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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하다 Sep 12. 2024

욕심은 옮겨 붙을 뿐

달리기, 세 번째 이야기

달리기



지난 7개월 간 내 하루의 시작은 언제나 달리기였다. 평일이고 주말이고 가리지 않았다. 고단한 날에도, 여행 중인 날에도 달릴 수 있는 여건이 주어지는 날은 어김없이 운동화 끈을 동여맸다.


달리기를 시작한 것에 특별한 이유 따윈 없었다. 눈이 일찍 떠진 것 외엔 딱히 특별할 게 없었던 2월의 어느 새벽, 별생각 없이 러닝머신에 올랐던 것이 시작이 되었을 뿐이다.


가볍게 시작한 첫 달리기는 내 심장과 다리를 기분 좋게 자극했고, 가슴에 개운한 흔적도 남겼다. 오래간만에 흘린 땀에서 도파민이 터져 나왔다. 땀과 함께 송골송골 맺어진 쾌감은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나를 달리게 만들었다.


그렇게 달리기는 꼬박꼬박 내 아침을 깨우고, 소박하지만 알찬 성취감을 가져다주었다.






4월이 되었다. 2, 3월 추위가 저만치 물러갔고, 청명한 날씨가 이어졌다. 적당한 온도와 습도는 내 달리기를 한층 빠르게 만들었다. 이제는 달리기를 제법 컨트롤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과 자만심 그 중간의 무언가를 가슴에 붙이고 5월에 열리는 10KM 마라톤 대회를 당차게 신청했다.




5월치곤 유난히 더웠던 대회날, 오른발엔 긴장감을, 왼 발엔 설렘을 신고 러닝화 끈을 질끈 묶었다. 더운 날씨보다 더 뜨거운 대회 열기로 후끈 달궈진 스타트 라인을 밟았다. 페이스를 어떻게 잡아야 할지 몰라서 고수의 포스가 물씬 느껴지는 아저씨의 뒤통수만 쳐다보며 뛰었다. 벌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면서.

그분은 본인 의도와 무방하게 나의 페이스 메이커가 되어 주셨다.



첫 대회치고 만족스러운 기록을 얻었다. [47분 28초 / KM당 4분 44초 페이스]

길잡이가 되어 주신 그분께 감사의 마음을 품으며 과감하게 가을에 열리는 풀코스 마라톤을 접수했다.






대회 뽕의 여운 탓인지, 풀마라톤 접수 탓인지 달리기가 내 생활 더 가까이에 붙었다. 어제보다 더 잘 달리고 싶었고, 더 빨라지고 싶은 욕심이 돋았다. 욕심이 불면서 달리는 횟수와 거리에 대한 강박이 생겨났다. 일이 생겨 못 뛰는 날은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초조해했고, 결국 다음날 두 번을 뛰는 것으로 찝찝함을 배설했다. 주말 새벽엔 비장한 독립군 마냥 20-30KM씩 달려댔다. 그렇게 석 달을 미친 듯 달렸다.



하지만 내 몸은 욕심과 강박을 담아낼 만큼 강하지 못했다. 늘어나는 마일리지만큼 피로가 차곡차곡 쌓이는 게 느껴졌다. 다리는 젖산으로 똘똘 뭉쳐서 걷는 것도 버거워졌다. 그럼에도 미친놈처럼 꾸역꾸역 운동화 끈을 묶었다. 내 스스로 만든 루틴이라는 굴레에 갇혀 고통스럽게, 고집스럽게 달렸다.


상쾌하던 아침이 점점 두려워졌다. 뛰고 나면 개운했던, 그리고 성취감과 자신감을 선물해 주던 달리기였는데 이제는 무겁디 무거운 부담으로 변해있었다.


달리는 시간과 거리가 늘어가는데도 속도는 점점 느려졌다. 어느 날부터는 아무리 애를 써도 뛰는지 걷는지 헷갈릴 정도로 다리가 느리게 움직였다. 더 이상 버둥대는 것이 의미가 없었다. 멈춰야 했다. 휴식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한동안 쉬기로 마음먹었다. 7개월 간 반복된 루틴이었기에 쉬는 것에도 마음먹기가 필요했다. 새벽에 자연스레 눈이 떠지는 관성을 의식적으로 짓눌렀다.




걷기



5일을 쉬었더니 그제야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천근만근 같던 몸도 한결 가벼워졌다. 저녁을 먹고, 운동화 끈을 느슨하게 묶은 채 무작정 밖으로 나왔다. 쉬는 동안 가을이 왔는지 더 이상 덥고 습한 여름 공기가 아니었다. 선선한 가을바람이 귓불을 스쳤다.


사부작사부작 걷기 시작했다. 별생각 없이 달리기를 시작했 듯, 별생각 없이 산책을 시작했다. 지난 7개월간 새벽마다 달렸대던 코스를 뛰지 않고 걸어 보았다. 매일 보던 거리임에도 모든 게 새로웠다.


새벽이 저녁으로 바뀌니 색감이 새롭고, 보폭과 속도가 바뀌니 발걸음이 새로웠다. 심박이 바뀌니 숨소리가 새롭고, 천천히 보게되니 지나치는 사람들 표정이 새로웠다. 내 달리기 코스에는 의외로 멋진 나무도 많았고, 맛있어 보이는 식당들도 많았다.


걷다 보니 많은 것이 보였고, 자세하게 보였다.






평생 욕심을 부리고, 욕심에 쫓기며 살아왔다. 지치기도 하고, 후회가 되기도 해서 욕심을 내려놔 보자며 운동을 시작했었다. 수영을 하고, 가끔은 사이클도 타다가 올해부터는 달리기도 시작한 터였다. 그런데 달리기에서 이렇게 큰 욕심을 부리게 될 줄은 몰랐다. 사회에서 부리던 욕심들이, 취미 생활에 고대로 옮겨 붙어 버렸다. 내 욕심은 내려지지도 않았고, 어디 가지도 않았다. 여전히 내 몸 어딘가에 찰싹 붙어 있었다.



난 아직 참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쯤 욕심들을 접어놓고 편하게 즐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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