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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온세종

by 백수광부

[소설 : 핸섬 가이즈]


07. 온세종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세종이 구슬피 노래를 따라 부르며 눈물을 또르르 흘렸다. 뜨거운 물을 부어 드립커피를 천천히 내렸다. 지는 해와 강물의 윤슬을 바라보는 세종의 눈가에 슬픔이 일렁였다.


그는 마음을 가다듬고 커피와 함께 제공된 작은 티슈에 스케치를 시작했다. 강변에 있는 아름다운 집 한 채. 거기에는 엄마, 누나, 세종이 행복한 얼굴로 따뜻한 저녁을 먹으며 얘기를 나누고 있다.


세종이 까칠해진 것은 그가 중학교 1학년 때 그 사고 이후부터였다. 하교 후 친구들과 탁구 게임을 했는데 극적으로 이겨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누나에게 자랑하고 싶어 집으로 달려갔다.


“누나! 누나~”


신발을 벗자마자 누나 방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누나는 집에 없었다. 기다리면 오겠거니 생각한 그때 집 전화가 울렸다.


곧장 달려간 곳. 거기에는 이미 누나는 없었다. 이미 그와 다시는 놀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린 뒤였다.


누나가 가버렸다. 가장 소중한 그의 벗이자 정신적 안식처였던 누나가 그렇게 허무하게 가 버렸다.


하얀색 교복 셔츠를 적신 붉은 피, 한 번도 눈치채지 못한 누나의 슬픈 표정을 확인한 세종. 그날 이후 가끔 그 장면은 예리한 칼날이 되어 찌릿찌릿 가슴을 찔러대며 그를 괴롭혔다.


세종의 가족은 부모님과 남매였다. 부모님은 세종이 11살이 되던 해에 이혼했다. 이혼 후 힘들어하던 엄마 대신 세종을 보살핀 건 두 살 터울의 누나, 세온이었다.


어릴 때부터 세종과 세온은 사이가 남달랐다. 집안 공기가 좋지 않은 날이면 둘은 손을 꼭 잡고 근처 강변으로 갔다. 잡은 손은 일부러 더 신나는 척 세게 흔들었다.


둘은 근처에서 작은 돌멩이를 주워서 강물에 하나씩 던지면서 밀려드는 쓸쓸함을 달랬다.


“누나, 엄마 아빠 이혼하면 어떻게 해?”

“너무 걱정하지 마. 누나가 있잖아.”


“누나는 어른도 아니면서.”

“너보다는 한참 어른이지.”


“쳇. 겨우 두 살 많으면서.”

“세종아, 누나가 불러 주는 대로 곱해볼래?”


세종은 근처에 있는 나무 막대기 하나를 집어 들었다.


“누나, 불러 봐.”

“실수하지 말고 잘해. 365 곱하기 2.”


“응. 365 곱하기 2, 했어.”

“거기다가 24를 다시 곱해봐.”


세종이 땅바닥에 수를 적으며 꼼꼼히 계산했다.


“흠…. 0, 2, 5, 7, 1.”

세종은 곱한 값을 흙바닥에 천천히 써 내려갔다.


“그래 17,520시간만큼 누나가 너보다 더 어른이야.”

“우와!”


누나는 그렇게 동생을 안심시켰다. 강변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둘은 쌍둥이 아이스크림을 사서 반으로 나눠 먹었다.


집에 도착하면 살림살이를 부수는 화난 아버지와 울고 계신 비참한 어머니가 계셨지만, 세종은 누나가 있어 버틸 수 있었다. 누나가 손을 잡아주면 불안도 슬픔도 차분해졌다.


누나를 잃은 후 세종은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 새끼 같았다. 여린 속살을 감추고 세상을 향해 뾰족해지려고 노력하는 어린 고슴도치.


어느 날은 본인의 아버지처럼 화가 났고 어느 날은 본인의 어머니처럼 비참함에 허우적거렸다. 그런 기분이 본인을 집어삼킬 때면 세종은 더욱 어머니께 집착했다. 식사는 했는지, 몸은 어떤지, 잠을 잘 주무시는지 하루에도 몇 번이나 전화해 확인했다. 그리곤 아무것도 아닌 자신을 좋아한다는 여자애들에게 삐딱하게 대했다. 누나를 위해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 하찮은 자신을 좋아하는 여자애들은 더욱 하찮아 보였다. 그래서 다가오는 여자애들에게 뚫고 들어올 수 없는 방패를 세웠다.


세종은 대학교 앞 경양식집을 지날 때면 누나가 해주던 함박스테이크가 생각났다. 음식은 참으로 이상했다. 향만 맡아도 가슴이 미어질 정도로 그때 생각이 나버렸다.


“누나, 나는 가끔 우리 가족이 예전처럼 맛있는 거 먹으며 행복하게 웃는 상상을 해.”

“상상만 하지 말고 우리도 하면 되지 뭐.”


“레스토랑에 앉아서 스테이크 썰면서 웃는 거?”

“그래. 누나가 지금 맛있게 만들어 줄게.”


세온이 다정하게 웃으며 요리도구를 꺼냈다.

“진짜? 와!”


“그게 그렇게 하고 싶었어?”

“응. 해보고 싶었지. 부러웠지.”


가족을 잃은 슬픔은, 그 허기는 쉽사리 채워지지 않았다.


세종은 용기를 내어 경양식집 문을 열었다. 추억에 젖어 허기를 채우고 싶었다. 따뜻하게 내면을 데우고 싶었다. 함박스테이크를 주문하고 기다렸다. 누나가 너무 보고 싶어졌다.


온기가 솔솔 피어나는 음식이 정성스레 놓였다. 조심스레 썰어보았다. 포크로 한 조각 찔러보았다. 입으로 가져갔다. 씹기 힘들었다. 그래도 애써 굴려보았다. 도저히 삼키기 힘들었다. 어쩔 수 없이 휴지에 뱉고 말았다.


“후.”

세종은 차오르던 숨을 이내 내뱉었다.


갑자기 한 여자가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세온과 닮아 있었다. 따뜻한 표정은 아니었지만 뭔가 아주 비슷한 느낌이었다.



표정 없는 얼굴.
스모키 화장.
애쉬 그레이의 밖으로 삐친 탈색 머리.
검은색 징 재킷.
찢어진 블랙진.
머리부터 발끝까지 흑백이 먹어 삼킨 그녀.


슬픔을 눌러 담은 뾰족한 가시넝쿨 같은 그녀에게서 세종은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 역시 함박스테이크를 시켰다. 2인분을 시켰지만, 음식이 나올 때까지도 상대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는 음식을 먹지 않았다. 상대를 기다리는 것 같지도 않았다.

잠시 음식 옆에 엎드려 있더니 이내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세종은 뭔가에 홀린 듯 그녀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린 그녀. 세종은 며칠을 그 경양식집 앞에서 그녀를 기다렸지만, 어디에서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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