뮌헨 : 어느 아버지와 아들의 엇갈린 삶과 죽음

악에게 힘을 실어준 아버지, 양심에 따라 악과 맞선 그의 아들의 이야기

by 미네르바의 올빼미

그의 이름은 지정학(Geopolitics)이라는 학문의 역사에 있어 빠지지 않고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이름은 또한 지정학의 어두운 면, 인류의 역사에 미친 사악한 영향력을 대표합니다. 칼 에른스트 하우스호퍼(Karl Ernst Haushofer; 1869.8.27∼1946.3.10).

그의 이론이 미친 영향의 정도에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하지만, 거의 모두 동의하는 한가지 사실은 히틀러와 나치가 인종청소나 침략전쟁을 통해 이루려 했던 목표에 지적 정당성을 부여했다는 것입니다. 히틀러와 나치 독일의 팽창주의와 범게르만주의를 정당화하는 이념적 토대인 레벤스라움(Lebensraum: 독일민족의 생활권, 생존권) 개념을 적극 발전시킨 학자가 칼 하우스호퍼이기 때문입니다.


1차대전 패전후 독일의 미래를 위한 지정학적 비전을 연구한 칼 하우스호퍼


칼 하우스호퍼는 ‘레벤스라움’의 전도사라는 악마적인 이미지와 전혀 다른 환경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친은 뮌헨공대 교수를 역임한 명망 있는 경제학자이자 정치가였고, 조부는 저명한 화가로 프라하 예술아카데미 교수를 역임했습니다. 결국 그를 학자의 삶으로 이끌게 되는 ‘학문과 예술에 대한 사랑’은 성장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고등학교 졸업 후 하우스호퍼가 선택한 길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는 자신이 태어나고 성장한 바이에른 왕국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군인의 길을 걷게 됩니다. 우수한 참모장교 양성을 위한 군사대학(War academy)을 졸업하고 교관으로 활약하기도 했고, 1차대전에 참전해 서부전선에서 여단장 등으로 복무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1차대전이 끝난 후 1919년 소장계급으로 예편하게 됩니다.


‘학자풍 군인’으로 머물렀을 수 있었던 하우스호퍼가 군인으로서 보다 지정학자로 활약하게 된 주요한 전환점은 1908년부터 2년여간 일본주재 무관(Military attaché)으로 근무하며 접했던 경험과 귀국 직후 발병한 폐질환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일본체류기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과 일본의 지정학적 환경을 연구했습니다. 지정학자로서 ‘하우스호퍼’하면 자동적으로 ‘레벤스라움’을 연상시키지만 사실 지정학자로서 그의 가장 주목할만한 연구성과는 동아시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바다로부터 후퇴해 대운하와 강을 중심으로 성장한 중국’, ‘미국에 의해 태평양 진출을 봉쇄 당한 일본이 한반도와 만주로의 팽창을 돌파구로 삼았다’는 등 하우스호퍼의 분석은 오늘날까지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습니다. 1909년 가을 한 달여 한반도와 만주를 둘러보기도 했던 하우스호퍼는 1910년 여름 러시아를 횡단해 귀국하게 됩니다. 2년여 동아시아 체류와 유라시아 횡단은 지정학자로서 그의 시각을 넓히는데 큰 자산이 되었다고 평가됩니다.


하우스호퍼는 일본에서 돌아온 직후 폐질환으로 인해 1913년까지 3년여간 군무를 벗어나 장기치료와 요양을 하게 됩니다. 이 기간을 활용해 하우스호퍼는 뮌헨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밟게 되는데, 연구주제가 ‘일본제국의 군사력과 국제적 지위, 그리고 그 미래’ 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점차 독일 최고의 동아시아 전문가로 자리매김해 나갔고, 2차대전 종전까지 그 자신 공동편집인으로 활동하게 되는 월간 ‘지정학 저널’을 창간하기도 했습니다.

