(미국의 지원없이 전쟁승리가 불가능한) 영국과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려는) 루즈벨트, (정치권과 언론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유대계 미국인들이 미국을 전쟁으로 몰고 가고 있다’고 강력 비판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습니다.

반면 그는 미국을 방위하는 것이 미군의 유일한 목표임을 강조하며, 국방역량 및 하와이 제도에 대한 방어태세 강화를 촉구했고, 특히 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계기로 미국이 참전하게 되자 공군 복귀를 희망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반전활동으로 인해 공군 복귀가 거부된 후에는 포드사 및 유나이티드 항공사 기술 고문직을 맡아 군 항공기 개발과 기능 보완에 기여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공중전투 상황에서 항공기 성능 연구’를 명분으로 태평양에서 50여차례 전투임무를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전후 린드버그는 미 공군참모총장 자문역 등으로 활동하는 한편 反소련 및 반공산주의 운동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1954년에는 자신의 대서양 무착륙 단독비행에 초점을 맞춘 자서전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했고 노년에 접어들어선 미국은 물론 필리핀을 비롯한 세계 각지의 자연보존 활동에 적극 참여했습니다. 그는 하와이주의 마우이섬에서 은퇴생활을 보내다 그곳에서 사망합니다.

린드버그는 젊은 나이에 큰 성공을 거뒀고, 그것을 바탕으로 정치,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장남의 비극적 죽음을 제외한다면 그는 자신이 하고자 했던 일과 말을 마음껏 하고 살았던 행운아였다고 여겨집니다. 루이스와 클락도 루이스의 의문스런 죽음을 제외하고 성공적인 삶을 영위했다 싶고...

(그들의 도전과 모험이 쉽지 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큰 역경도 위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노력에 나름 보상을 받은 존재들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미국 곳곳에 자신들의 이름과 성취를 기념하는 공간과 기념물, 역사기록을 남김은 물론 '신화적 존재'가 되었다는 점에서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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