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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공선사 Jun 14. 2024

나를 경영하는 금강경season5(10.법계통화분1)

큰 복을 짓기 위해 부처님이 인연 지어주시고 기회를 부여해 준다.

수보리 어의운하 약유인 만삼천대천세계 칠보 이용보시 시인 이시인연 득복다부

(須菩提 於意云何 若有人 滿三千大千世界 七寶 以用布施 是人 以是因緣 得福多不)


여시 세존 차인 이시인연 득복 심다

(如是 世尊 此人 以是因緣 得福 甚多)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칠보로써 보시에 쓴다면 이 사람은 이 인연으로 복을 얻음이 많겠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그 사람은 이 인연으로 복을 얻음이 매우 많겠습니다.


우리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 복덕을 누리는 것을 소원으로 하고 있는데, 복(福)을 짓는 것이 소원인 사람은 별로 없다.


복을 지으면 당연히 누리게 되고, 그 복력(福力)을 바탕으로 해서 수행을 열심히 잘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되어 있다.

그래서 복을 짓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자, 그 씨앗이 됨에도 불고하고 왜 그것을 소원(所願)으로 하고 있지 않은지도 참 이상한 일이다.


아마 복을 쉽게 지을 수 있는 것으로 또 언제든지 자기가 원하면 지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수행만 열심히 하면 복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가볍게 생각을 하고 있어서 소홀히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복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앞에서 누차 언급했으니 생략하고, 우선 복을 왜 생각만큼 짓기 어려운지 먼저 생각해봐야 한다.


내가 복을 지으면 짓고 말면 말지, 복을 짓는데도 신과 부처님의 도움이 왜 필요한지 의아해할 것이지만 사실이다.

작은 복은 자기 의지로 얼마든지 지을 수 있지만, 큰 복은 거의 신과 부처님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


복을 지으려면 나와 상대, 그리고 여건(상황)이 삼박자가 맞아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1. 나


나 자신은 아무리 이타적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기적 유전자라는 말이 있는 것만 봐도 복을 잘 지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기는 어렵다.


나도 모르게 돈과 몸, 그리고 가족 등에 집착하는 면이 있게 마련이고, 또 복을 지을 상대방에 대해 항상 올바로 이해하고 있다고 자신할 수 없다.


그래서 악인(惡人)에게 선행을 베풀다가 오히려 당하기도 하거나 도움을 주고서도 오히려 배신을 당하는 것이 인간의 일상사이다.


또한 복을 지을 수 있는 자원 -돈, 건강, 이타심, 사랑과 자비 등- 을 충분히 가지고 있지도 못한 경우가 대다수이다.


그리고 나 자신이 정말 아무것도 바라는 바가 없이 베풀 수 있는지 그것도 의문이다. 심지어는 자기 생각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도움을 준다고 하지만, 자기 영혼은 그 대가를 보이지 않게 기대하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복 짓는 마음을 잠깐 냈다가도 금방 다른 번뇌망상이 덮어버리기 때문에 그만 행(行)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마음으로 끝나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므로 원만한 복을 지을 수 있는 전체적인 나 자신이 되어있지 못하므로 중생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는 것이다.


작은 복은 나 자신에게 큰 부담이 되지 않으므로 많이들 짓지만 , 큰 복은 자기희생이 뒤따르게 되므로 그런 용기와 힘을 신과 부처님이 보태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신과 부처님 가피가 있어야 비로소 큰 복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다.


2. 상대


내가 복을 지으려면 그 대상이 있어야 한다. 허공에 돈을 뿌려 아무나 줍는다고 복을 짓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복을 지을 수 있는 상대를 만나는 것 역시 인연(因緣)에 의지한다.


이 인연을 내가 억지로 만나고 싶다고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만나기 싫다고 만나지 않을 수도 없는 법이다.


그러니 아무리 돈이 많고 큰 복을 짓고 싶어도 그런 상대를 만나지 못하면 어렵게 되는 것이다.

또한 도움을 받으면 진정으로 고마워하고 재기하고 잘 되고 고통에 벗어날 수 있는 그런 상대를 만나는 것이 쉽지 않다. 이런 상대를 만나야 복 짓는 보람이 더 많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 내가 전생에 어떤 도움을 받은 것이 있어서 금생에 만나 도움을 주는 것을 복을 짓는다고 할 수 있는가? 오히려 빚을 청산하는 것에 가까울 것이다.


그런데 전생의 그런 인연을 모르니 빚을 갚는 것을 가지고 복을 짓는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그러니 그런 인연은 당연히 오게 되어 있지만, 되도록 금생에 새로 만나는 인연에게 도움을 베푸는 것이 복을 짓는 것이 되는데, 그런 상대를 자기가 원한다고 만나지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복을 짓는 데 어찌 신과 부처님 가피가 필요하지 않으랴.


3. 여건(상황)


나와 상대방이 복을 지을 수 있는 인연으로 구족 되더라도 그런 상황이 주어지지 않으면 행(行)으로 짓기 어렵게 된다.


나와 상대방이 필연적으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여건이 성립되어야만 비로소 행동이 취해지는데, 오로지 내 도움이 아니면 상대방이 꼼짝없이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 주어져야 한다.


거기서 자연스럽게 복을 짓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신과 부처님이 이런 상황에 처하는 사람을 만나게 해주지 않으면 복을 짓기가 참 어렵게 되는 것이다.


어떤가?


복을 잘 지을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곧 성불도(成佛道)를 잘 가는 사람이라는 뜻이 되고, 또 신과 부처님의 가피(加被)를 받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니 복을 잘 짓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복을 잘 짓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어찌 하찮은 소원이고 별 것 아닌가?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을 왜 수행도의 6바라밀의 첫 번째에 두었는가 이해할 수 있다.


무주상보시를 해서 복을 지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부처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모두 복을 잘 짓는 것을 소원(所願)으로 삼으면 이 세상은 그래도 살만한 곳이 될 것이다. 그러면 자녀도 많이 출산할 것 아닌가?


석가모니불께서 또 칠보로 보시하는 것을 말씀하시는데, 이때의 보시는 위와 같은 조건이 잘 구비되어 원만한 보시가 되고 그럼으로써 복이 매우 많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칠보가 산더미처럼 있으면 뭐하나?


내가 보시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보시를 받을만한 상대방이 인연 되고, 그래서 무주상(無住相)으로 줄 수 있는 조건이 되어야 하는 것을...


참고로 신과 부처님께서 그런 기회를 주셨을 때 그 기회를 머뭇거리며 놓치면 다음에는 그런 기회를 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은 결국 헛된 것이 되고, 그것을 이미 누렸으므로 내생에는 밑바닥에서 출발하게 된다.


복의 끝이 고생의 시작이 되어있는 것이 이 사바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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