폐질환 완치후 군무에 복귀해 1차대전에도 참전했던 하우스호퍼는 1919년 예편후 ‘정치 지리학’교수로서 경력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같은 해 1차대전 참전군인 루돌프 헤스(Rudolf Hess, 1894 ∼ 1987; 1914년 자원 입대해 1918년말까지 복무)가 25세의 늦은 나이에 뮌헨대에 입학, 하우스호퍼의 강의를 듣게 되면서 두 사람의 인연이 맺어집니다. 그 인연은 우리 모두 알고 있다시피 수많은 죽음을 초래하고 종국에는 스스로 파멸하는 괴물을 낳게 됩니다. 헤스는 대학과정을 마치지 못했습니다. 나치의 태동기부터 참여했던 헤스는 1923년 뮌헨에서 발생한 그 유명한 맥주홀 폭동((Beer Hall Putsch) 실패후 히틀러와 함께 란츠베르그 교도소에 수감됩니다.


제자 '헤스'를 매개로 히틀러의 '나치 이데올로기' 정립에 큰 영향을 끼친 칼 하우스호퍼


하우스호퍼는 정기적으로 란츠베르그를 방문해 제자는 물론 제자를 통해 알게 된 히틀러에게 지정학과 ‘레벤스라움’에 대한 개인 교습을 했다고 합니다. 히틀러가 하우스호퍼의 강의내용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였다’고 평가한 역사학자나 ‘히틀러와 하우스호퍼를 연결한 것이 헤스가 국가사회주의를 창조하고 형태를 갖추게 하는데 있어서 개인적으로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이라고 주장한 히틀러 전기작가인 요하임 페스트(Joachim Fest) 등, 이 만남은 히틀러와 나치 이념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하우스호퍼는 2차대전후 심문과정에서 히틀러는 자신의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고 나치는 자신들이 하고 싶은 주장에 필요한 내용을 편의적으로 취사선택해 왜곡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나치에 입당하거나 긴밀한 관계를 맺지도 않았으며 감시와 탄압을 당했음을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항변은 어느 정도 사실에 부합하기도 합니다. 하우스호퍼가 본격적으로 학문의 길로 들어선 주 목적은 패망한 독일의 강대국으로서의 지위 회복과 부흥이었습니다. 그는 독일이 지리적 지식과 지정학에 대한 인식부족으로 매우 불리한 동맹국과 적대국간 세력구도를 초래한 것이 독일의 패배를 불러온 주된 요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인식아래 그는 지리학, 역사학, 경제학, 인구통계학, 정치학, 인류학 분야를 결합한 지정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제기했던 것입니다.

그 자신도 명확히 설명하지 못했으나 핵심요지는 국가를 ‘오랜 시간 동안 독특한 지리와 역사속에 형성된 특정한 유기체’로 보는 것이었고, 이런 맥락에서 건강하고 성장하는 국가가 인구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영역을 설명하는 개념으로 ‘레벤스라움’을 제시한 것입니다. 그의 지정학 이론은 언제나 인종보다는 공간에 중점을 뒀으며, 인종결정론 보다 환경을 강조했고, 반유대주의를 선동하거나 국가적 반유대주의 정책과 연결되는 것을 거부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가 영.미 중심 해양세력의 지배적 영향력을 상쇄하기 위해 러시아와 협력을 주장해 나치의 의심을 받았던 것도...

그러나 그가 란츠베르그 교도소에 수감중 히틀러가 루돌프 헤스의 도움아래 ‘나의 투쟁’을 정리해 나가는 시기, 그와 나치가 필요로 한 개념과 용어를 제시해준 이데올로그 역할을 했음은 결코 부인할 수 없습니다. 전후 미국 정부 의뢰로 뉴른베르크 재판에 기소여부를 놓고 하우스호퍼를 직접 심문했던 조지타운대 지정학 교수 에드먼드 월시(Edmund A. Walsh)는 란츠베르크 교도소 수감 이전 히틀러의 연설과 수감후 저술한 ‘나의 투쟁’ 내용을 비교했을 때 ‘레벤스라움’, ‘방어종심’을 위한 공간과 자연적 국경선(방어선)의 중요성, 육군력과 해군력의 균형, 군사전략에 있어서 지리적 분석 등 하우스호퍼 영향을 받은 새로운 요소들이 나타나고 있음을 주목했습니다. (월시는 최종적으로 하우스호퍼가 나치 전쟁범죄 연루혐의에 대해 법적. 도덕적으로 유죄라로 판단, 기소를 권고했습니다) 나치의 폴란드 총독을 역임한 한스 프랑크가 전한 히틀러의 유명한 말, "란트베르크는 국가가 비용을 대준 나의 대학이었다"의 의미는 수감기간중 많은 공부와 성찰을 통해 성장했다는 추상적인 의미가 아니라 실제 하우스호퍼로부터 교육을 받았다는 의미가 담겼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반유대주의' 등 나치 이념에 근본적으로 동조할 수 없었던 개인사를 가진 칼 하우스호퍼


