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밉군.”
캠퍼스 잔디밭에서 바나나 우유를 한 입도 주지 않고 홀딱 먹어버리는 정우에게 우빈이 말했다. 애인에게 삐친 여자애처럼 우빈은 정우에게 애교를 떨었다. 그리곤 정우에게 아프지 않을 정도의 헤드록을 걸었다.
187cm의 키, 넓은 어깨를 가진 우빈이 흐느적거리는 정우를 감싸버리며 애교를 피우니 지나가던 여학생들이 부러움의 시선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
간절히 바라고 원했던 이 순간
뮤지컬 ‘지킬 앤드 하이드’의 조 배우처럼 한 여학생이 ‘This is the moment’를 부르니 옆에 있던 여학생이 최 배우처럼 클라이맥스 부분을 온 힘을 다해 따라 불렀다.
간절한 기도 절실한 기도
신이여 허락하소서
그녀들은 그렇게 간절함을 담은 제스처를 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지금, 이 순간, 저 헤드록 걸린 말라비틀어진 시래기가 되고 싶다.”
한 여학생이 우빈과 정우를 보며 부러워했다.
우빈은 막내 기질 다분한 착한 소년이었다. 유복하고 화목한 가정에서 위로는 형과 누나가 있다. 농구 마니아였던 우빈은 남자애들도 아주 좋아하는 남자였다. 어릴 때부터 자동차 피규어에 관심이 많아서 전공도 미래자동차공학과를 선택했다. 하늘을 나는 자동차를 타고 먼 세상으로 날아가고 싶은 꿈 많은 소년이었다. 우빈은 다른 남자들에게서 찾기 힘든 공감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정 많고 따뜻했다. 세심했다. 그래서 주변 여자들은 그가 본인을 좋아한다고 착각했다. 만인의 연인이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그를 좋아했다.
우빈과 학과 친구들이 학교 앞 밥집에 들어갔다. 친구들은 항상 그 밥집에 갈 때면 우빈을 데려갔다. 아니 모셔갔다.
“어이구, 우리 빈이 왔어?”
밥집 이모님들은 우빈을 아주 좋아했다.
“이거 특별히 너니까 주는 서비스야. 많이 먹어.”
이모님들은 보글보글 끓는 계란찜 뚝배기를 우빈 앞에 놓았다. 그러면 우빈은 싹싹하게 웃으며 고마움을 표했다.
“이모님, 잘 먹겠습니다. 헤헤.”
샘이 난 친구들이 끼어들어 얘기했다.
“이모님, 저희도 서비스 주시면 안 돼요?”
“응. 안 돼!”
“왜 맨날 우빈이만 줘요? 우리가 더 자주 오는데.”
“여긴 뭐 땅 파서 장사하냐?”
입을 삐죽거리는 친구들에게 계란찜을 쓱 밀어주는 우빈은 밥집 이모님들 사이에서도, 친구들 사이에서도 사랑받는 사람이었다. 우빈은 삐친 친구들을 다독이며 맛있게 밥을 먹고 있었다.
밥집에 회색 후드를 뒤집어쓰고 귀에는 이어폰을 꽂은 깡마른 남자 한 명이 들어왔다. 핏기라고는 보이지 않는 푸석하고 건조한 남자였다. 그의 깡마른 몸은 이모님들의 모성애를 자극했다. 이모님들은 그를 한쪽 자리로 극진히 모셨다. 그때였다.
그 소리는 아날로그 가을 감성에 취해있던 그의 이어폰을 뚫고 들어갔다. 만지면 바스락 부서질 것 같은 회색 후드 남자가 휙 돌아봤다.
대학에 들어와서는 본인의 고등학교 시절 별명 ‘쒸레기’를 아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깜짝 놀랐다. 소리가 들린 곳은 친구들과 밥을 먹고 있는 우빈의 일행이 있는 곳이었다.
정우는 우빈과 눈이 마주쳤다. 정우는 회색 후드를 벗으며 우빈을 향해 걸어갔다. 근래 최고 총기 있고 부리부리한 눈으로 말이다.
“지금 뭐랬냐?”
“형, 뭐요?”
“방금 나보고 뭐랬냐고?”
“웅? 내가 뭐랬지?”
우빈이 의아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했다.
“쒸레기라고 했냐?”
“아. 형한테 한 말 아니고, 얘 부른 건데요.”
쒸레기 정우는 우빈이 가리키는 우빈 옆자리 남학생을 쳐다보았다. 그 쓰레기는 우빈의 옆자리에서 고춧가루 묻은 숟가락으로 계란찜을 휘적거리며 퍼먹던 어느 한 남학생이었다.
“얘도 쓰레기야?”
“그럼 형도 쓰레기야?”
“뭔 개쓰레기 같은 소리야? 난 아니야.”
“음.”
“근데 얜 왜 쓰레기야?”
“얘 사는 자취방 가보고 너무 더러워서. 그때부터 쓰레기가 되었지. 애칭 같은 거야.”
“애칭은 무슨?”
정우는 침을 튀기며 우걱우걱 밥 먹는 데만 정신이 팔린 쓰레기를 보며 물었다.
“야! 쓰레기. 넌 쓰레기란 소리 들으면 좋냐?”
그 쓰레기라는 남학생은 대답했다.
“아무 상관 없어요.”
“그래. 쓰레기란 소리 들어도 상관없으니 쓰레기겠지.”
정우는 본인의 말이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이어폰을 꽂고 친구도 없이 혼자 밥을 먹는 정우가 우빈은 마음이 쓰였다. 그의 옆자리에 가서 앉았다. 어설프게 돌솥비빔밥을 비비는 그의 숟가락을 빼앗아 쓱쓱 비벼주었다. 그리곤 수저통에서 새 숟가락 하나를 꺼내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숟가락을 받아든 정우는 비빔밥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었다.
“형, 뭐 들어요?”
우빈은 정우 귀에 꽂혀있던 이어폰 한쪽을 빼 자신의 귀에 꽂았다.
“오~ 모놀로그monologue. 나도 이 노래 좋아하는데.”
우빈은 정우 옆에 딱 달라붙었다.
“왜 이래? 사람 설레게.”
정우는 우빈에게서 한 뼘 떨어졌다.
“형 근데 무슨 사연 있어요?”
“뭔 사연?”
“아니면 가을 타나?”
“저리로 가라. 혼자 있고 싶다.”
우빈은 정우가 듣는 그 노래에 갑자기 그녀가 떠올랐다. 고등학교 시절을 함께 했던 추억의 그녀. 친구들에게 다 잊었다고 말했지만, 중국으로 간 그녀를 아직 잊지 못하고 있었다. 중국에서 서풍이 불어올 때면 순간순간 휘청했다. 사귈 때 힘들게만 한 것 같아서, 그래서 그녀가 떠난 것 같아서 우빈의 큰 눈에 가끔 눈물이 맺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