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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공선사 Jun 17. 2024

나를 경영하는 금강경season5(11.법계통화분2)

무주상보시를 도움을 받을만한 상대에게 주저하거나 따지지 말고 해야 한다.

수보리 약복덕 유실 여래불설 득복덕다 이복덕 무고 여래설 복덕다

(須菩諸 若福德 有實 如來不說 得福德多 以福德 無故 如來說 福德多)


수보리야, 만약 복덕이 실다움이 있을진대 여래가 복덕이 얻음이 많다고 말하지 않으련만 복덕이 없으므로 여래가 복덕을 얻음이 많다고 말하느니라


여래께서 먼저 보시로 인한 복덕이 매우 많음을 말씀하시고, 그 뒤에 이어 이와 같이 복덕의 성품이 공(空)함을 자꾸 설하신다.


복덕이 많음을 설하면 우리들이 복덕을 쌓는데 집착하고, 복덕이 공(空)함을 말씀하시면 복덕을 짓고 쌓는 것에 소홀히 하는 우리들의 양극단의 선택을 염려하시기 때문이다.

늘 중도(中道)를 이와 같이 설하시지만 정착 행(行)으로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복덕을 쌓는 일은 지극히 중요하고 필수적인 덕목이지만 그것만 열심히 하고 집착한다고 해서 성불하는 것도 아니고, 또 행(行)이 아무래도 마음에 미치지 못하므로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 되기 쉬워 오히려 자기 존재가 문제가 생기기 쉽다.


복덕이 공(空)함만 생각하면 또한 성불도(成佛道)를 갈 수 없는 이유는 복덕을 짓는 것도 못하는 주제에 부처가 된다는 것은 망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부처는 없다. 마치 깨달음만 얻으면 모든 것을 다 알고 할 수 있고 중생구제를 하면서 복덕도 엄청나게 지을 수 있는 것처럼 생각이 들지만, 유감스럽게도 선후(先後)가 바뀐 생각일 뿐이다.


그래서 이 금강경에서 끊임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무주상보시(無主相菩施)와 크나큰 복덕(福德) -삼천대천세계를 채우는 칠보로 하는 보시는 큰 복덕을 짓는 일이다- 을 언급하시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복덕을 짓고 쌓아야 중도(中道)에 최대한 근접하고 그 복덕이 명실공히 생(生)을 이어 내 존재와 내 삶, 그리고 대(代)를 이어 후손들에게 두루 크나큰 공덕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은 정견(正見)과 정행(正行)을 동시에 요구하는 것이다.


1. 주저하지 말고 따지지도 말아야 한다.


내가 복을 지을 상대이고, 내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 대신하기 어려운 그런 상황이고, 내가 해야 되겠다고 생각이 들면 그 즉시 행(行)으로 옮겨야 한다.


마음으로는 천만번도 더 복을 지으면서 정작 행(行)으로 한 번 옮기기 어려운 이유는 그런 마음이 순간 날 때 시간을 두고 이것저것 생각하다 보니 걸리고 또 다른 생각이 덮어버리고 미루게 되다 보니 실천이 안 되는 것이다.


또 그러다 보면 오랜 세월 아상(我相) -집착과 욕망덩어리- 이 굳어져 쉽게 자기 자신을 이기기 어렵게 된다.


복을 짓는 것은 마음으로 아무리 지어봐야 아무 소용없다. 마음만 착하다고 착한 것인가?


오로지 행(行)으로 나타나서 상대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사랑은 얼마든지 마음으로 하고 마음으로 끝날 수도 있지만, 자비(慈悲)는 반드시 실천이 뒤따라야 하는 개념이다.


또한 상대와의 인연(因緣)도 따지지 말아야 한다.


만나는 사람마다 선인연인지 악인연인지 자기도 모르게 따지는 것이 많은 불자(佛者)들의 심리적인 병폐 가운데 하나다. 자기 나름대로 일일이 따져봐야 정확한 판단도 하기 어려운 것이 인연이다.


상대가 착하고 도움을 받을만한 사람이면 족하다.


상대에게 베풀더라도 바라는 것이 정말 아무것도 없다면 배신이라는 개념도 없는 것이다. 상대를 좋아하는 마음에조차 매이지 않아야 한다.


무주상보시는 혹시라도 잘못된 보시에서 올지도 모르는 고통까지 완벽하게 떨어낸다.


2. 복덕의 성품이 공(空)함을 철저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무주상보시는 바로 복덕의 성품이 공한 것을 인식하는 바탕 위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올바로 인식하고 있지 못하면 각종 인간적인 문제가 뒤따르게 되고 심하면 복을 짓는다고 하다가 오히려 잘못되게 된다.


나아가 복을 짓더라도 채권을 얻는 것에 그칠 뿐, 그 복이 무위복(無爲福)으로서 기능을 다하지 못하게 된다.


엄격하게 한 번 따져보자.


내가 복을 지으면 그 복을 받는 상대가 있게 되고, 그러면 상대는 보이지 않게 나에게 빚을 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복을 짓는다고 무슨 공덕을 바랄 것이며 나 자신을 자랑스러워하겠는가?


무주상보시를 하지 않으면 나와 상대방을 함께 놓고 복을 짓는 것도 아니고 그냥 주고받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복을 짓는 사람은 분명 상대방에게 무엇을 바라고 상대방이 부담을 지게 되도록 되는 그런 마음으로 짓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복덕의 성품이 공한 것을 철저하게 인식하는 것은 진정으로 상대를 보이지 않는 빚에서 해방시켜 주는 극선(極善)한 행(行)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진정으로 나의 희생을 바탕으로 주는 것이다.


그래서 복덕의 성품이 본래 공함을 철저하게 인식하는 마음을 바탕으로 하는 무주상보시를 따지지 않고 도움을 받을만한 상대방에게 -아무나 아니다- 내 피와 살을 떼내어주는 것이 바로 올바른 복을 짓는 행(行)이다.

이 얼마나 좋은가?


이것이 바로 나 자신과 시방법계(十方法界)가 하나가 되어 만중생을 구제하는 것이며 내가 성불도로 나아가는 것이니까.


석가모니불께서 이런 것을 가르쳐주시지 않았다면 아직도 우리는 거래행위를 가지고 복을 짓고 있다고 크게 착각하고 망상 속에서 헤매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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