결국 그의 삶은 인류에게 엄청난 고통을 야기한 악의 제국 탄생에 힘을 보탠 ‘레벤스라움의 전도사’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반면 그가 살았던 시대의 고난과 비극에 휩쓸린 개인적 삶을 살았다는 것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인과응보라고도 할 수 있고... 자신이 초래한 비극으로 인해 스스로 무덤을 판듯한 모습 으로 비극미를 더해 주기도 하는...

그는 결코 반유대주의 정책을 지지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인종주의와 거리를 뒀다는 주장도 사실이었을 것입니다. 그의 아내 마르타 마이어-도스(Martha Mayer-Doss)가 유대인을 부친으로 둔 하프(1/2) 유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1935년 9월 제정된 ‘뉴른베르크법(독일인과 유대인 혼인을 금지하고, 오직 독일혈통에게만 시민권 부여)’에 따라 아내와 두아들 알브레히트와 하인츠는 혼혈인(Mischlinge)으로 분류돼 각종 차별을 받게 됩니다. 쿼터(1/4) 유대인인 아들들은 물론 특히 하프(1/2) 유대인이었던 마르타는 신분이 불안정했습니다. 나치정권의 부총통 직위에 오른 헤스가 마르타에게 명예 독일인(Ehrenarier) 지위를 부여하는 등 그들의 보호막 역할을 해줬으나. 1941년 5월 헤스가 ‘평화협상을 위해서’라는 이유로 직접 비행기를 몰고 영국으로 가버림으로써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루돌프 헤스는 영국 착륙후 곧바로 체포돼 수감됐으며, 뉘른베르크 재판 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93세로 감옥에서 사망합니다) 특히 루돌프 헤스의 미스터리한 돌출행동이 칼 하우스호퍼의 장남인 알브레히트의 사주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의혹까지 있었기에...(알브레히트는 헤스의 영국행 후 두달간 구금돼 조사를 받았으며 이후 지속적인 게슈타포의 감시하에 있었습니다) 알브레히트는 헤스에 비해 9살 어렸고 전공이 달랐으나 같은 시기에 뮌헨대학교를 다녔고 헤스가 부친의 애제자였다는 인연도 작용해 둘은 돈독한 친분을 유지했습니다. 헤스가 영국과의 평화조약을 추진하게 된 데는 실제 알브레히트의 영향이 있었다고 평가되기도 합니다.


칼 하우스호퍼와 전혀 다른 길을 간 장남 알브레히트 하우스호퍼


칼 하우스호퍼의 장남 알브레히트(Albrecht Georg Haushofer; 1903.1.7∼1945.4.23)는 뮌헨대에서 지리학과 역사학을 전공한 학자였습니다. 부친 후광이 없다고 볼 수 없었겠으나, 부친과 별개로 역량 있는 학자로 성장해 나갑니다. 부친이 뮌헨에서 활동한데 비해 알브레히트의 주 활동무대는베를린이었습니다. 지리학회 사무총장과 편집인을 거쳐 1940년부터 베를린대학교 국제학부 교수로 지정학을 가르치는 한편 나치의 대외정책 자문 및 외교부 선전활동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대외적으로 나치에 협조적 모습과 달리 그는 1930년대 중반부터 이미 나치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反나치활동을 한 인사들과 폭넓은 교류를 했습니다. 그리고... 1944년 7월 20일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의 히틀러 암살시도를 계기로 한 게슈타포의 대대적 ‘反나치 인사’ 검거에 휘말립니다.


