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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유 Dec 04. 2024

잊혀짐, 저울, 발견


주머니에서 구겨진 종이뭉치를 꺼낸다. 잉크가 번져 오래된 얼룩처럼 남아 있고, 그 자국은 무언가를 담고 있던 흔적 같다. 손끝에 감기는 감촉은 의외로 부드럽다. 종이 안에 적힌 건 사소한 메모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내용을 알아볼 수 없게 흐려져 있다. 지워진 약속과 끝내 이루지 못한 계획들이, 종이 섬유처럼 엉켜 있었다.


방 한구석에서 오래된 옷감을 발견한다. 가장자리로 갈수록 빛이 바랬고, 올이 풀린 부분이 실타래처럼 흩어져 있다. 한때 누군가를 감쌌을 이 옷감은 이제 몸을 잃고 공간 속에서 무게만 차지한다. 손끝이 닿자 먼지가 흩날린다. 그것은 오래된 숨결처럼 가볍게 퍼져 나간다. 나는 그것을 천천히 구석에 놓았다.


부엌에서는 오래된 설거지 수세미를 만지작거린다. 부드러웠던 결은 다 닳아버리고, 남아 있는 것은 거칠고 단단한 상처뿐이다. 물기를 머금은 채 버티는 이 작은 조각은 어쩌면 쓰임새를 다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손에서 쉽게 놓아지지 않는다. 닳아 없어지면서도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어떤 것.


책상 위, 반쯤 마시다 잊혀진 캔 음료가 있다. 차가웠던 표면은 미지근한 온도로 변했고, 남은 액체는 가볍게 흔들리며 작은 파동을 만든다. 그 파동은 멈추는 듯하면서도 멈추지 않는다. 캔을 들어올려 입에 가져가면, 액체는 옅고 밍밍하다. 그러나 여전히 버릴 수 없었다.


이 모든 것들은 그렇게 방 한구석에 쌓인다. 잊혀진 옷감과 닳아버린 수세미, 남겨진 음료와 주머니 속 종이뭉치. 버려야 할 것처럼 보이는 사소한 물건들. 무엇인지 깨닫기에는 보잘 것 없는 것들. 나는 그것들을 내려놓고, 다시 들어보기를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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