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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소년에서 청년

by 백수광부

[소설 : 핸섬 가이즈]


18. 소년에서 청년


세종은 매일 오던 편지가 끊기고 걸려오던 전화가 멈추니 허전했다. 그런 허전함을 채워주는 게 사랑일까라는 생각이 희멀겋게 들었다.


비슷한 시기에 제대하는 군대 동기들이 가은을 잡으라며 부추겼다. 그는 캄캄한 밤 달빛에 취해 가은에게 연락했다. 세 번 전화한 끝에 그녀와 연결되었다.


“나야.”

“응.”


“나 3일 후에 제대야.”

“그렇구나.”


“나 바로 복학해.”

“···.”


“개강일 3시쯤 시간 있으면 만날까?”

“···.”


“생각해 보고 연락해.”


세종은 가은이 지금 거절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주저하면 자신이 다가갈 생각이었다.


세종은 이제 늦깎이 사춘기가 끝난 씩씩한 남자였다. 반항기 찰랑거렸던 눈도 서글서글하면서 무던한 눈빛으로 바뀌었다. 사막 같던 마음에도 새싹이 돋아날 만큼 양기가 흘렀다.




세종은 개강을 앞두고 떨리는 마음으로 거울 앞에 섰다. 아직은 짧은 머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머리카락이 조금 더 자라면 부드러운 이미지를 만들어 줄 C컬 파마를 하고 싶다 생각했다.


그때 가은에게 문자가 왔다.


“중앙도서관 앞 연못가에서 봐.”


문자를 확인한 세종은 안도했다.


“알겠어.”


“이번엔 늦지 마.”

“기다리고 있을게.”


세종은 다시 거울 앞에 섰다. 햇살처럼 밝아진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온세종 너! 진짜 멋있어!”


자신을 향해 윙크를 날리고 엄지 키스까지 날렸다. 흥얼거리며 옷장 문을 열었다. 거울 앞에 서서 어울릴만한 옷을 이리저리 대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멋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며 잠자리에 들었다.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단꿈을 꾸었다. 환한 무언가가 자신에게 안기는 꿈이었다. 복슬복슬한 것이 감싸 안는 듯 평온한 꿈이었다.

그 느낌을 그대로 전달받은 듯한 새어 들어오는 아침 햇살에 눈을 떴다. 안면근육도, 몸도 개운했다. 기지개를 켜고 좋아하는 음악을 틀었다. 노래를 따라부르며 샤워했고 얼굴에 스킨로션을 톡톡톡 발랐다.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닦고는 드라이어로 살짝 말렸다.


속옷을 갖춰 입고 전신거울이 달린 옷장 앞으로 갔다. 차이나 칼라 흰색 긴 팔 티셔츠를 꺼내 입었다. 흰옷을 입으니 가슴이 더 넓어 보였다. 만져보니 탄탄해 마음이 훈훈해졌다.


셔츠 맨 윗단추는 하나 풀었다. 목이 길어 보여 세련된 느낌이다. 바지는 하늘빛 살짝 도는 아이스 워싱 데님팬츠를 입었다. 허리는 살짝 남고 엉덩이에 걸쳐지는 바지 뒤태가 마음에 들었다. 완벽했다. 은은한 향의 헤어 에센스를 젖은 머리에 펴 바르고 시원한 느낌의 우디 계열 향수로 마무리했다. 깨끗한 흰 운동화를 신고 집을 나섰다.


대국대 앞 꽃집에 들러 그녀와 어울리는 꽃을 골랐다. 주인이 노란 안개꽃 한 다발을 정성스레 포장했다. 그 모습에 세종의 마음도 화사해졌다. 주인이 물었다.


“들고 가실 거죠?”

“아…. 종이 가방 있으면 거기에 담아 주세요.”


3월의 사람 많은 캠퍼스에서, 많은 이의 주목을 받을 용기까지는 없었다. 그래도 노란 안개꽃 한 다발이 담긴 종이가방을 들고 경쾌하게 도서관 쪽으로 걸어 올라갔다. 연못가 벤치에 앉았다. 늘 가은을 기다리게 한 게 미안해서 오늘은 30분이나 일찍 도착했다.


세종은 오랜만에 캠퍼스의 신선한 공기를 ‘스읍’하고 들이마셨다. 20살에 걸었던 캠퍼스와 다시 돌아온 캠퍼스의 공기는 달랐다.