알브레히트는 체포를 피해 뮌헨 남서쪽 암머제(Ammersee) 호수를 끼고 있는 작은 마을 파엘(Pähl)의 아버지 소유 하르트쉬멜호프(Hartschimmelhof) 농장에 은신했으나 12월 7일 체포되었고, 베를린 모아비트(Moabit) 감옥에 수감됩니다. 그리고 소련군이 베를린에 진입하기 시작한 1945년 4월 22∼23일 밤 동료들과 함께 인발리덴슈트라세(Invalidenstraße) 근처의 공터에서 SS 친위대에 의해 목에 총을 맞고 살해됩니다.


그의 시신은 뒤늦게 그의 행방을 탐문하던 동생 하인츠에 의해 5월 12일 발견돼 티어가르덴 묘지에 안장되는데, 유해발견 당시 그가 입고 있던 코트 주머니속에 교도소에서 쓴 80편의 소네트가 들어 있었습니다. 살아서 나갈 희망이 없는 감옥에서 저항정신과 내면적 고뇌를 서정적 시로 써내려간 사람...


알브레히트 하우스호퍼가 남긴 '모아비트 소네트'


그의 소네트는 1946년 ‘모아비트 소네트’라는 제목으로 출간됩니다. 모아비트 교도소 터는 현재 나치 만행과 그들에 대한 저항정신을 기리는 역사공원((Moabit Cellular Prison History Park)으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공원을 둘러싸고 있는 벽면에는 그가 쓴 소네트들이 쓰여 있습니다.


그의 소네트 중 많은 울림과 여운을 남기는 대표작 두 편의 일부 내용을 소개합니다


38번째 소네트 ‘아버지’ 中 : 나의 아버지는 봉인을 풀어버렸어요

나의 아버지는 거세지는 악마의 기운을 보지 않았어요

나의 아버지는 악마가 세상으로 날아오르도록 해주었어요

칼 하우스호퍼는 부인했으나 아들은 자신의 아버지가 히틀러와 나치의 광신과 살육, 테러에 힘을 실어준 존재였음을 시로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뒤 39번째 소네트 ‘유죄, 죄책감(Schuld)’…

나는 법정이 나를 유죄라고 하는 것-계획이나 걱정거리-은 괘념치 않습니다

만일 사람들의 내일을 위해 나의 의무를 계획하지 않았다면 나는 범죄자가 됐을 것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죄를 범했습니다

나는 보다 일찍 나의 임무를 깨달았어야 했습니다

나는 더 분명하게 악을 악이라 외쳤어야 했습니다

나는 판단을 너무 오랫동안 미뤄 놨습니다

나는 나 스스로를 고발합니다

나는 오랫동안 양심을 배반했습니다

나는 나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나는 이 고통의 전 과정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충분하지도, 명확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나는 내가 어떤 죄를 지었는지 압니다

아들 알브레히트가 체포된 후 칼 하우스호퍼는 히틀러에게 보내기 위해 사랑하는 아들을 구명하기 위한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편지를 부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는 아들이 그것을 원치 않을 것임을 알았을 수 있겠다 싶습니다.

독일이 패전하게 되면서 하우스호퍼는 연합국 감시아래 거듭 심문받고 자신소유 하르트 쉬멜호프 농장에 사실상 가택연금 조치됩니다. 그리고 에드먼드 월시 교수의 권고로 뉘른베르크 재판에 기소될 상황에 처하게 된 가운데, 칼 하우스호퍼와 아내 마르타는 1946년 3월 10일 밤에 동반 음독자살을 합니다. 하우스호퍼는 자살하기전 아들 하인츠에게 자신들의 시신이 놓일 곳을 알리는 상세한 지도와 함께 유언장을 남깁니다.

‘어떠한 형태의 장례식도, 부고도 비문이나 묘비도 남기지 말기 바란다’며 ‘나는 오직 잊혀지고, 잊혀지길 원한다’는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은퇴후 자신의 농장에 머물며 여유로운 여생을 꿈꿨을 하우스호퍼와 아내는 장남의 죽음으로 인한 낙담, 나치와 특별한 관계로 인해 기소위기에 놓이고 명예와 사회적 기반이 모두 무너지는 데 대한 상실감이 컸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조국을 위한 길이라 생각하고 헌신했던 연구와 학문이 조국 독일의 몰락과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으로 돌아왔을 때 많은 회한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와 그의 아내의 묘는 자신들이 소유했던, 현재는 이벤트 장소 등으로 활용되는 '하르트쉬멜 대농장' 한 곳에 아무런 표식 없이 묻혀 있다 합니다.

언젠가 그곳에 가게 되면 농장내 트래킹 코스상에 있는, 그들이 예배를 들인 곳일 수도, 그들을 추모하는 곳일 수도 있는 작은 숲속 예배당(Waldkapelle)에 앉아 역사와 삶에 대한 사색의 시간을 갖고 싶습니다.


아마도 그 사색속에는 1980년대 대학가에서 널리 읽힌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의 두 주인공에 대한 또 다른 생각도 들어있을 것입니다. 하우스호퍼가 수많은 인명을 죽음으로 몰아 넣은 ‘레벤스라움’이라는 악마적 개념을 갈고 닦은 ‘뮌헨대’라는 같은 공간에서 그의 아들 알브레히트는 물론 자유와 정의를 위해 목숨 바쳐 투쟁한 젊은이들이 자라나 인류에게 ‘희망’의 불씨를 남겨주었다는 상반되는 모습...

나치정권의 폭정과 유대인학살을 비판하는 전단을 작성하고 배포하며 시민들에게 도덕적 각성과 저항을 촉구한 뮌헨대학교 학생들의 비폭력 저항운동 모임인 ‘백장미단’. 그 조직을 주도했던 한스 숄(Hans Scholl; 1918.9.22生)과 소피 숄(Sophie Scholl; 1921.5.9生). 남매는 1943년 2월 18일 단두대에 의해 처형되어 같은 날 삶을 마감했습니다. 오빠인 한스가 뮌헨대에 입학한 해가 칼 하우스호퍼가 뮌헨대에서 강의한 마지막 해인 1939년 입니다. 같은 공간에서 전혀 다른 선택을 했고,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전혀 다른 평가를 받습니다. 한 사람은 오명 속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꽃다운 나이에 안타까운 죽임을 당한 젊은이들은 많은 사람에게 삶을 성찰하게 하는 이름을 남겼습니다.


칼 하우스호퍼의 망령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냉혹한 현실


그런데… 칼 하우스호퍼는 패배하고, ‘아무도 미워하지 않았고’ 숭고한 이상을 위해 희생한 숄 남매의 믿음은 궁극적 승리를 거둔 것일까요?

안타깝게도 인류의 역사는 그렇게 단순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습니다. 오늘날 칼 하우스호퍼는 부활하고 있습니다. 세계가 혼란해지면, 불안감과 혼란을 먹고 사는 악이 또다시 날아오르듯… 이미 많은 죄 없는 죽음과 숄 남매와 같은 희생이 또다시 빚어지고 있습니다.


‘알렉산드르 두긴(Aleksandr Gelyevich Dugin; 1962.1.7∼). 한번쯤 이 러시아인의 이름을 들어 보셨을 수도 있다 여겨집니다. 그의 이름은 특히, 2022년 8월 20일 30살의 딸 ‘다리야 두기나’가 아마도 두긴을 겨냥했을 차량 폭탄테러(평소 두긴이 타던 승용차에 폭탄이 설치돼 있었습니다)로 사망하면서 세계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됐습니다.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이 ‘우크라이나 군정보기관에 의한 테러’로 발표한 수사결과에 대해 조작의혹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두긴이 우크라이나 정부의 암살 표적이 될 이유는 충분합니다. 사실 그는 러시아, 유럽을 넘어 현재 국제사회에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평가됩니다. ‘푸틴’이라는 제자를 통해. 마치 칼 하우스호퍼가 ‘히틀러’라는 제자(?)를 통해 인류의 역사에 참혹한 흔적을 남겼듯...