그때는 학교였지만 이제는 학교로만 느껴지진 않았다. 아주 무겁지는 않아도 아주 가볍지만도 않은 적당한 공기의 무게감에 두근거렸다. 세종은 이제야 소년티를 벗고 청년이 된 것 같았다.


어린 새내기들을 보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캠퍼스에서 펼쳐질 가은과의 연애도 그려보았다. 입가의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그리 훈훈한 봄의 미소를 머금고 봄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그때 옆에서 부앙~ 하는 소리가 나서 쳐다보았다. 오토바이를 탄 여자가 스쳤다. 헬멧을 쓰지 않은 채 달리고 있었다.


그녀를 본 순간 세종은 얼음이 되었다.

봄에 얼어버린 얼음이었다.


스모키 화장도 사라졌고 애쉬 그레이 머리칼도 사라졌다. 하지만 앵두 빛 입술만은 선명한 그녀였다. 세종은 동공을 줄여 빛의 양을 조절해 보았다. 이리저리 해봐도 처음 보는 얼굴은 아니었다.


세종은 확신했다. 그녀가 그녀라는 걸 말이다.

20살에 보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슴 한편에 찌릿하게 생각났던 그녀. 1초 만에 얼음을 녹여버린 그녀.


그녀의 옆모습은 세종의 눈에 찰칵하고 찍혔다. 어깨에는 기타를 둘러멨다. 찢어진 청바지를 입었다. 그녀는 연못가를 지나 도서관 앞에서 좌측으로 회전했다. 세종은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또 그녀가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녀를 쫓아 뛰기 시작했다. 약속도, 꽃다발도 잊은 채 그냥 달렸다.

‘놓치면 안 돼.’


세종은 교내 규정 속도를 지키며 달리는 오토바이 정도는 쉽게 따라갈 수 있을 만큼 빠른 남자가 되어 있었다. 1km를 달린 후 오토바이 소리는 멈췄다. 그녀는 한 단과대학 안으로 들어갔다.


‘수의과대학?’


세종은 숨을 잠깐 고르고 그녀가 들어간 수의대 건물 안쪽으로 들어갔다. 불이 켜진 과 동아리 방에서 소리가 났다. 쇠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에 세종의 온몸 신경이 예민해졌다. 자잘한 마찰음이 계속 나는 그 방을 창문을 통해 훔쳐보았다.


세종은 거기에 있는 그녀가 스무 살에 보았던 바텐더 그녀가 확실함에 다시 한번 안도했다. 그녀는 의자와 보면대, 마이크를 세팅하고 자리에 앉았다.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는 감성적인 음률의 아주 유명한 곡이었다.



손 닿을 수 없는 저기 어딘가

오늘도 난 숨 쉬고 있지만

너와 머물던 작은 의자 위에

같은 모습의 바람이 지나네


B 밴드의 ‘Never Ending Story.’



세종은 그 섬세함에 귀를 기울이며 그녀를 숨죽여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주머니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뚱 뚜루루뚱뚱 띵 띠리리띵띵.”


새 휴대폰을 산 후 아직 바꾸지 못한 요란한 기본 벨 소리에 세종도 그녀도 놀랐다. 그녀가 창문 쪽을 쳐다보았고 세종은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문 쪽으로 천천히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세종은 급히 몸을 피해 화장실로 숨어들었다. 그리곤 통화버튼을 눌렀다. 가은이었다.


“너 어디야?”

“어, 잠깐 화장실.”


“금방 올 거지?”

“미안, 바로 못 가.”


“왜? 오래 걸려?”

“아니, 그건 아니고.”


“기다릴게. 천천히 볼일 보고 와.”

“아니, 기다리지 마.”


“왜?”

“나중에 얘기해.”


세종은 전화를 끊었다. 끊어야만 했다. 자신의 마음에 휘몰아친 이 감정을 숨긴 채 가은을 만날 순 없었다. 시작할 수는 더더욱 없었다.

연못가에 남겨진 가은은 벤치 위에 있던 종이 가방을 살펴보았다.


“아~ 예뻐라.”


안에 있는 꽃다발을 꺼냈다. 노란 안개꽃이 너무 예뻐 무릎에 올렸다. 못다 한 말이 있어 전화해도, 메시지를 보내도 세종은 답이 없었다. 그런 그를 그녀는 기다렸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문득 노란 안개꽃의 꽃말을 검색했다.

“기쁨과 우정.”

가은의 표정은 굳어졌고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릎 위에 있던 꽃다발을 벤치 위에 올려둔 채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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