두긴은 舊소련의 군 정보기관(GRU) 고위장교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980년대 반체제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던 그는 복잡한 사상편력을 거친 끝에 프리드리히 니체, 칼 슈미트, 칼 하우스호퍼 등의 철학과 이론을 결합한 자신의 정치적. 지정학적 이데올로기를 제시합니다.

그는 세계를 ‘자유주의’를 전파하는 해양세력과 이에 맞서는 육상세력 대결구도로 규정한후, 육상세력의 심장부(Heartland)에 위치한 러시아가 중심축(Pivot State)외 돼 영미주도의 자유주의적 세계질서(Hegemonic liberalism)와 싸워야 한다는 ‘신유라시아주의’를 내세운 것입니다.

그는 러시아가 서구와 본질적으로 다른 문명이며,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중간자적 존재가아니라 독자적 중심으로서 독립적 문명권(유라시아)을 형성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크라이나와 조지아 등은 러시아와 분리될 수 없는 하나로 유지되어야 하며, 독재 정권이지만 자본주의의 이익에 종사하는 중국과 튀르키예 등은 약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신유라시아주의에는 칼 하우스호퍼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하우스호퍼는 서구 해양세력과 싸우기 위해 소련과 연대(적색-갈색동맹)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숙청된 나치 좌파세력과 긴밀 교류했었습니다(그가 나치의 의심을 받게 된 하나의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우스호퍼는 독일이 세계를 주도하기 위해서는 유럽에서는 독일이,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주도세력이 되어야 하며; 독일과 일본을 연결하는 대륙심장부의 소련과도 긴밀히 협력하는 3자연대를 강조했습니다. 두긴이 하우스호퍼와 달리 러시아를 중심에 놓고 논의를 전개해 나갔으나, 모스크바-베를린, 모스크바-도쿄를 축으로 삼는 팽창주의를 내세웠다는 점에서 매우 유사함을 보여줍니다


러시아와 푸틴 대통령은 두긴의 ‘신유라시아 주의’가 아니었더라도 우크라이나 침공 등 힘을 앞세운 대외전략을 구사했을 것입니다. 히틀러와 나치가 하우스호퍼가 아니더라도 팽창주의 노선을추구했을 것이듯. 그러나 두긴은 푸틴과 러시아인들에게 그러한 러시아의 공격적 대외전략구사가 합리적이라고 마음 편하게 받아들이고 정당화할 수 있는 비전과 지적 논거를 제시했습니다. 나치와 독일인들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한 하우스호퍼의 전례와 같이.

뮌헨대 교수로서, 지정학 연구소 책임자로서 자신의 주장을 전파한 하우스호퍼 처럼, 두긴도 ‘러시아 지정학연구소((Russian Geopolitical School)를 설립. 운영하고 2008년∼2014년간 모스크바국립대 사회학부 국제관계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전파했습니다.(2023년 부터는 러시아 인문국립대학교-Russian State University for the Humanities-에 신설된 '이반 일린 고등정치학교’ 소장으로 재직중)


칼 하우스호퍼의 아들 알브레히트는 자신의 아버지에 반대하는 길을 갔습니다. 테러로 인하여 젊은 나이에 숨진 두긴의 딸 다리야는 달랐습니다. 그녀는 부친 사상을 계승한 철학자이자 정치평론가, 저널리스트로서 국영매체 등을 통해 우크라이나 침공을 강력 옹호하고 서구 국가를 공격하는 활동을 통해 대중적 지명도와 인기를 끌었습니다. 미국과 EU의 제재 명단에 포함될 만큼.

하우스호퍼는 아들 알브레히트의 죽음에 절망했습니다. 그와 아내가 자살에 이르게 된 하나의 큰 요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딸을 죽음으로 내몬 폭탄테러 현장에서 머리를 감싸면서 오열하는 두긴의 모습... 그도 절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폭탄테러후 두긴은 ‘우리는 승리를 위해 피를 흘릴 준비가 되어 있다’는 글을 SNS에 게시합니다.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은 다리야의 죽음을 ‘순교’로 포장하며 러시아 민족주의 결집의 계기로 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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